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과 거룩한 산
오늘 우리가 함께 교독한 시편 15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서 깊은 성찰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주님의 장막" 그리고 "주님의 거룩한 산"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러고는 과연 누가 그 영광의 공간에 들어가 머물 수 있을지 깊이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시인은 곧 깨닫습니다. 주님의 장막과 거룩한 산, 곧 그 영광 안에 머무는 자란, 자기 삶을 깨끗하게 가꾸는 사람입니다. 정의를 실천하고,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입술을 함부로 놀려 남의 치부를 들추거나 모욕하지 않으며,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를 꾸짖고, 반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를 존경합니다. 한 번 맹세한 바가 있다면 설령 그 약속이 자신을 곤혹스럽게 할지라도 반드시 지켜내고 마는 사람입니다. 높은 이자를 노리고 돈을 빌려주지 않으며, 무죄한 사람을 해치려는 악한 목적으로 주고받는 뇌물을 단호히 거절하는 사람, 바로 이들이 주님의 장막에 거하며 거룩한 산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안에 머무는 사람들의 특징과 성품을 천천히 살피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두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을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주님의 거룩함에 참여하기 위해 세상을 등져야 한다거나, 홀로 외딴 방에서 갇혀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을 깨끗하고 정의로운 마음으로 대해야 하며, 그에게 진실만을 말해야 합니다. 이웃의 부족함을 트집 잡아 비난하거나 화를 내지 않는 것, 고리로 돈을 빌려주거나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은 결국 누군가와 관계 맺는 방식입니다.
즉, 타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주님의 장막과 거룩한 산에 머물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타자를 함부로 대하고 모욕하며 무고한 자를 해한다면, 그 누구도 주님의 장막에서 살 수 없으며 거룩한 산에 오를 수 없습니다.
시인은 홀로 거룩한 자가 아니라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의롭고 바른 관계를 맺는 자, 곧 내 앞에 있는 타자를 바르고 정직한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이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결국 타자를 향한 우리의 태도에서 판가름 납니다. 오늘 시편 말씀은 물론이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꾸준하게 가르쳐주시는 '정의'와 '공의'는 우리 몸을 두르고 감추는 외투가 아닙니다. 개인적인 황홀경이나 신비로운 느낌과도 거리가 멉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장막과 거룩한 산이 그저 나 홀로 거하며 평안을 누리는 개인적인 공간이겠습니까? 아니겠지요. 주님의 장막과 주님의 거룩한 산은 폐쇄적인 방이 아니라 '나'와 '너'가 함께 존재하는 공간입니다.
나와 너의 관계가 일어나는 공간, 그 사이에 정의와 공의가 세워지고 생명이 피어나는 공간이 바로 주님의 장막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비로소 '관계의 공간'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반드시 관계적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공간은 관계다
유대 종교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그의 책 <나와 너>를 통해 세계의 존재 방식에 대해 깊이 탐구했습니다. 부버는 '나'라는 존재가 세계 안에 홀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나 이외의 대상과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방식입니다.
먼저 나 외의 모든 대상을 '그것'으로 여기며 사는 세상이 있습니다. 사물을 비롯해 온갖 잡동사니는 물론, 동물과 자연, 심지어 사람까지도 '그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저 쓸모에 따라 가치가 매겨지고, 필요가 다하면 폐기 됩니다. '나'와 '그것' 사이에는 공간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온기도, 웃음도, 대화도, 어떠한 만남도 없습니다. 이런 세계는 냉대와 무정함이 가득할 뿐입니다.
반면, 내 앞에 있는 이를 '그것'이 아니라 '너'로 여기는 사람들의 세상이 있습니다. 내 앞에 선 존재가 그것이 아니라 '너'이기에 대화가 시작됩니다.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물론 '나-그것'의 세계보다 효율은 떨어집니다. 너의 말을 듣기 위해, 또 나를 보여주기 위해 기다리고 인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그만큼 벅찬 기쁨과 사랑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때 비로소 너와 나 사이에 공간이 생깁니다. 부버는 이 공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정신은 나'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너' 사이에 있다. 정신은 사람의 몸속을 맴도는 피와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숨쉬는 공기와 같은 것이다." (마르틴 부버, <나와 너>, 김천배 역, 대한기독교서회, 78).
부버가 말하는 정신을 저는 '인간다움'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나의 정신 곧 인간다움은 내 안에 고립되어 있지 않고,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합니다. 한나 아렌트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아렌트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공간이 있기에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전체주의라는 망령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공간을 삭제하고 강철같은 줄로 서로를 묶어 인간성을 파괴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나와 너 사이 인간다움의 공간이 사라진 세상이 얼마나 비참한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2>, 이진우, 박미애 역, 한길사, 268).
주님의 장막과 주님의 거룩한 산은 나와 너의 관계가 창조되는 공간입니다. 시편 15편 2절을 보십시오. 깨끗한 삶을 살고, 정의를 실천하며,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공간이 곧 주님의 장막입니다. 허물을 들추는 대신 실수를 감싸주고, 해를 끼치는 대신 복을 빌어주고, 모욕 대신 칭찬과 격려를 건네는 이들이 모인 곳이 거룩한 산입니다.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는 이들이 모여 만들어낸 이 관계의 자리가 바로 우리가 꿈꾸는 거룩한 공간입니다.
