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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돈 앞에 지혜롭기 혹은 어리석기 (눅 16:1-13), 창조절 셋째 주일

by 청파비둘기 2025. 9. 21.

청지기의 기이한 대처
복음서가 들려주는 주님의 말씀 가운데 어느 하나 간단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의도가 쉽고 간명하게 드러나는 말씀도 있지만, 대부분 오랜 숙의와 성찰 그리고 적용과 실천이라는 과정을 통과해야 희미한 의미라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누가복음 16장 1절에서 13절 말씀은 특히나 그 난해함이 이를 데가 없습니다. 내용이 어렵다기보다는 우리가 주님 말씀을 통해 기대하는 바와 사뭇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 비유에 관한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판단을 뒤흔듭니다. 자, 여러분들도 이 비유 말씀을 듣는 주님의 제자들이라 생각하고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고을에 부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에겐 청지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청지기는 재산 관리인을 뜻합니다. 돈 관리하는 직원을 따로 고용할 정도로 이 사람의 재산이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청지기는 처음 얼마간 열심히 일했겠지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흉흉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이야기가 돌았기 때문입니다. 낭비한다는 말만으로는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인지 밝히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그의 행위에 대한 소문이 세상에 퍼졌다는 말에 쓰인 헬라어가 '디아발로(διαβάλλω)'라는 말인데, 고소하다, 비방하다는 뜻입니다. 즉 이 청지기가 아마도 주인의 재산을 착복했든가 아니면 재산에 큰 손해를 입혔기에 고소당할 정도의 큰 잘못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주인은 청지기를 해고합니다.

청지기는 그제야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게으름 부리지 말고, 조금 더 열심히 일할걸, 주인의 재산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걸, 그의 재산에 손을 대지 말 걸, 이런저런 가정을 되뇌어보아도 이미 늦은 일이지요. 재판에 회부되어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지경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청지기의 푸념이 가관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낯이 부끄럽구나." 무슨 뜻입니까? 평생 시원하고 편안한 사무실에 앉아 주인의 돈 관리라는 제법 근사한 일을 하며 살았는데, 이제 직장을 잃고 육체노동을 하자니 삽 하나 들 힘도 없고, 빌어먹고 살자니 체면이 서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한심하지요. 이 자의 성품이 오롯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 보통 명민한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어떤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이제 그의 임기응변을 봅시다.

자신의 해고 소식이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전 청지기는 재빨리 자기 주인에게 빚을 진 채무자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렇게 찾아온 첫째 사람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내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기름 백 말이오' 합니다. 그러자 청지기는 기가 막힌 명령을 내립니다. '자, 이것이 당신의 빚문서요. 어서 앉아서, 쉰 말이라고 적으시오' 이 사람이 청지기의 주인에게 빌린 기름이 백 말이 기록된 차용증을 위조해 기름 쉰 말만 빌렸다고 고쳐 쓰게 한 것이지요. 그 유명한 회계장부 조작, 사문서위조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말을 합니다. 이번에는 밀 백섬을 빌린 사람인데, 그에게는 밀 여든 섬을 빌렸다고 장부를 조작하게 합니다.


주인과 주님의 기이한 반응
자, 여기까지 들으시니 어떠신지요? 청지기가 제정신인가 싶지요. 회계장부 조작도 중범죄인데 무엇보다 주인에게 돌아가야할 채무를 제 스스로 깎았기에, 주인은 또 다시 재산상의 손해를 입었습니다. 이제는 해고로 끝날 일이 아니게 되었지요.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나옵니다. 제 마음대로 채무를 조정한 청지기를 향해 주인은 그가 슬기로운 일을 했다고 칭찬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판단이 흔들립니다. 도대체 왜? 회계장부 조작이라는 범죄가 어째서 슬기로운 일이 되는가? 여기에 어떤 반전이 있는 것인가 싶어 말씀을 이어서 읽어 나가다보면 우리는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 청지기가 벌인 행동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우리가 예상하는 바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최종 판단을 들어보겠습니다. 8절 하반절부터 13절까지가 이 비유에 관한 주님의 평가입니다. 먼저 8절 하반절입니다. 

