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날
1857년 3월 8일, 미국 뉴욕의 섬유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가 있었습니다. 결과는 가혹한 탄압이었습니다. 그리고 50여년 뒤, 1908년 3월 8일, 미국 뉴욕 루거스 광장에 1만 5,000여 명의 여인들이 모였습니다. 50년 전 그날을 기억하기 위함이었지요.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좁고 환기가 되지 않는 의류 공장 등에서 12시간 이상 노동했고,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광장으로 뛰어나가 우리에게 빵, 곧 생존을 그리고 장미 곧 존엄과 참정권을 달라 말했습니다. 3년 뒤 공장 안에 불이 났고, 공장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게 문을 걸어둔 탓에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여성 참정권 운동의 거대한 시작이 됩니다.
사순절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절기이지요. 주님의 아픔을 묵상하면 자연스럽게 타인의 아픔에도 열리게 됩니다. 특히 오늘은 여성을 기억해야 하는 날입니다. 지난 2월 28일이었습니다. 이란의 한 여자 초등학교에 포탄이 떨어져 175명의 어린 소녀들과 교직원이 죽임당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여전히 가장 약한 여성과 어린아이들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리도 없이 죽어간 소녀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고통을 묵상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입니다.
공교롭게도 오늘 성서일과는 우리로 하여금 침묵을 강요당한 한 여성의 이야기를 읽도록했습니다. 한낮의 길을 걷고 있었으나, 평생 죄의식지고 살아야 했던 이 여성을 우리는 깊게 묵상하며, 오늘 우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로 돌아가시던 중,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마을을 지나실 때였습니다. 시간은 이미 정오 무렵이었습니다. 한낮의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 이르러 무척이나 더웠던 시간입니다. 주님 일행은 수가 마을의 유명한 '야곱의 우물'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로 들어갔고, 피로하셨던 주님은 홀로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
주님이 쉬고 계시는데, 어느 여인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나오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물을 마실 도구가 없으셨던 주님은 이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청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흥미로운 대비를 발견합니다. 밤의 순례자 니고데모는 스스로 주님을 찾아와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반면 한낮의 우물가에서는 주님께서 먼저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고, 말씀도 먼저 건네십니다. 주님이 이 여인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결핍과 진리를 향한 갈망을 미리 보셨기 때문일까요? 알 수 없지만, 언제나 그렇듯 주님의 말 거심은 그 말을 듣는 이의 영혼을 뒤흔듭니다.
이후 주님과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와 하나님의 영에 관한 깊은 대화를 나눕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쩔쩔맸던 니고데모와 달리, 이 여인은 거침없이 반문하고 더 명확한 답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니고데모에게 한밤의 순례자라는 별명을 붙였듯, 이 여인에게도 별명 하나를 붙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한낮의 구도자라고요.
사마리아 여인의 삶
대화는 시작부터 긴장감이 감돕니다. 물을 달라는 주님의 부탁에,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요 4:9a)라고 답합니다. 여인의 반응에서 날 선 적의가 느껴집니다. 역사적으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사이의 적대의 골이 매우 깊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도 여인의 대답 아래에 당시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을 상종하지 않았었다는 말을 추가로 기록해 두었을 정도입니다. 그렇기에 두 지역 사람이 말을 섞는 것 자체가 사회적 금기였지요. 주님이 말을 거신 행위는 금기의 담벼락을 무너뜨리는 파격이었습니다.
적대의 담벼락이 무너지자 대화는 깊어집니다. 주님은 여기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물에서 나는 물을 마시면 언젠가는 다시 목마르게 되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여인은 반신반의합니다. 주님은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나에게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있으며,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여인이 속에 꾹꾹 눌러 두었던 속마음이 터져나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15 그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
이 한마디에 그녀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그녀는 정오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를 홀로 걸어 나와 물을 길어 올려서 돌아가야 했습니다. 사막 기후의 유대 지방에서 가장 더운 시간에 노동하는 일은 좀처럼 찾기 어렵습니다. 사막의 정오라는 시간은 갈증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 물을 길으러 나오는 이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 여인은 지금 시간 외에는 바깥으로 나올 수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녀가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여인이며, 타는 듯한 내면의 갈증을 견디며 살아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가혹한 삶을 살아온 이 여인을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녀의 아픈 곳을 짚으십니다. 그녀에겐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남편 다섯이란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방탕함'입니다. 이 여인에게 어떤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 자기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 치웠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루살렘만큼이나 종교적으로 엄격했던 사마리아의 율법에 따라 그녀는 일찌감치 큰 벌을 받거나 죽임을 당했을 수 있습니다.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이혼을 결정할 권리는 남편에게만 있었습니다. 이 시대 여인들은 남편의 소유물과 다름없었습니다. 즉, 이 여인은 남편으로부터 여러 차례 버림받았거나 사별로 인해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존재였습니다.
그러니 정오, 태양이 가장 밝게 빛나며 동시에 뜨거운 열을 내뿜던 그 시각에 물동이를 지고 우물가로 나오는 이 여인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하루 중 가장 밝은 정오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심령은 가장 어두운 상태였습니다. 모든 것이 환히 보이는 시간이었지만,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한낮임에도 길을 잃어버린 구도자였습니다.
