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말한다는 것의 버거움
밤낮의 기온차가 커지는 계절이 되면 으레 한 번씩 몸살감기에 걸리곤 하는데, 올해에도 어김없었습니다. 이틀 정도는 참았는데, 안 되겠다 싶어서 내과를 찾았습니다. 대기실에 있다가 차례가 되어 의사 앞으로 불려 가 앉았습니다. 의사가 묻습니다. 어디가 불편해서 왔느냐고. 이때 저에게는 언제나 수수께끼 같은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분명 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픈데, 그 아픔의 감각은 분명한 현실이고 실존인데, 이상하게도 의사 앞에만 서면 그 아픈 것들을 온전한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두통이 있느냐는 말에, 머리가 아프긴 한데 아주 많이 아픈 것 같지는 않기도 하고. 낮에는 괜찮은데 저녁이 되면 또다시 아픈 것 같기도 하고요. 몸이 어떻게 아프냐는 질문에는 답하기가 더욱 곤란합니다. 쿡쿡 찌르는 것 같기도 하고, 얻어맞은 것같이 아프기도 하고, 뭉근하게 아픈 것 같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렇게 우물쭈물 그럭저럭 답하고 나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의사 선생님 덕분에 적절한 치료를 받고 약을 타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내 몸에 침입한 통증을 적확한 언어로 전환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망가뜨린 막대한 고통을 말과 글로 번역하는 일은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일일까요. 고통의 경험과 기억을 언어로 온전히 표상하는 일이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요. 그럼에도 세상은 네가 당한 고통과 고난을 낱낱이 그리고 상세히 말로써 서술하라고 명령합니다. 네가 온전한 말로 명징하게 설명해야 우리가 너의 고통을 납득하고 도울 길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필요하다면 네가 당한 고통을 최대한의 리얼리즘을 동원하여 재현해 보라고 말합니다. 네가 당한 고통과 피해가 정확히 입증되지 않으면 우리로서는 너를 도울 방도가 없다고 겁을 주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언어를 갖지 못한 자는 자기 고통을 증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 인간의 고통과 고난의 경험이 그리 쉽고 간단하게 언어로서 표상이 되던가요. 분명히 실존하고 살아있는 고통이지만 설명되지 못하고 기록되지 못한 고통, 그렇기에 완결된 서사로 남지 못한 고통은 침묵 속에 사라지고 맙니다. 인류 역사 속에 자행된 야만적인 폭력에 사그라진 침묵의 고통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말 그대로 언어화되지 못해 고통을 증명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공할 신적 폭력 앞에 모든 것을 잃은 한 사람을 만나고자 합니다. 그가 당한 고통은 막대하여 그 고통에 관한 어떤 말이나 몸짓조차도 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욥입니다.
자기 고난을 설명하지 못하는 욥
우스라는 곳에 욥이라는 의로운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흠이 없고 악을 멀리했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복을 받아 자식이 많았고, 재산도 풍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가진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아끼던 가산을 모두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들이 불시에 죽어버렸습니다. 온몸에 극심한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우리야 욥이 고난 당한 이유가 하나님과 사탄이 맺은 신적 내기에 따름임을 알고 있으나, 욥으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절망을 버티는 힘이 의미라는데, 욥은 자기 고통의 의미를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의롭고, 약자들 돌보기를 아끼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바르게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해 욥은 하나님께 벌을 받을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절망하며 울부짖는 욥에게 엘리바스, 빌닷, 그리고 소발이라는 친구들이 찾아옵니다. 사랑하는 친구에게 닥친 불행한 소식을 듣고 한 달음에 온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 마주한 것은 참담한 욥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저 사람이 자기들의 친구 욥인지 조차 몰랐습니다. 하여 친구들은 욥의 곁에서 침묵하고 위로하기를 택합니다. 본문 13절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2:13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으면서도,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도 처참하여, 입을 열어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위로와 격려의 정석입니다. 말도 안 되는 참상 앞에 이해와 설명을 포기하고 침묵을 택하는 아름다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부터 벌어집니다. 고통 속에 있는 욥이 하나님께 탄원하며 울부짖자, 친구들이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친구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들어줄 테니 자, 이제부터 너의 고통과 고난을 차분하게 설명해 보라. 이제부터 욥은 폭력적인 대화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자기에게 닥친 불가해한 고난과 고통을 조리있게 설명해 내야 하는 증인석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논쟁이 시작됩니다. 욥의 친구들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 그리고 후에 등장하는 엘리후까지 그들이 일관되게 제기하는 주장은, 인간의 고난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그러니 욥에게 죄가 있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는 변함없고 확실하다. 의인은 형통하고 악인은 망한다. 너는 죄인이다. 하나님의 인과응보는 단 한 번도 틀린 일이 없으니, 욥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한결같이 말합니다. 매우 논리적이고 신학적이기까지 합니다.