공간 없는 세상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 속 '너와 나의 공간'은 어제도 오늘도 계속해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자기 공간을 내어주기는커녕 누구도 내 공간 안에 들어오지 말라고 마음의 바리케이드를 치는 시대입니다.
지난 1월 29일이었지요. 법원은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주장하며 출근길 지하철에 올랐을 뿐인 이들에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버스와 지하철에 오른 휠체어 탄 이들을 '너'가 아닌 '불편한 그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내려진 판결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인간다움이 태동할 공간 자체가 사라진 것 같습니다. '나'는 비대해졌지만, '너'는 없는 시대입니다. 내 자아가 커지면 커질수록 나와 너 사이의 공간을 잠식하고 걸리적거리는 타자들을 바깥으로 밀어냅니다.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말씀으로 비추어 보자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주님의 장막도, 거룩한 산도 아닙니다. 너를 만나지 못해 주류 사회 바깥으로 내쳐진 사람들은 별수 없이 변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두 주간 나눴던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자 요단 강에 모여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고 마음을 새롭게 했습니다. 이제부터 의롭게 살자고 다짐한 사람들이 서로를 확인했습니다. 요단 강에 어디에도 없던 공간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대의 권력, 헤롯 안티파스는 새로운 공간의 탄생이 두려웠습니다. 무력으로 요한을 사로잡아 옥에 가두었고 이내 그를 참수하지요.
그렇게 세례 요한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광야를 힘차게 메웠던 그의 외침은 사라졌고, 회개의 세례는 중단되었습니다. 생동감 넘치던 광야가 다시금 침묵과 공허의 공간으로 되돌아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변방 갈릴리에서 다시금 새로운 소리가 시작됩니다. 그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따듯했고,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웠으며, 골목 구석구석을 훑으며, 죄인과 의인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에게 흘러 들어갔습니다. 누구의 무슨 소리입니까?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반응한 이들이 제자가 되었고, 사라졌던 '나와 너의 공간'이 다시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공간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공간을 탄생시키는 주님의 소리는 이러합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머지 말씀도 같은 흐름입니다.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 평화를 일구는 사람, 의를 위해 박해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모두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은 '복을 받을 것이다'가 아니라 '복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복'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라는 형용사입니다. 헬라어에서 형용사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문장은 '복이 있다'라는 현재형이기 때문에, 지금 마음이 가난하다면 당신은 현재 복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나머지 일곱가지 복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지금 슬프다면, 온유하다면, 평화를 만들어내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복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어디에서 울려 퍼졌는지 다시 한번 상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이라는 화려한 중심이 아니라 갈릴리라는 소외된 변방입니다. 부유하기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인 곳, 삶이 너무 힘겨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여유조차 없던 이들에게 주님은 가장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서 울고 의를 세우고 평화를 만드느라 지치고 낙심한 너희가 바로 오늘 복된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한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공간이 바로 지금 너희 사이에서 세워지고 있다.
시편 15편의 시인이 말한 주님의 장막과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무는 사람들과 오늘 주님의 위로를 받는 사람들은 참 많이 닮았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기에 자기의 작음과 한계를 아는 사람, 슬퍼할 줄 알기에 다른 이의 슬픔에 공감하고 함께 울어주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운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 평화를 일구는 사람, 의를 위해 피해를 감수하는 사람, 모두 주님의 장막과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물기에 충분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공간이 곧 주님의 장막이자 거룩한 산입니다. 갈릴리 변방의 어느 언덕 아래에 모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그 자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지금 바로 그곳에서 주님의 장막이 세워지고 거룩한 산이 솟아 오르고 있음을 우리 주님은 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청파교회 청년 여러분, 얼마나 힘드십니까? 세상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느라 마음과 정신이 얼마나 메말라갑니까? 내가 없어도 그만이라 여기는 조직에서 일하며, 그래도 웃어야지 별수 있느냐며 애써 매일같이 출근하는 여러분, 얼마나 마음이 아픕니까? 그래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양심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여러분, 또 활동가로 일하며 박봉에 미래 또한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이 일을 통해 누군가 살아갈 힘을 얻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고백하는 분들도 있으시지요. 다 그만둬버릴까? 눈물 삼키는 분들도 계시지요.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복이 있다. 너희가 서 있는 공간이 곧 나의 장막이다. 너희가 오르는 산이 곧 나의 거룩한 산이다. 주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힘을 냅시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주님의 장막으로, 우리의 공동체를 주님의 거룩한 산으로 만들어내는 일을 사명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는 마음을 청결히 하고 행동을 바르게 하며, 하나님을 깊이 경외해야 합니다. 거룩의 공간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통해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의와 공의, 생명과 평화는 관념의 언어나 거창한 구호가 아닙니다. 나와 너 사이에 인간다움을 채워갈 때 주님의 장막이 세워집니다. 그것이 곧 정의와 공의이며 생명과 평화를 지키는 일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비참한 자의 눈물을 닦아주며,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여러분이 주님의 장막을 떠받치는 든든한 기둥이 되십시오. 그럴 때 우리가 선 땅이 어디든, 누구와 있든, 어떤 상황에 부닥치든 상관 없이 바로 여기가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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