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없는 하나님의 성전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사역은 성전 안에서 이뤄집니다. 주님은 성전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가셨습니다. 성전에서의 첫 장면을 기억하시지요. 주님은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으시며, 너희들이 내 아버지의 집이며 만일을 위해 기도하는 공간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꾸짖습니다. 이 사건은 평온했던 성전의 일상을 뒤흔들었고, 무엇보다 성전에서 경제적 이득과 정치적 혜택을 누리던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이후로도 주님은 성전에 머무시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여러 차례 논쟁하시고 그들의 위선을 폭로하셨습니다. 특히, 가진 재산이라곤 렙돈 두 닢이 다였던 가난한 과부가 그 돈 전부를 성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시곤, 가련한 이들의 얼마 되지 않는 소유까지 강탈하는 성전의 비뚤어진 종교 시스템을 비판하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 되어야 했지만, 예수님 당대의 성전은 하나님의 모습은커녕 종교 권력을 가진 자들의 욕망의 놀이터가 되어버렸지요.
성전을 두른 크고 웅장한 기둥과 높은 벽은 하나님의 전능함을 드러내는 상징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이 어디까지 오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이 되어버렸습니다. 황금으로 장식된 각종 성전 기물은 그 황금만큼이나 매력적인 우상으로 뒤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상상하며 만들고 세웠던 성전의 모든 것들이 신의 상징이 아니라, 저속하고 과장된 장식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해야할 성전이 그저 의미없는 제사가 반복되는 제사공장, 예배공장이 된 것입니다.
성전의 본질적 가치가 사라졌음에도 사람들은 성전을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방문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성전의 위용에 연신 감탄했습니다. 정교하게 제작된 성전의 각종 기물과 시설은 마음을 빼앗기기에 충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시던 그때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성전에 들어왔고, 그 성전을 바라보며 성전의 아름다움을 칭찬했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하지요. 사람들이 "아름다운 돌과 봉헌물"로 꾸며진 성전에 감탄하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6절입니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돌 한 개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주님은 잔뜩 고양된 마음으로 성전을 둘러보고 있는 이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대단히 언짢았겠지요.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은 이들의 마음에 와서 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무너지지 않는 곳, 아니 무너질 수 없는 장소라고 사람들은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데 어찌 하나님의 집이 무너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역사는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성전은 주후 70년경 로마의 장군 티투스(훗날 베스파니우스 황제가 됨)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음을 말입니다. 성전이 주는 힘과 부유함에 눈이 멀어버린 이들은 로마의 칼날이 성전 문 앞에 당도하기까지 자기들의 성전이 무너질 것이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욕망에 눈이 멀어 성전의 균열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균열은 시작됐다
인간이란 자기 세상이 언제까지나 견고하리라 생각합니다. 비단 건물만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쌓아 올린 역사와 전통,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은 원리와 원칙들이 변함없이 세상에 존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접어들던 무렵 세계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찬양했습니다. 산업기술은 급격하게 발달했고,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 끊임없이 쏟아지던 때입니다. 철학적으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륙에서는 실존주의 철학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마르틴 하이데거를 위시하여 인간의 존재와 이유, 자유와 책임 그리고 인간 가능성과 낙관의 철학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적·신학적으로는 또 어떠한가요. 인간의 경험과 이성을 강조하기 시작했고, 종교적 관념보다는 개인의 감각과 판단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말로 아름다운 시대라는 뜻을 가진 '벨 에포크'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지요. 당시의 세상은 인간들이 찬란하게 쌓아올린 가능성의 탑이 그야말로 빛을 발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탑은 실상 그 아래에서부터 조금씩 붕괴하고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으로 막대한 부가 창출되기 시작하자 경제적 양극화는 극심해졌고, 노동자들의 처우는 끔찍했으며, 어린아이들을 착취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서구 열강들의 식민 지배가 절정을 달했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으며, 파괴적인 대량 살상 무기들도 바로 이때 발명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하게도 전쟁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전쟁이 끝난 지 채 반세기도 되기 전에 전 일류를 절망에 빠뜨렸던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납니다.