반면, 욥의 답은 일관되지 못하고 비논리적입니다. 그는 말하길 나는 의롭게 살았을 뿐이다. 하나님은 어째서 침묵하는가? 하나님이 과연 계시기는 한 것인가? 이렇게 소리치다가 어느 대목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주님만 믿는다고 찬양하기도 합니다. 말이라기보다는 비명이나 울부짖음, 조금 심하게 말해 횡설수설에 가깝습니다. 친구들이 욥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어 재차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욥은 답답합니다. 나를 위해 달려와 주었음에도 어째서 나의 탄식 안에 담긴 진짜 소리를 듣지 못하느냐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욥기 19장 23절이 욥의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은 말합니다.
23 아, 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기억하여 주었으면!
24 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비망록에 기록하여 주었으면! 누가 있어 내가 한 말이 영원히 남도록 바위에 글을 새겨 주었으면!
욥의 비탄이 느껴지시는지요? 욥은 누구도 내 말을 듣지 않는 이 상황이 절망스럽습니다. 재판정에 욥과 그의 친구들이 증언한다면 재판관과 배심원들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겠습니까? 증언이 일치하고 일관된 친구들 아니겠습니다. 욥의 증언은 일관되지 못하니 폐기 될 것입니다. 그의 증언이 폐기 된다면 욥이 당한 고통도 없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에 누군가라도 내 말을 듣고 기억해 주길, 그저 누군가 내 말을 듣고 바위에라도 기록해 주길 바랄 뿐이지요. 누군가 그 바위에 적힌 욥의 심정을 보고 언젠가 나의 진심을 알아주길 바라고 있는 것이지요.
욥의 울부짖음은 계속 이어집니다. 본문 25절입니다.
25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 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욥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세상 모두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니 내 고통을 들으실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욥의 고백을 잘 들어보십시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 위에 우뚝" 서신다는 말에 사용된 땅은 히브리어로 '아파르(עָפָר)'로 먼지, 티끌이라는 말로 '무덤'의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무덤 앞에서 진실을 증명하신다는 말입니다. 26절에서도 욥은 자기 몸이 다 썩은 이후에 하나님을 본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욥의 진실은 욥 자신이 죽고 나서야 증명될 수 있다는 것, 바꾸어 말해 욥의 생전에는 자기 진실을 이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과 다름 아닙니다.
자기 고통의 소리를 온전히 들으시는 분이 하나님 밖에 없다는 고백임과 동시에 살아서는 자기 고통을 이해 받을 수 없으리라는 비극적 자조입니다. 욥의 탄식이 참으로 가련합니다. 욥이 처한 처참한 현실을 보면 그의 말에 납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 욥은 모든 희망을 잃었고 온 몸은 극도의 통증 가운데 있으며, 그의 세상 동료들은 누구도 욥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말할 수 없다는 것
욥의 암담한 고백을 보며 우리 시대의 어둠들이 오버랩 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정돈되고 납득할 수 있는 언어를 갖추지 못한 고통은 기억되지 못합니다. 우리 세상엔 자기 고통과 고난의 기억을 온전한 언어로 말할 수 없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픔의 문제뿐만 아니라 부당함과 부조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유명 베이글 가게에서 한 20대 청년 노동자가 주 80시간을 일하다가 과로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숨이 멈출 때까지 그는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지요. 그가 자기 입으로 그 말을 내어 뱉지는 않았겠으나 그의 얼굴엔 땀이 가득했을 것이고, 마른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며, 멋쩍게 웃으며 쉬면 좋겠다는 말을 동료들에게 나누기는 했겠지요. 그러나 그 청년의 땀과 고된 표정, 흐려진 눈의 초점들은 정돈된 언어가 아니었기에 존중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 현실임에도 언어화되지 못한 생의 표지들이 증거로 채택되지 못했기에 그 베이글 가게엔 산업재해가 없었던 것입니다. 욥의 몸의 감각 안에는 그의 고통이 살아있고 명징했지만, 친구들에겐 그 고통이 전달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지난 10월 29일, 광화문과 이태원에는 '이태원 참사 3주기' 기억 행사가 있었습니다. 3년이 지나서야 정부가 나서서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을 위로하고 참사의 책임이 정부에게도 있었음을 시인했습니다. 늦었지만 다행입니다. 관련 영상과 기사를 보다 피해를 당한 한 청년의 어머니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금지옥엽으로 키운 20대 딸을 창졸간에 잃었으니 얼마나 황망하겠습니까. 