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앞에 선 사람들
마태복음 4장 13절은 예수님께서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다고 전합니다. 주님은 가버나움을 당신의 거처로 삼으시고 갈릴리 일대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부터 선포되기 시작한 주님의 말씀이 온 유대로 우렁우렁 퍼져나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에 이끌려 주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은 그때 주님께 나온 사람들이 어떤 이들인지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24절입니다.
24 예수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으로 앓는 모든 환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과 간질병 환자들과 중풍병 환자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주님의 소리에 응답하여 모인 사람들은 '갖가지 질병과 고통으로 앓는 환자들' '귀신 들린 사람들' '뇌전증 환자들' '중풍병 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누구입니까?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유대의 변방, 그리고 그 변방에서도 가장 끄트머리에 겨우 매달려 살아가던 이들입니다. 주님께서 산 아래에 모인 이들을 바라보며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의에 주린 사람, 박해받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는 단지 은유적인 수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실존적 상태를 꿰뚫는 매우 현실적인 진단이었습니다. 주님 앞에 선 이들은 정말로 가난했고, 슬픔은 일상이었으며, 의에 주리고, 정의와 평화에 애가 타듯 목이 마른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가난과 슬픔만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 안에 있는 온유함과, 자비함 그리고 깨끗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또 평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수고를 아셨고, 의를 위하여 박해받기를 마다하지 않는 용기있는 이들임을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산 아래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바로 지금 당신들이 복 있는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나의 이름 곧 예수의 이름으로 모욕받고 박해받는 여러분들에게 복이 있으니 낙심치 말라고 위로하십니다. 나아가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세요. 여러분이 받을 보상이 하늘에서 크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새한글). 힘겨운 사람들의 숨죽인 울음소리만 멤돌던 곳에서 점차 기쁨 넘치는 웃음소리로 풍성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곳은 주님의 장막이요, 주님의 거룩한 산이라는 새로운 은총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존재적 선언
사람들의 마음에는 어떤 벅찬 감동이 차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말, 그리고 하나님 나라 바로 우리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영원히 녹지 않을 것 같았던 마음의 빙산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하늘의 상이 내려온다고 약속하시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바로 이때, 희망의 분위기를 일변하게 만드는 예상 밖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주님은 이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 문장을 잘 살펴야 합니다. 주님의 선언은 '소금이나 빛처럼 살아라'라는 권면의 말씀이 아닙니다. 음식의 맛을 내거나 부패를 막는 역할에 관한 당부가 아니라, '너희는 소금이라는 존재다' '빛이라는 존재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역할론이 아니라 존재론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산 아래 모인 이들을 향해 '존재적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고대 세계에서 소금은 '하얀 황금'으로 불릴 정도로 귀했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소금을 월급으로 받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등불이 상징하는 빛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전기가 없던 시대에 밤의 어둠은 절대적이었고, 인공적인 빛을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일상이 된 소금과 빛이지만, 당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손에 넣기에는 너무나 값진 자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난과 슬픔, 박해 받음을 언급하실 때에는 깊이 공감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럼에도 너희에게 복이 있다는 말씀에는 큰 위로를 받았겠지요. 그러나 자신들을 값지고 귀한 소금과 빛으로 비유하시자 그 말씀이 너무나 낯설고 어떤 면에서는 불쾌감을 느끼며 이렇게 반문했을지 모릅니다.
아니, 주님! 지금 우리 형편을 이렇게 보시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십니까!?
지금 주님 앞에 모인 사람들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입니까? 모두 사회 바깥으로 내몰린 병자들과 빈민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앞에 두고 너희는 소금이고 빛이라고 말씀하시다니요. 주님의 말씀과 그들의 비참한 실존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멀게 느껴지기에 충분합니다.
산 위의 소리와 산 아래 시선의 충돌
주님께서 사셨던 1세기의 빈민들과 병자들의 삶은 참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가난은 단단한 굴레였고 질병은 낙인에 가까웠습니다. 우리는 복음서 곳곳에나오는 그 여러 아픈 이들의 삶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았던 아이,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통받았던 여인, 굶주려 구걸할 수 밖에 없었던 이, 집이 없어 떠도는 이, 귀신에 들려 마을 바깥으로 추방되어 사슬에 묶여 지냈던 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들의 존재는 간단하게 규정됩니다. 가난함, 질병 걸림, 쫓겨남, 그리고 죄인이라는 낙인뿐이었습니다. <죄와 벌>에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신랄하게 말하는 바가 있지요.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극빈은 죄가 된다는 말 말입니다.