영원히 견고하리라 믿어의심치 않았던 인간 낙관의 바벨탑은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18세기 말에서부터 19세기를 지나서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역사를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선명합니다. 인간은 어리석었고 교만했지요. 전쟁을 막지 못한 것이 자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무려 200년에 가까운 시간입니다. 우리가 만약 19세기 어느 유럽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 시대의 세계가 50년 안에 완전히 멸망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일상의 시계열 안에서 살고 있는 개인은 당면한 자기 시대의 붕괴를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1940년대 오래 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먼 시기는 아닙니다. 이때 유럽 어느 도시에 살던 그 누구도 자기들의 땅인 유럽 대륙 곳곳에 수백만의 사람들을 절멸시킨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라 세워지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두려움이 하나 있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인공지능 시대라지요. 타이핑 몇 번이면 그럴싸한 글과 그림 심지어 동영상도 제작됩니다. 이제 자료를 찾고 공부하기 위해 도서관을 뒤지고 논문을 찾아 정리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파괴적 혁신을 자랑하는 제품이 쏟아집니다. 머지않아 자율주행의 시대가 곧 당도할 것만 같습니다. 어마어마한 데이터가 순식간에 처리되는 초이성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비이성적인 듯 보이는 국가 지도자들이 투표로 선출되고 있습니다. '전체주의'니 '파시즘'이니 하는 것들이 역사책에 쓰여진 지나간 사조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정치 사회 이슈와 갈등을 보노라면, 전체주의적 분위기가 되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경제적 이득을 노린 강대국들의 횡포가 어느 때보다 노골화되고 있습니다. 상대적인 약소국들은 이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막대한 데이터는 지구 에너지를 뽑아 쓰고 있고, 데이터 센터의 발열은 위협적인 수준이며, 그저 학교 숙제를 도와주는 데 사용될 것 같은 AI 기술은 인간을 통제하고 무엇보다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무기 체계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이 한 세기 전과 과연 그리 다를까 우리는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질문이 필요하다
이런 때에 믿음의 사람들에게 깊고도 중대하게 성찰해야 할 말씀이 제자들의 입을 통해 들려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십시오. 성전에서 감탄하는 사람들에게 날이 선 말씀을 전한 주님께 제자들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7 . "선생님, 그러면 이런 일들이 언제 있겠습니까? 또 이런 일이 일어나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질 날이 오리란 주님의 말씀에 성전의 사람들은 침묵했지만, 주님의 제자들은 질문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이 사사로운 말씀이 아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성전의 위용과 아름다움에 심취해 있던 시대에 그 성전이 무너지고 있음을 감각한 사람들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늘날도 질문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전에 없던 편리와 낙관이 팽배한 시대에 균열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다 하며 나를 따르라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쟁과 난리의 소문이 들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큰 지진이 나고 곳곳에 기근과 역병이 창궐하고 하늘로부터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고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내쫓으며 감옥에 넘겨줄 것이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당한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제자들을 비난하고 박해했던 바와 같이, 평안의 시대가 끝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여길 것입니다. 의심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평화를 해치고 사회적 불안을 조장하는 사람들이라고 매도할 것입니다. 위기에 처한 인간을 구해낼 새로운 기술과 능력이 여기에 있다고 예언자처럼 나서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세상이 무너지고 난 다음이 아니라, 세상이 공고하던 때에, 그러니까 성전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때에 선포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전에는 오늘도 제사가 드려졌고, 찬송이 울렸으며, 율법이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나 잘 작동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집이 무너진다는 이 말씀이 얼마나 괴팍하게 들렸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집인 성전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니, 제사와 찬송과 율법이 선포되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권력 있는 자들은 온갖 호사를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성전이라면 무너지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교회력의 마지막에 이른 오늘 성서 일과의 복음서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말씀을 묵상하고 성찰하라고 말합니다. 평안과 평화의 시대에 붕괴의 징조가 있음을 예민하게 바라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함께 읽은 구약의 말라기 말씀 곧 "용광로의 불길같이, 모든 것을 살라 버릴 날이 온다. 모든 교만한 자와 악한 일을 하는 자가 지푸라기같이 타 버릴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불이 그들을 살라서, 그 뿌리와 가지를 남김없이" 태우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이 두렵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시대를 세심하게 봅시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흐느낌이 있습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상처들이 가득합니다. 어느 젊은 연예인이 수백억짜리 집을 샀다는 기사와 전세사기로 자기 집을 잃은 같은 또래의 청년들이 공존하는 시대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디를 보아야 하겠습니까? 낙관의 시대에 재난의 징조를 바라봅시다. 염세적으로 살아갈 필요는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질문하고 의문을 던지며 하나님의 뜻이 세상의 원리와 똑같지만은 않음을 잊지 말고 살아야 됩니다. 믿음을 갖고 질문을 던지며 사는 여러분들 되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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