그날로 모든 삶이 무너지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당연하지요. 그때 주변에서 정신과 진료와 심리 상담을 권하셨고, 또 주변에서도 돕겠다고 나선 전문가와 의사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상담도, 정신과 진료도 받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상담도 받고 정신과 진료도 받으면 한결 나을 텐데 왜 받지 않느냐고 주변에서 걱정했겠지요. 혹 어떤 이는 답답해하며 살만하니 그런 것 아니겠느냐는 모진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백하건데 그 짧은 순간 저 역시 그와 비슷한 어떤 모진 단상들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인터뷰 말미에 그 어머니께서 자기가 상담과 진료받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는데,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어머니는 말하길, 상담사나 의사 앞에 가면 지난 일, 그러니까 딸이 죽고 고통당한 아픔을 기억에서 꺼내어 또 다시설명하고 재현해야 하는데 그럴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아 털어놓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여기, 언어로 표현되지 못한채 대목이 박혀버린 침묵의 소리와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말로 표현되지 못한 고통의 증언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의사 앞에서조차 꺼내지 못한 침묵의 증언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교토 대학의 명예 교수이자 팔레스타인 문제 및 국가주의가 은폐한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온 학자 오카 마리는 그의 책 <기억 서사>에서 "증언을 듣는다는 것은 이야기되는 언어의 의미가 아니라 그런 침묵과 신음, 몸부림이 이야기하는 전체를 받아들이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오카 마리, <기억 서사>, 교유서가, 2024, 61.).
하나님이 들으시듯
믿음의 사람들은 침묵의 증언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당한 이의 한숨 소리에서, 말줄임표에서, 이제 괜찮다는 듯 서둘러 끝내려는 종결 어미의 마침표에서 고난의 흔적을 찾아내고 고통의 기억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탄식하는 이의 몸이 보내는 신호에 반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은 그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하셨던 분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 말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셨기에 치유하시고 가르치신 분이 아닙니다. 목 놓아 우느라 말 못 하는 이들에게 오셨습니다. 귀신 들려 횡설수설하는 이에게 오셨습니다. 게다가 자신을 죽이겠다는 협박조차 끌어 안으셨습니다. 이들의 말은 모두 말이 아니었습니다. 정돈된 서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공백과 엉킴 속에서도 고통의 흔적을 만지시고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논리로 대응하는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포용하는 분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욥기의 마지막 즈음 모든 욥과 친구들 사이에 모든 논쟁 끝에 하나님이 등장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욥을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욥38:2)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욥을 꾸짖고 야단치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꾸짖음 안에는 '나는 네가 죽어서야 나타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나는 네게 살아있는 동안 네가 숨 쉬고 있는 모든 순간 동안 듣고 있는 하나님이다'라는 진심이 담겨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차마 말로 꺼내지 못하고 끙끙거리는 소리, 흐느낌, 깊고 마른 한숨 소리를 모두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살피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세상 도처에 자기 고난을 말하지 못해 마른 눈물만 훔치는 이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내가 죽어야 내 진실이 받아들여질까, 라는 참담한 읊조림이 여전히 가득한 세상은 분명 잘못된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소리치고 계십니다. 아니다. 내가 지금 듣고 있다. 너의 말 아닌 모든 소리와 몸짓을 다 듣고 있으니, 힘을 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마음 우리가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 듣고 힘을 내었으니, 우리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숨죽인 고통의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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