주님 곁에 모여든 이들은 한평생 자기 존재의 이유를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왜요? 그 누구도 당신의 삶에 의미가 있고, 당신이라는 존재는 가볍지 않다고 말해주는 이를 만나 본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의미는커녕 그저 너는 병자, 너는 가난한 사람, 너는 죄인 그 외에 다른 의미는 없다는 냉대의 시선만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마치 울분을 토해내듯 이렇게 외쳤는지 모릅니다.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으니까 그저 가난한 자일 뿐입니다, 나는 병을 갖고 태어났으니 병자일 뿐이며, 죄인의 자식이니 나 역시 그저 죄인일 뿐 다른 의미 따위는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겠습니까? 주님, 그저 복이나 더 빌어 주십시오.'
산 위에서 내려오는 "너희는 소금이고 빛이다! 너희 삶은 의미가 있다"는 선언과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 의미 없는 보잘 것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라는 응어리진 외침이 팽팽하게 충돌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긴장과 갈등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청년들의 일상과 닮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예배를 통해 위로를 얻지만,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마주하는 비루한 현실은 우리를 초라하게 만듭니다.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분쟁 지역의 평화를 기도하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멈추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만, 당장 오늘 나에게 닥친 현실적인 문제들 앞에 버둥거리는 나 자신을 보노라면, 한없이 초라함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나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주님은 오늘도 나에게 의미가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도대체 그 의미는 무엇인가? 의미를 잃어버리면 존재의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 인간일진데, 내가 없지 않고 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의미가 날 존재하게 하는가? 신앙적 아노미가 우리를 뒤덮을 때 우리는 마치 '맛을 잃어 버린 소금'처럼 느끼게 됨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지체 없이 말씀하십니다. 본문 17절입니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이어지는 18절에서도 주님은 내가 진심으로 말하는데, 세상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담긴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단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완성이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과 소망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들이 누구 하나 쓰러지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의 고귀한 딸과 아들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어둠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요 진정한 성취입니다.
의미 없음에서 의미 있음으로
주님은 존재의 의미를 지녀본 적 없는 이들, 아니 타인들에 의해 그 의미를 박탈당한 여기 모인 이들에게 어째서 당신이 율법의 완성을 위해 오셨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율법의 성취와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들과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길래 주님은 이 알 수 없는 말씀을 전하고 계신 것일까요? 사도 바울이 이 비밀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고린도전서 2장 8절 말씀입니다.
고전 2:8 이 세상 통치자들 가운데는, 이 지혜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율법의 완성은 세상 그 어떤 지혜나 권세자들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주님께서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왔다는 말씀을 의미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하신 이유가 드러납니다. 주님은 스스로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내놓으심으로써, 의미를 가져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스스로 '의미'가 되어주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산 아래 모인 이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위해 죽을 테니, 너희는 이제 의미 없지 않고 의미 있는 사람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율법의 완성을 위해 오셨다는 주님의 외침 속에 담긴 이 깊은 사랑의 고백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단 한 번도 너의 삶에 의미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내가 죽음으로 너희에게 의미를 주겠다고 주님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에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의미가 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율법을 완성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완전히 비움으로 삶의 의미를 단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이들에게 의미가 되어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입니다. 결국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의미 '없음'이 의미 '있음'으로 바뀌게 된 이유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에서 제외되는 이가 없습니다.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그 십자가가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확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의미의 심연에서 방황할 때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내가 여기에 달려 있으니 너의 삶을 어떤 경우에도 의미없지 않다고 우리를 위해 오늘도 애통해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는 오늘도 내가 그리스도인 청년으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하루하루 씨름합니다. 답답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음이 곧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신앙과 믿음은 세련되고 화려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따라 걷는 길이 어딜 봐서 지혜롭고 똑똑한 길이겠습니까. 신앙은 본래 어리석습니다.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우리를 살립니다.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 속 깊은 곳에서 의미가 샘 솟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매일같이 의미를 앗아가는 세상 속을 살고있지만, 우리 안에는 지워질 수 없는 의미가 살아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의미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하찮지 않습니다. 우리는 빛과 소금입니다. 존재만으로 세상을 본래 내야 할 맛을 내게 만들고, 어둠을 밝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있는 의미는 주님의 죽음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우리 존재의 의미는 가볍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랑이 큽니다. 우리는 작지만, 우리가 받은 의미는 큽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을 따라 율법의 완성으로 나아갑시다. 주님이 우리 존재를 지키셨듯, 우리도 서로의 존재 의미를 지켜주는 '사랑의 의'를 실천합시다. 타인을 정죄하며 내 거룩함을 증명하는 율법학자나 바리새인 같은 이들이 아니라, 타인의 '의미 없음'을 '의미 있음'으로 바꾸어 주는 삶을 삽시다. 하나님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경건의 금식은 부당한 취급 당하는 이를 돕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 받는 사람을 놓아주는 것이라 말한 이사야의 예언을 마음에 새깁시다. 이사야의 외침은 결국 누군가에게 너는 의미 없지 않고 의미 있는 사람이라 말해주는 일입니다. 청년 여러분, 우리는 의미 있습니다. 내 옆에 사람들도 의미 있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최종적으로 완성하고 확정하신 주님이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너는 소금이다. 너는 빛이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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