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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밤낮 사십 일을 금식하시니(마 4:1-11)

by 청파비둘기 2026. 2. 22.

사십 일을 시작하며
사순절 첫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사순절은 보통 부활 주일 직전의 고난 주간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매년 보내는 고난 주간의 풍경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예루살렘 입성에서 시작해 성전 정화, 가룟 유다의 배신, 주님의 불의한 재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세족식, 그리고 고난 주간의 절정인 십자가 수난이 이어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성금요일의 짙은 어둠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부활이라는 눈부신 광명을 만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사순절은 주일을 제외한 '40일간의 여정 전체'라는 점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40일의 순례를 모두 마친 뒤에야 비로소 열리는 마지막 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이 40일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다가올 부활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을 보내고, 무감각하게 내일을 맞는다면 40일 후에 맞이할 부활절은 그저 '연례행사'와 다를 바 없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한껏 누리고 우리의 삶과 신앙을 진정으로 갱신하기 위해서는, 이제 막 시작한 이 여정의 첫걸음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여정의 첫 번째 문을 막 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눈 앞에 펼쳐진 장소는 침묵의 땅, 광야입니다.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는 매년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째 주일에 언제나 주님의 광야 시험을 읽도록 권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고난에 동참하기 위한 첫 단추는 반드시 광야에서 끼워져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순절 첫째 주일, 우리는 광야 한가운데에서 가장 핍절한 상태로 시험당하고 계신 주님을 대면해야 합니다. 거기에서부터 진정한 40일의 여정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혼미한 상태에서 
먼저 오늘 본문 직전의 상황을 살펴봅시다. 광야에 이르기 전, 주님은 요단강 세례터에 계셨습니다. 주님은 세례 요한을 만나 세례를 받으셨지요. 세례 직후 주님께서 물 위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와 주님의 머리 위에 머물렀습니다. 동시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이 다정한 음성이 요단강 세례터를 가득 메웠습니다. 세례를 베푼 요한도, 주변의 군중도, 그리고 아들이신 예수님 자신에게도 벅찬 은총과 환희의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마태가 묘사하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입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에서 격변합니다. 따스했던 요단강가에서 을씨년스러운 광야 한복판으로 무대가 옮겨집니다. 주님은 광야로 가셨고, 그곳에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십니다. 놀랍게도 주님을 광야로 인도하신 분은 바로 '성령'입니다. 주님은 성령의 이끄심에 저항하거나 이유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성령에 붙들려 묵묵히 광야로 향하셨을 뿐입니다.
적막이 감도는 광야에 도착한 주님은 그때부터 40일간 금식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40일 금식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그분의 뜻을 깨닫기 위해 자신의 몸을 극한으로 몰아넣는 행위이며, 사실상 목숨을 건 투쟁에 가깝습니다. 분명한 목적이 없다면 불가능한 영적 도전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광야 금식에는 구체적인 이유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저 홀로 광야에 머무시며 묵묵히 굶주리셨습니다.


의미 없어 보이는 고통과 고독의 40일이 지났습니다. 체력은 바닥을 쳤고 모든 진이 빠져 움직일 수조차 없으셨을 것입니다. 정신 또한 무너지기 직전이었겠지요. 우리가 읽는 새번역 성경의 '시장하셨다'는 표현은 당시 예수님이 처한 처절한 상태를 담아내기에는 다소 완곡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 '페이나오(πεινάω)'는 단순한 배고픔이 아니라 '극심한 기근'과 같은 상태를 뜻합니다. 마태는 여기에 '밤낮 사십 일'을 병기함으로써 주님의 상태가 생존의 한계점에 다다랐음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초인이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저와 여러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셨습니다.

바로 이때 어떤 이가 주님 앞에 나타납니다. 마태는 그를 가리켜 "시험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기진하고 혼미한 상태에서 느닷없이 찾아와 돌들로 빵을 만들어 보라고 속삭이는 그를 보며 주님은 당신 앞에 선 자가 자신을 도와줄 천사인지, 아니면 무너뜨릴 악마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우셨을지 모릅니다.


