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29) 이 말씀은 사복음서에서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특별한 기록입니다. 공관복음이라 부르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는 요한의 이 고백이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공관복음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 주는 모습이 마치 실시간 영화처럼 묘사됩니다(예수께서 나오신다, 물에 들어가신다, 물에서 나오신다, 성령이 내린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린다). 반면 요한복음에는 주님이 세례받으시는 장면이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발생할까요? 시점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현재 상황을 주목하지만, 요한복음은 주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나 이후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며 내뱉었던 고백에 집중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읽은 요한복음 29절부터 말씀은 요한이 이미 주님을 만났고, 세례를 베푼 이후 상황입니다. 29절과 30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주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그리고 나보다 앞서서 오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이미 주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31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주님과 첫 대면 했을 때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저분이 주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요한이 주님을 만나 어떤 일을 겪고 난 후, 이분이 주님이신 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29절에서 34절은 정확히 말해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날의 기억에 대한 요한의 회상이자 소회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찰하고자 하는 바는, 요한이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요한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입니다. 이제 우리 함께 말씀을 보며 요한이 주님을 처음 만났던 그 기억을 함께 살펴봅시다.
성령이 내리길 기다렸던 사람
요한은 사가랴라는 레위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일반적인 레위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사가랴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이 말은 사가랴의 아들인 요한 역시 어떤 결격 사유가 없다면 자연스럽게 제사장이 되어 성전을 섬기고 제사를 집례하는 일을 하게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장성한 요한은 제사장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를 성전이 아니라 광야로 몰아붙인 강력한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3절 중간 부분을 보십시오. 요한은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게 하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제사장되기를 포기하고 광야로 나가 세례 주는 자가 된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요한을 광야로 끌어당기신 것이지요. 그날로 요한은 광야로 나가 우리가 잘 알고 있듯 낙타 옷을 입고 메뚜기를 먹으며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물로 세례를 주라는 말씀과 함께 하나님은 이런 말씀도 그에게 남기셨습니다. 33절 말씀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은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사명은 광야로 나가, 말씀을 전하고,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궁극적으로 기다리고 또 기대했던 것은 누군가의 머리 위에 성령이 내려와 머무는 장면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어째서요?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자, 곧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부터 요한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기다림이 자리 잡습니다.
'내가 세례를 베풀 때 과연 누구의 머리 위에 성령이 내릴까?'
처음 요단강으로 나가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던 날로부터 몇 날 며칠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요한은 아마도 거의 매일 자기를 찾아 모여든 회중에게 말씀을 전하고, 다그치기도 하고, 또 세례를 베풀며 앞으로 다시는 죄짓지 말라 당부했겠지요. 하지만 요한을 사로잡고 있는 기다림은 따로 있었습니다. 성령이 머리 위로 내려앉을 그 어떤 사람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과연 누굴까? 누구의 머리 위에 성령이 내릴까? 오늘 내 앞에 줄 서 있는 저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일까? 저기 키가 크고 근사하게 생긴 사람이 혹시 성령을 받을 사람일까? 아니면 여기 학식 있고, 똑똑해 보이는 이 사람 머리 위에 성령이 내리지는 않을까? 요한은 자기 앞으로 세례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을 누구보다 유심히 살폈고, 세례를 주고 나면 으레 하늘을 올려다보며 혹 하늘에서 성령께서 내려오지 않을지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누구의 머리 위에도 성령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를 만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응어리진 마음속의 아픔을 간직한 많은 이들이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를 떠나 광야로 나왔습니다. 세례받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은 자기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요한도 정성껏 세례를 베풀고 의롭게 살라는 당부를 전하고 돌려보냈겠지요. 차례차례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윽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평범한 사내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바로 그때 어떠한 예고도 없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머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떤 전조 증상도 없었습니다. 하늘의 징조도 전혀 없었던 평범한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남자의 머리 위로 내린 것입니다. 특별할 것 없었던, 아니 오히려 다른 이들보다 몇 배는 더 초라한 행색의 여행자였을 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유대 땅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그런 흔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깜짝 놀랐습니다. 33절의 기록을 다시 잘 보십시오. 요한은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라고 솔직히 고백합니다. 요한은 놀라우면서도 당혹스럽고, 또 기쁘면서도 두려웠겠지요. 그토록 기다렸으나, 전혀 예기치 않았던 시간에 그리고 너무나 평범해 보였던 자기 앞에 선 이 사람 위로 성령이 머무는 모습을 보았으니 말입니다. 어안이 벙벙하던 바로 그때 요한은 오래 전 기억속에 있던 하나님의 음성 한 마디가 또렷하게 떠올랐습니다.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요한은 비로소 깨닫습니다. 이분이구나! 이분이 그리스도구나! 그 고백이 34절입니다.
34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이것이 요한이 주님을 만났던 첫날의 강렬한 기억의 기록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렇게 평범하다니! 메시아가 너와 나와 별로 다를 것 없이 비슷하게 생기셨다니! 그리스도가 세상에 나타나셨는데 천군 천사들의 호위도 없고, 빛나는 옷도 입지 않으시고, 구름을 타고 강림하지도 않으셨다니! 그저 군중들 사이를 헤치고 오셔서 너와 나의 곁에 이미 머물고 계셨다니!