한낮에 길을 잃은 자들
우리는 한낮에도 길을 잃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길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너무 밝기 때문에 길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남들처럼 출근하고, 학교에 가고, 모임에 참석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좋아졌는데 뭐가 그리 힘드냐"라는 핀잔을 들을까 봐 우리는 스스로 침묵을 선택합니다. 속에는 시커먼 구름이 가득한데, 겉으로는 밝은 척 웃어야 하는 역설. 이것이 현대 청년들이 겪는 '한낮의 슬픔'입니다.
세상은 흠 있는 이들을 침묵시키고 바깥으로 내보내며, 그것을 '밝은 세상'이라 부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일 때가 있습니다. 지난겨울 엠티 때 우리는 희곡집 <청년부에 미친 혜인이>를 낭독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당연히 침묵 당해야 할 이야기가 바깥으로 쏟아져 나왔을 때 당황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재밌으면서도 씁쓸한 뒷맛을 남겼습니다. 현실 교회에선 그와 같은 일이 잘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밝은 조명으로 치장한 화사한 예배당 안에서조차 길을 잃어버린다면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는 무거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이제 여인과 주님은 예배에 대한 신학적 문답을 이어갑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0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여인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배의 장소를 화두로 올립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남쪽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말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말은 갑작스러워 보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질문을 천천히 살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여인의 아픔이 사무치게 다가옵니다. 여러분, 이 여인은 첫 번째 결혼이 실패로 끝난 시점부터 침묵을 강요당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높은 확률로 타의에 의해 남편이 바뀌었겠지요.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는 말씀은 그녀가 정상적인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 받고 있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그 더운 시간에 홀로 노동하는 모습을 미루어 볼 때 하인에 준하는 처지라고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당연하게도 세상은 그녀를 곁눈으로 살피며 수근거렸고, 여인은 그 냉소의 눈총을 피해 한낮에 물을 길러 나오는 심산스런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이 공적 예배의 장소에 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안식일마다 사람들로 붐비는 그리심 산에 이 여인이 오를 수 있었을까요? 설령 하나님을 뵙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그리심 산 성전으로 올라간다 할지라도 그 밝은 성전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 틈 속에서 예배드릴 수 있었을까요?
그렇기에 이 여인의 질문은 어떤 예배 장소가 더 옳은 곳이냐는 신학적 판단을 요구하는 물음이 아닙니다. "나 같은 사람도 예배드릴 수 있는 곳이 과연 있기는 합니까?"라는 탄원이었습니다. 이미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찍힌 나는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릴 수 없으니, 예루살렘으로 가면 예배드릴 수 있느냐는 절규가 담겨있습니다. 주님은 이 절규에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본문 23절과 24절입니다.
23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24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예배자는 특정 장소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영과 진리로 아버지를 간절히 찾는 자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여인을 짓누르던 '나는 자격 없는 부정한 자'라는 어두운 자의식이 깨져버립니다. 내 안에 아버지를 향한 진실한 마음이 있다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이 해방감 속에서 여인은 비로소 자기 눈앞의 분이 메시아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게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다."
가라, 자유로운 예배자여
주님의 마지막 말씀이 이 여인을 완전히 해방합니다. 한낮에 길을 잃었던 구도자가 주님을 만남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았습니다. 더는 사람들의 시선과 판단과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예배 드리기 위해 그리심 산을 갈 필요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을 갈 필요 또한 없습니다. 영과 진리로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마리아 여인은 한낮에 길을 잃어버린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그녀는 자기가 해야할 일이 무엇이고,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 명확히 깨달은 스스로 길을 찾는 자가 됩니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상징이 물동이를 버리고 동네로 달려가는 장면입니다. 여성 신학자들은 이 장면을 여성을 억압하던 굴레를 스스로 던져버리고 주체적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장면으로 읽습니다. 옳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사람들의 낯을 피하며 살던 과거를 뒤로하고,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겁니다. 29절입니다.
29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한낮의 슬픔을 머금고 침묵하던 여인이 이제 사마리아 최초의 복음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밝은 정오의 빛 아래에 있으면서도 어둠 속에 있던 이 한낮의 구도자 사마리아 여인은 이제 어디서든 하나님을 찾는 예배자이자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낮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꾼 이 모든 사건의 최초는 금기를 깨고 다가가신 주님의 말 거심에서 비롯되었음을 말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영과 진리로 아버지를 찾는다면, 네가 어디에 서 있든, 어느 시간 위에 서 있든, 또 네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너는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너의 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밝디 밝은 오늘의 세상에서 우리는 쉽게 길을 잃습니다. 세상이 너무 밝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상처는 숨겨야 하고, 아픔은 감춰야 합니다. 약점을 드러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침묵을 강요받고 스스로 입을 다물게 됩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드리는 예배에서조차 말이지요.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더 나은 예배가 아니라, 내가 주님 앞에 서 있다는 감각입니다.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한낮의 슬픔을 기쁨으로 만드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사순절 보내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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