나아만 이야기
시리아에는 나아만이라는 걸출한 군사령관이 있었습니다. 열왕기 말씀은 나아만을 가리켜 왕이 아끼는 인물 그리고 세간에 존경받던 자라고 묘사합니다. 그의 용모 역시 대단하여 말씀은 그를 가리켜 "강한 용사"라고 말합니다. 장군다운 풍모를 지녔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불행히도 모든 것을 갖춘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이 사람에게 나병, 오늘날에는 한센병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지금이야 적절한 항생제 치료를 통해 완치가 가능한 질병이 되었다지만, 고대 세계에서 한센병은 가장 무서운 전염병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치료가 불가능했고 완전 격리 외에는 병의 전파를 다스릴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그야말로 급전직하합니다. 한센병 앞에 그의 강한 용사다운 풍채도, 높은 권력도, 왕의 특별한 사랑도 별무소용이었습니다. 그가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시리아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와 효과가 좋다는 약을 구하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그의 몸에 찾아온 불치의 병을 치료할 순 없었습니다. 절망이 그를 엄습하던 그때 자기 집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어린 여자아이가 등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3b "주인 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어른의 나병을 고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소녀가 떠올린 그 예언자는 단연 엘리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지요. 엘리사를 만난 나아만은 믿기 힘든 제안 즉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처방을 듣고 처음에는 화를 내지만, 이내 엘리사의 말대로 몸을 씻으니, 한센병이 나았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몸의 치유라는 신비로운 기적, 엘리사의 용기, 나아만의 순종이라는 아름다운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는 이 멋진 이야기는 어린 시절 교회학교에서 많이 들었고 또 들을 때마다 설렜던 단연 최고의 성경 스토리였습니다.
전운(戰雲)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이 소녀가 전한 말의 의미에 대해서 특별히 이 소녀라는 작은 존재에 관해서는 자세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조금은 엉뚱한 제안을 한 어린아이라거나 혹은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한 연결 장치 정도로 여기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소녀를 주목해야 합니다. 이 소녀를 둘러싼 묘사의 두께가 두껍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구석구석에는 폭력과 적대의 기운이 틈타 있습니다. 단순한 치유 기적 이야기가 아니란 뜻입니다. 당시 시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에는 군사적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시리아의 왕이 나아만의 손에 붙여 보낸 친서와 막대한 보물입니다. 시리아 왕은 이스라엘에 다녀오겠다는 나아만에게 친서를 써주고 보물을 내어주는데, 편지의 내용과 보물의 금액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왕은 이렇게 써서 보냅니다. 본문 6절 하반절입니다.
6b "내가 이 편지와 함께 나의 신하 나아만을 귀하에게 보냅니다. 부디 그의 나병을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보물의 양은 이렇습니다. 은 열 달란트, 금 육천 개, 옷 열 벌, 성경학자들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환산하여 보니 족히 백억원은 넘는다고 합니다. 왕의 친서에는 정치적 메시지가 담기기 마련입니다. 시리아 왕은 짐짓 예의를 차리는 듯 하지만 그 속내는 냉혹합니다. 나의 장군을 너에게 보내니 그의 불치병을 고쳐라. 그것을 위해 이 많은 돈을 보낸다. 바꾸어 말하면 만약 이렇게 많은 돈을 보냈음에도 나의 장군을 고치지 못하면 그때는 전쟁이다. 너희 나라에 있는 예언자가 신통하여 어떤 병이라도 고친다고 하니 내가 믿어본다. 그러나 병을 고치지 못하면 그것은 곧 나아만과 나 그리고 나의 나라 시리아를 모욕한 것으로 간주하겠다. 이는 선전포고와 다름이 없습니다. 게다가 엘리사를 찾아간 나아만 행렬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보십시오. 본문 9절은 나아만이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와서 엘리사의 집 앞에 멈췄다고 말합니다. 병을 치료하러 찾아온 환자의 모습이 아니라 전쟁을 치르러 온 장군의 모습과 다름없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시리아의 의도를 단번에 간파했습니다. 절규에 가까운 그의 비명 소리를 본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7b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이렇게 사람을 보내어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니 될 말인가? 이것은 분명, 공연히 트집을 잡아 싸울 기회를 찾으려는 것이니, 자세히들 알아보도록 하시오."