8b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하는 거래란 우리가 막 살펴본 청지기와 주인 그리고 채무자들 사이에서의 거래입니다. 아니, 불법행위라고 보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행동이 빛의 자녀들 그러니까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보다 더 슬기롭다고 평가하십니다. 청지기의 기이한 처사를 칭찬한 주인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시는 듯한 주님의 말씀은 더더욱 난해합니다. 일차적으로 이런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습니다. 동기와 방식이 다소 불의하다고 할지라도 기지를 발휘해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슬기로운 일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위기의 순간에 좌절하거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한가롭게 따지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여기 이 청지기와 같이 지혜를 발휘하여 지체없이 돌파하라. 주님은 이런 의도를 갖고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일까요? 일견 타당한 듯 보이지만 윤리적으로 매우 불편한 결론임이 분명합니다. 불의한 동기가 한두 번의 요행으로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지만, 결국엔 파국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이 어렵고 난해한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 다름 아닌 '비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가상의 이야기인 비유를 통해 단지 이 비유의 상황이나 사람을 닮으라거나 따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비유가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감춰진 진실이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이를 염두에 두고 이 청지기가 했던 일을 다시 한번 자세히 보겠습니다. 


드러나는 진실
이번에는 청지기가 조작한 채무 변제 비율을 살펴봅시다. 6절과 7절을 다시 봅시다. 기름 백 말을 빚진 사람은 그 채무가 50% 감면된 쉰 말이 되었습니다. 밀 백 섬을 빚진 사람은 마찬가지로 채무가 조정되었지만, 그 비율은 20%가 감면된 여든 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기름은 50%가 조정되고, 밀가루는 20%가 조정되었으니 말입니다. 이는 단지 청지기의 기분에 따른 결정이 아닙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청지기의 채무 조정 비율은 당시 현물을 빌릴 때 부과되는 이자율을 나타낸다고 보고 있습니다. 기름은 부패하기 쉬웠기에 밀보다 더 높은 이자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빚진 사람들의 원금은 본래 기름 50말, 밀 80섬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계산해 보십시오. 빌린 기름의 50% 빌린 밀의 25%가 주인에게 주어야 할 이자 수익이었던 것이지요. 당대에 사업을 하하거나 생계를 위해 밀이나 기름을 꾸어야 할 때 얼마나 말도 않되는 이자가 붙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주인은 그야말로 이자만으로도 원금의 두 배를 벌어들이는 기적을 누립니다.

청지기가 자기 마음대로 이자를 깎아 주었기에 주인은 자기 몫의 수익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원금 정도만 회수하게 된 셈이지요. 그런데도 주인은 청지기를 칭찬합니다. 재무적으로는 손해를 보았으나 다른 쪽으로는 이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익일까요? 빚을 탕감 받은 사람들을 생각해 봅시다. 원금과 더불어 높은 이자가 무척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청지기가 이자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때 채무자는 누구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되겠습니까? 주인입니다. 주인의 넓은 마음과 넉넉한 인심에 크게 탄복했겠지요. 주인은 돈 대신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명예가 뭐 그리 대수인가 싶지만, 고대 사회에서 명예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명예 때문에 전쟁도 일어났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하튼 주인은 상당량의 이자 수익을 잃게 되어 속이 좀 쓰리지만, 세간의 칭송을 얻게 되었으니, 약간의 쓴웃음을 지으며 청지기를 칭찬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청지기는 화를 면했고, 주인은 명예를 얻었고, 채무자들은 빚 부담이 경감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모두에게 이로운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결말인가요? 주인은 멋쩍게 웃고 있고, 청지기는 비열하게 웃고 있고, 채무자들은 감격에 겨워 웃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느 부조리극 혹은 블랙 코미디 영화의 엔딩 같지는 않은지요? 관객인 우리는 헛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청지기가 제 목숨 구하기 위해 발휘한 잔꾀가 당대의 부유층이 얼마나 많은 폭리를 취하고 있는지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감춰진 진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지금 여기 주인과 청지기가 벌이는 일 자체가 율법을 심각하게 어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이자를 통한 수익추구를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레위기 25장 36절에서 38절을 보십시오. 조금 길지만 잘 들어보십시오. 