그런데 바로 이것이 신비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자가 저 멀리 계시지 아니하시고, 이미 우리 곁에 우리와 같은 모습이 와 계셨단 사실이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리스도교의 신비라는 것이 어떤 면에서 보면 참 소박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떤 신비로운 지식을 깨닫는 거나, 초월적인 영역에 닿아야 한다거나, 특별한 계시를 직통으로 받야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두 눈 앞에 주님이 계시다니 말입니다.
고통의 얼굴 속에 계신 하나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하나님을 어디서 만날 수 있느냐는 물음에 '타자의 얼굴'이라고 답했습니다. 하나님의 현존하심은 이해 불가능한 영역에 숨어 계시지 않으시고, 타자의 얼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 얼굴에서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속에서, 비참한 슬픔으로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해야만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십니다. 그 얼굴이 우리를 향해 이 고통에 동참해 달라, 이 아픔을 외면치 말라고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뒤흔들기 때문입니다. (강영안, 타인의 얼굴: 레비나스의 철학, 문학과지성사, 229-234.)
세례 요한이 목격한 신비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세례받기 위해 줄에 서 있던 이름 모를 사람들, 각자의 슬픔과 죄책감을 짊어진 그 평범한 얼굴들 사이에 섞여 계셨습니다. 요한은 그들 속에서 우리와 닮은 평범한 얼굴을 지니신 주님에게서 세상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흔적'을 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한은 주님을 향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 말한 것입니다. 내 곁에 선 이들의 고통, 아픔, 상실, 실패를 외면치 않고 모두 내 안에 품어 하나님 앞으로 가는 분임을 요한은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또 주님을 보려면 어떻게, 어디를 보아야 하나요? 말씀이 우리에게 일러주는바, 세례 요한과 같이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비극으로 가득 찬 세계 안에 있는 고통의 얼굴들을 우리는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아야만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고통을 응시하는 일이 어떤 경우에도 쉽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지금 힘든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 잘 풀리지 않는 일과 갈수록 꼬여가는 관계 속에서 허덕입니다. 무기력과 패배감에 짓눌리다 보면 우리는 아무의 얼굴도 보고 싶어 하지 않게 됩니다. 내 삶만으로도 괴로운데 다른 이의 고통에 응답하라는 주문은 너무 가혹한 도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닙니다. 주님이 그 안에 계실지 모릅니다. 세례 요한도 자기 앞에 하루도 빠짐없이 꾸역꾸역 기어 나오는 독사의 자식들 속에 주님이 계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세계를 외면하면 그 안에 사는 사람들 또한 보기 싫어집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고립됩니다. 자기 세계 안에 갇힌 자들이 가득한 세상에 평화를 기대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고개를 들어, 내 앞에 선 사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세계를 똑바로 응시해야 합니다. 지금 세상은 엉망입니다. 그러나 파괴된 것이 아니라 지독한 질병 상태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건강해질 수 있음을, 회복의 가능성이 없지 않음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몫은 창조 세계를 원래의 모습으로 고쳐가는 것이지, 세상을 향해 냉소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황무지에서도 꽃을 발견하는 노력이고, 어둠 속에서도 별빛을 찾아내려는 애씀에 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힘을 내어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얼굴이 보내오는 고통의 신호에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가 착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그리스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앞에 있는 이의 아픔에 응답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세례 요한도 매일 밤 그려보았던 자기만의 메시아 상이 있었을 것입니다. 메시아는 이런 분이겠지, 그분은 이런 얼굴일 거야, 오시면 이런 일 저런 일을 하실 테야! 이런 기대가 있었겠지요 하지만, 자기 앞에 나타난 그 군중 속의 주님을 보고선 자기가 갖고 있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상들이 깨어졌습니다. 주님은 군림하는 메시아가 아니구나. 저렇게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함께 숨 쉬는 분이구나. 그렇기에 세상 모든 아픔을 아시고, 그 고통을 홀로 지시고 하나님께로 가시는 분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보려거든 우리의 세상에서 눈을 돌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내 눈앞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사람들의 아픔을 응시하십시오. 그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나와 함께 이 아픔에 동참하자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가 끝까지 너와 함께할 테니 나와 이 사람들과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본다는 것은 참 신비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면 그도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둘 셋이 함께 보면 시선의 힘은 더 강력해집니다. 여기 예배드리는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모두 다 함께 아픔의 얼굴을 바라보면 환대와 연대의 힘은 더 세집니다. 그러니 힘을 냅시다. 주현절은 주님이 세상에 나타나셨음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셨다는 것은 우리 앞에 찾아오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로 우리의 일상과 세계 앞으로 힘들고 지친 이들과 함께 주님이 걸어오셨습니다. 우리 모두 내 앞으로 찾아오신 주님과 그들을 봅시다. 그러면 주님도 우리를 보십니다. 이 아름다운 신비의 관계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우리의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어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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