단지 한 사람의 병을 낫게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간 전쟁이 발발하느냐 마느냐의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사실 나아만과 시리아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입니다. 나아만의 몸이 나으면 대장군을 잃게 되지 않으니 좋고, 병을 고치지 못하면 전쟁의 명분을 얻게 되니 이 또한 나쁘지 않습니다. 하여 이스라엘 왕은 절망합니다. 그 누구라도 한센병을 치유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전쟁 또한 피할 수 없는 그야말로 외통수에 걸려버렸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나아만 이야기에는 고조되는 적대감이, 여차하면 전쟁을 치르겠다는 적의와 살기가 가득합니다.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왕은 급기야 자기 옷을 찢어버립니다. 바로 이때 엘리사가 왕 앞에 나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8절 하반절입니다.
8b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 주십시오.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그에게 알려 주겠습니다."
엘리사의 담대한 발언, 곧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주십시오.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하겠습니다. 라는 말은 정확히 앞에서 말한 소녀의 말, 곧 "주인 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와 호응합니다. 마치 소녀와 엘리사가 서로 알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곳에 있지만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듯한 구도입니다. 상황이 아니라 상황 너머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이들은 이토록 차분합니다. 그러니 열왕기하에 기록된 이 짧은 에피소드를 진지하게 성찰할수록 이 소녀와 소녀의 말의 무게가 가볍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엘리사야 능력 있는 하나님의 예언자이기에 그럴 수 있다지만, 여기 이 작은 소녀는 예언자도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힘입은 사람도 아닌 그야말로 어린아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잡혀 온 소녀
이제 다시 이야기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이 소녀를 생각해 봅시다. 열왕기 말씀은 소녀의 이름이나 나이에 대해선 침묵합니다. 대신 딱 한 줄의 묘사만 들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2절 상반절입니다.
2 시리아가 군대를 일으켜서 이스라엘 땅에 쳐들어갔을 때에, 그 곳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잡아 온 적이 있었다.
소녀의 배경이 드러납니다. 이 소녀는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사로잡힌 전쟁 포로였습니다. 이 짧은 문장 속에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어떤 관계였는지 드러납니다. 두 나라는 서로의 약점을 살피고 틈이 나면 곧바로 군대를 일으켜 마을과 도시를 파괴하고, 고대의 전투가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삼았습니다. 소녀의 부모는 시리아 군대의 손에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혹 그날의 전투를 지휘한 장군이 나아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즐겁게 뛰놀던 마을에 군대가 들어와 유린하고 사랑하는 친구들, 이웃 어른들이 몰살되는 장면을 보았을 것입니다. 전쟁의 참상이 아직 어린 아이였던 이 소녀의 심신을 무너뜨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소녀에게 시리아와 시리아의 군대 그리고 그 군대의 총사령관인 나아만이 어떤 의미였겠습니까? 사랑하는 가족을 살해하고 평온하고 단란했던 가정을 파괴한 이들이고 정든 고향을 떠나 강제로 시종을 만들어버린 그야말로 원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아이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자기 주인이 불치의 병으로 죽음을 향해 가고 있을 때 그에게 회복의 길을 제시합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자가 가장 크고 강력한 자에게 살길을 일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부모의 원수이고 자기가 나고 자란 땅을 유린한 적입니다. 그럼에도 소녀는 나아만을 살리는 선택을 합니다. 이것이 어찌 가능할까요?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직 어린아이이질 않는가. 아이들은 결국 자기를 돌봐주는 이에게 정서적으로 의탁할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이들도 모르지 않습니다. 누가 자기를 사랑하고 누가 자리를 미워하고 업신여기는지 말입니다. 하물며 이 소녀는 나아만 총사령관의 아내의 시종이었습니다. 사리를 분별하고 총명했다는 뜻이지요. 이집트 파라오의 근위대장이었던 보디발은 당시 포로였던 청년 요셉을 자기 집의 살림을 맡아 관리하는 시종으로 삼았음을 기억하십시오. 이 소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시리아의 총사령관 나아만이 자기에게 어떤 존재인지 모를 리 없습니다. 이 소녀가 천사같이 선하고 착한 심성의 사람이기에 나아만이라는 사람과 그가 상징하는 시리아라는 나라를 용서하고 살리고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소녀는 알면서 원수를 살렸습니다.