우리를 흔드는 시험
침묵의 광야, 쓰러진 주님, 그리고 그 주님을 흔들고 있는 악마, 이 불가해한 상황이 우리가 사순절의 여정에서 처음 목격한 장면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것이 과연 우리에게 그리 낯선 풍경입니까? 아침에 눈을 떠 일상의 문을 열면 늘 마주하게 되는 우리 세계의 익숙한 모습 아닙니까? 우리의 일상은 대체로 광야와 닮아 있습니다. 취업과 시험을 준비하는 분들, 이력서를 넣느라 숨 가쁜 분들, 인간관계가 틀어져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분들. 저마다 광야 같은 삶을 버텨내고 있습니다. 어느 분이 그러더군요. 이 시대 청년은 '내몰린 사람들'이라고요.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작은 시험에도 곧잘 흔들립니다. 모르겠습니다. 어른들이 보면 왜 저런 것에 흔들리는가 말씀하실지도요. 하지만 청춘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당면한 고단한 일상에는 기성세대가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오늘만의 무게'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미래는 불안하고 현실은 암담합니다.  적당히 상황을 인정하고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 현명한 생존 전략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악마가 던지는 시험을 보십시오. 사방의 돌을 빵으로 만들라고 합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돌이 빵이 된다고 해서 누군가 피해를 보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허기진 주님을 살리고, 굶주린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선한 일'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시험이나, 딱 한 번만 절하라는 유혹도 마찬가지입니다. 별것 아닌 것 같습니다. 윤리적으로 치명적인 문제도 없어 보입니다. 이 시험에 응한다면 무엇보다 메시아이신 주님의 능력이 입증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시험들도 대체로 이러합니다. 모호하고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명백하고 사악한 유혹이라면 물리치기 더 쉬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험은 적당히 달콤하고 꽤나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광야와 같은 힘겨운 상황 중에 있다면, 또 주님과 같이 궁지에 몰려있다면, 악마가 제시하는 별것 아닌 제안에 응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적절히 응답하고 서둘러 시험대에서 내려오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악마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 좁은 틈입니다. 네가 처한 상황이 광야니까 이 정도는 괜찮다는 말이 유혹이나 시험이라기보다는 위로처럼 들립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주도권을 내어줍니다.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노련한 악마 스크루테이프는 조카 악마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인간을 무너뜨리기 위해 굳이 거창한 유혹을 설계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죠. 그저 '상황'에만 집중하게 만들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배가 고프면 '하나님의 정의'보다 '빵의 효율성'을 먼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악마는 그 틈을 파고들어 속삭입니다. '지금 네 상황이 이런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인간은 스스로 분별력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사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결핍과 상황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러고는 '어쩔수가 없었다'는 말 뒤로 슬쩍 회피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의 말씀도 바로 이 지점을 지적합니다. 태초의 인간이 뱀의 유혹에 넘어간 이유는 그것이 엄청난 악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눈앞에 보이는 열매의 '먹음직함', 즉 지금 나의 욕구를 채워줄 '상황'을 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통제권을 하나님이 아닌 상황에 내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죄성의 깊은 뿌리입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
광야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 게다가 피곤하고 지친 몸과 마음의 상태에 놓인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조금씩 악마의 제안에 응합니다. 돌 하나를 빵 하나로 바꾸는 일은 티가 나지 않습니다. 슬쩍 고개를 숙이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처음이 가장 어려울 뿐, 두 번째부터는 쉽습니다.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뜻보다 늘 '빵'을 먼저 선택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은 어떠셨을까요? 그분은 달랐습니다. 

악마는 이미 승리를 확신한 듯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3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주님의 광야 시험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악마의 계교를 당당하고 의연하게 물리치셨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 말씀이 분명하게 증거하는바, 주님은 악마가 당도하기 전 이미 사십일을 금식하신 상태였습니다. 이를 마음에 둔 상태에서 주님의 대답을 보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본문 4절입니다. 

4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

오늘은 주님의 말씀에 담긴 단어와 문장의 뜻 보다 그 소리와 음색에 주목해 봅시다. 사십 일을 굶주린 이의 음성이 어떠했겠습니까? 악마가 꼬리를 내리고 도망칠 수 밖에 없는 쩌렁쩌렁 울리는 하늘의 천둥소리 같았을까요? 아니었겠지요. 그것은 들릴 듯 말 듯 한 미세한 음성, 어쩌면 거의 들리지 않는 가냘픈 신음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온 몸의 감각을 곤두세워야 겨우 들을 수 있는, 기진맥진한 예수님이 겨우 내뱉으신 한마디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냘픈 소리가 악마를 당혹케 합니다. 부랴부랴 주님을 끌고 성전으로 올라가서 다시 묻습니다. 이번에는 시편 말씀까지 인용하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한번 낮은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패배를 직감한 악마는 그저 나에게 절 한 번만 하라는 가장 쉬운 제안을 제시합니다. 신적인 능력도 필요없고, 천사들을 소환할 필요도 없는 간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역시 거절하십니다. 마찬가지로 힘에 겨운 음성으로 말씀하시길,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답하십니다. 그러자 비로소 악마는 물러가고 비로소 천사들이 와서 주님께 시중을 듭니다. 

주님은 유혹을 결코 쉽게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힘겹게 몰아내셨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쓰러지지 않으셨던 이유는 단지 주님이 신적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 아닙니다. 입을 열기조차 버거운 상태에서 주님이 붙드셨던 한 가지는 광야에 당도하기 직전 요단강 세례터에서 들으셨던 아버지의 음성,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3:17)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극도의 결핍 속에서도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누구의 사랑을 받는 아들인지 주님은 끝까지 붙드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았기에, 광야를 쉽게 벗어날 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악마의 제안 대신 하나님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 앞에 놓인 모든 선택의 순간마다 자기 존재성을 작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이 말하는 승리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품으신 길, 곧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실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광야에서 들어야 할 소리는 악마의 달콤한 제안이 아닙니다. 비록 들리지 않을 정도로 힘없고 작지만 또렷하고 분명한 주님의 음성입니다. 그 미세한 소리가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는 그 작디작은 음성을 붙들고 이 40일의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수난은 고난주간에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포 첫날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으며, 하나님 나라는 골고다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의 선포와 함께 처음부터 완성되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디트리히 본회퍼 설교집, 김순현 역, 복있는 사람, 2023, 344) 우리가 주님의 이 작은 음성에 귀 기울일 때, 우리가 선 땅은 광야가 아니라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주님의 사십일은 끝이 났습니다. 이제 우리의 사십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 내내, 아니 우리의 삶 대부분은 높은 확률로 광야와 다름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모호한 유혹에 직면할 것이고,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선택을 제안받을 것입니다. 고민이 되고 힘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임을 말입니다. 가장 연약하지만 가장 단단한 주님의 음성이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소리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