35   너희 동족 가운데, 아주 가난해서, 도저히 자기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너희의 곁에 살면, 너희는 그를 돌보아 주어야 한다. 너희는 그를, 나그네나 임시 거주자처럼, 너희와 함께 살도록 하여야 한다.
36   그에게서는 이자를 받아도 안 되고, 어떤 이익을 남기려고 해서도 안 된다. 너희가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안다면, 너희의 동족을 너희의 곁에 데리고 함께 살아야 한다.
37   너희는 그런 사람에게, 이자를 받을 목적으로 돈을 꾸어 주거나, 이익을 볼 셈으로 먹거리를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유대인은 이자를 통해 이익을 남길 수 없습니다. 특히 가난한 이에게 어떤 경우에도 이자를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비유 속 주인과 그에게 복무하는 청지기는 어떠합니까? 거의 고리대금업자나 다름이 없지요. 그런데 과도한 이자로 폭리를 취하고 장부를 조작해 사익을 추구하는 일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음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 또한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모스 8장 5절의 두 번째 문장을 보십시오.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낼 수 있을까? 되는 줄이고, 추는 늘이면서, 가짜 저울로 속이자." 아모스는 주전 8세기 예언자입니다. 율법을 어기고 조작과 부정을 통한 이익 추구가 무려 주님 오시기 800년 전부터 횡횡했다는 뜻이지요. 불법과 폭리의 역사가 얼마나 끈질긴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오늘의 비유는 조작과 부정이 만연한 세상을 비틀어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늘리기 위해 참으로 지혜롭게 행동합니다. 율법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고, 살인적인 이자율을 당연하게 제시합니다. 호소할 곳 없는 힘없는 이들은 고리대금의 덫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여 주님의 말씀,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는 말씀은 그야말로 당연한 말씀입니다. 거래 가운데 더 많은 이문을 내기 위해 얼마나 지혜롭게 행동합니까? 설사 부정을 저지르고 율법을 어기면서까지도 말입니다. 빛의 자녀들이 세상의 자녀들이 하는 거래 방식보다 지혜로울 수 없습니다. 아니 지혜로워선 안됩니다. 돈에 관하여 세상의 지혜를 쫓아가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짓밟아야 하고 또한 당연하게도 사람을 억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8장 6절을 보십시오. "헐값에 가난한 사람들을 사고 신 한 켤레 값으로 빈궁한 사람들을 사자. 찌꺼기 밀까지도 팔아먹자""고 합니다. 불의한 사람들은 사람을 신발 한 켤레 값으로 사고 파는 것을 지혜롭다 여겼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거래 방식입니다. 하여 주님은 돈에 관하여 지혜롭지 말라, 차라리 어리석어라는 말씀을 역설적으로 들려주고 계십니다. 


불의한 재물 사용법
돈에는 근본적으로 불의한 측면이 있습니다. 오늘 비유 말씀을 해석하시는 주님 또한 "불의한 재물"이라는 표현을 계속해서 사용합니다. 여기에 재물로 번역된 말의 헬라어는 '맘모나스(μαμμωνᾶς)' 그 유명한 맘몬입니다. 맘몬이라는 우상은 명민하고 지혜롭습니다. 오늘 비유의 청지기의 놀라운 지혜를 보아서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물은 물론 불의하지만, 그렇다고 제물과 완전히 담을 쌓고 금욕의 삶을 살라는 것도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재물은 불의할지라도 그 지향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일러주십니다. 본문 9절을 봅시다. 

9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여기서 사귀라는 말이 돈으로 친구의 환심을 사라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에 쓰인 사귀다는 동사는 만들다, 창조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재물이 비록 불의한 속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친구를 만들고 사람을 창조하는 데 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돈으로 무엇을 합니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의 자가증식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 일에 최대의 지혜를 발휘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돈으로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다. 우리가 돈으로 해야 할 일은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사람이 돈 보다 귀함은 자명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 반대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돈과 재물을 섬세하고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작은 돈이라 할지라도 그 쓰임이 올발라야 함을 주님은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여 오늘 이 어렵고 난해한 비유 말씀에서 주님이 들려주시고자 하는 결론이며 주제가 13절에 비로소 등장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두 주인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는 맘몬입니다. 지혜롭고 명민하며 자기 증식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필요하다면 겉보기에 좋은 일을 해서라도 생명을 이어 나가려 하는 바로 그 맘몬입니다. 또 다른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이 주인은 어리석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이신 주님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신의 특권을 포기하는 우주적 손해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주인은 패배의 상징인 십자가를 지시고 죽었습니다. 경제학으로 보자면 최악의 지도자입니다. 자, 너희는 어느 주인을 선택할 것인가?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는 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돈과 영원히 벗하며 살아야 합니다. 돈 많으면 좋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보고 싶은 책이 생기면 중고 서점부터 검색하지 않고 배송비 상관없이 새 책을 바로바로 사고 싶습니다. 돈에 지혜로워서 제 사례비 이외에 다른 수입이 마구 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들 때 있었음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합시다. 재물에는 지혜가 조금 부족하더라고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에는 열심을 냅시다. 온 세상이 돈의 지혜를 택하며 질주하지만, 그 세상이 만들어내는 오늘의 모습이 얼마나 파괴적입니까? 그리스도인들 된 우리가 이 질주에서 한 걸음 물러나 세상을 돌아보고 사람을 만들고 돈의 쓰임을 바르게 세워간다면 폭주하는 이 세상에 희망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재물에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보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