이 아이에게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혹 나아만이 병에 걸려 비참하게 죽는 것이 곧 하나님의 심판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율법의 가르침임을, 그렇기에 스스로 침묵함으로 나아만에게 심판의 칼날을 내리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을 이유가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 작은 이스라엘 아이의 몸에 새겨진 또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듣던 하나님 이야기,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자기 조상들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시고, 거듭되는 잘못에도 무한히 용서하시고,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시고, 고통 속에 슬피 울 때 피할 길을 내주시는 그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이 아이의 감각 속에 아로새겨져 있었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지만, 이 아이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죽어가는 자를 내버려두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님을 말입니다. 나아만이라는 자가 사랑하는 부모님의 죽음에 책임이 있으며, 나의 고향을 파괴했고, 나를 이곳에 포로로 잡아 시종을 삼았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죽어가는 자에게 살길을 일러주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임을 이 아이는 온몸으로 감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텍' 이야기
일본인으로서 한국 역사를 연구하고 진보적인 역사 연구 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의 첫 외국인 연구실장을 지냈던 후지이 다케시 선생의 칼럼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일본에는 베트남전 징집을 양심적으로 거부한 탈영병들을 숨겨주는 '자텍'이라는 이름의 작은 단체가 있었습니다. 자텍은 일본의 반전 활동가들과 지식인들이 주축인 조직이긴 했지만, 대체로 평범한 소시민들로 구성된 작은 조직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탈영한 미군들을 각자 자기 집 지하에 숨겨 며칠을 보낸 후 주로 북유럽 등으로 망명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점조직이었는데, 탈영병이 점차 늘자, 규모가 커졌고, 그에 따라 미군에서도 자텍을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자텍에 어느 미국인 탈영병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행동이나 말이 조금 달랐습니다. '자텍' 활동가들은 단번에 그가 탈영병이 아닌 미군이 보낸 스파이임을 강하게 의심했지요. 자텍의 활동가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 사람을 내쳐야 하는가, 아니면 품어야 하는가. 만약 그가 스파이라면 어렵게 구축한 탈영 경로와 유럽으로의 망명 루트가 발각될 수 있고, 자텍이라는 조직 자체가 붕괴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며칠을 고민하고 심사숙고한 끝에 자텍의 활동가들은 그 스파이로 보이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99% 의심스러워도 단 1% 그가 도움이 필요한 진짜 탈영병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든 것이 발각되었고 조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는 스파이였습니다. 당시 자텍의 책임자로 활동했던 구리하라 유키오가 30년이 지난 뒤 그 일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다음은 칼럼 인용입니다.
구리하라 유키오(栗原幸夫)는 30년이 지난 뒤에 당시를 회고하며 그때 판단이 옳았다고 말했다. 조직을 지키기 위해 탈영병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면 오히려 탈영병을 지원하는 운동 자체가 붕괴했을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중략) 역설적이게도 조직을 희생시킴으로써 운동을 지켜냈다. 일단 조직은 파괴됐지만 몇 달 뒤 다른 이들에 의해 자텍이 재건되었고, 기관지를 내는 등 오히려 더욱 운동을 공개적으로 펼치면서 탈영병 지원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시민들에게 자텍을 지원해 달라고 하지 않고 알아서 자텍이 되어 달라고 호소했다. 실제로 여러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자텍이 생겨서 미군기지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직의 파괴는 오히려 운동의 확산을 낳았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8652.html)
저는 자텍 이야기를 들으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관념의 언어가 아니라 실천 가능한 현실의 언어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사랑이나 용서를 내가 정한 수준에 충분히 도달했을 때 가능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주 사랑스러워야 사랑이 가능하고, 저 사람이 하고 있는 용서가 내 마음에 흡족해야 용서할 수 있다고 여기지요. 그래서 사랑이 어렵고 용서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용서, 이해와 용납은 그것이 모자라고 의심스럽고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럼에도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용납하기로 내 마음을 억지로라도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조직을 파괴할 목적으로 잠입한 스파임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를 믿어준 자텍의 활동가들처럼 말입니다.
이 소녀도 마찬가지였겠지요. 원수인 나아만을 죽음의 길에 내버려두는 선택과 살림의 길로 인도하는 선택 가운데 고민하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소녀는 살림의 길을 택합니다. 알면서 선택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길이 소녀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가 살림의 길을 선택한 순간 하나님은 소녀와 함께했습니다. 이 작은 아이의 말에 하나님의 뜻이 실렸습니다. 나아만의 아내도 나아만 자신도 그리고 시리아의 왕 그 누구도 이 작은 사람의 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이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의 결단은 나아만의 몸을 살렸습니다. 시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를 중단시켰습니다. 이방의 장군 나아만은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이 소녀의 긍휼한 심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청년 여러분, 원수에게 살길을 일러준 이 소녀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의 이해와 용서와 용납과 그리고 사랑은 이러해야 합니다. 다 알면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소녀가 자기 처지를 비관했다면 나아만을 엘리사에게 인도하지 않았겠지요. 소녀는 크신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럽시다. 현실에 사로잡히면 내가 한낱 포로이고, 노예이며, 무가치한 어린 아이일뿐이라고 스스로를 폄훼할 뿐입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떠올리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라도 여러분의 상황이 어떠하더라도 긍휼을 품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임을 잊지 마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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