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불론과 납달리
"스불론"과 "납달리"는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서쪽과 북동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비옥한 산지와 골짜기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땅입니다. 목가적인 표현처럼 들리는 "요단 강 건너편"과 "바다로 가는 길목"은 갈릴리 호수와 지중해 사이에 위치한 넓은 땅으로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의 경계에 있는 지역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불론, 납달리, 요단 강 건너편, 그리고 바다로 가는 길목은 모두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뒤이어 나오는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는 그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이 표현은 앞서 언급한 땅들을 총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언뜻 보면 별 뜻 없어 보이는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라는 말을 깊게 들여다보면 두 가지 멸시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갈릴리'라는 표현을 봅시다. 표면적으로 갈릴리는 그저 갈릴리 호수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일 뿐입니다. 그러나 심층적으로 갈릴리는 시골 변방, 가난한 지역,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 문화적 수준이 낮은 지방이라는 비하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지요. 요한복음 1장 46절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자기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자, 나다나엘의 입에서 즉각 나온 말이 무엇입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나사렛은 갈릴리에 속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갈릴리를 어떻게 여기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방 사람들'이란 말은 어떨까요. 이 또한 표면적으로는 유대인을 제외한 이방 혈통을 타고난 사람을 가리키지만, 심층적으로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 즉 '이교도'라는 차별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여기에는 역사적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지역들은 이방 나라들과의 접경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접경이라면, 그 경계 땅에서 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전쟁입니다. 이방 민족이 침입해 들어오면 가장 먼저 만나는 장소, 즉 가장 살벌하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첫 번째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지역들은 전투와 전쟁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사사 시대를 떠올려 봅시다. 이스라엘이 아직 왕국을 구축하기 전, 스불론과 납달리를 접하고 있었던 이방 민족은 당대의 패권국이었던 페니키아(두로와 시돈)였는데, 이스라엘에 매우 적대적이고 무서운 국가였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기원전 722년경에 일어난 앗시리아의 북이스라엘 침공이었습니다. 강력한 제국 앗시리아는 스불론과 납달리 땅을 통해 진격해 들어왔고, 북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이방인들을 이주시켰지요. 자연스럽게 이방의 문화와 각종 우상들이 바다로 가는 길목을 통해 요단 강 건너편과 스불론, 납달리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본디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의 거주지였던 땅들이 이제 이교도들이 득실거리고 부정한 것이 넘치는 이방 사람들의 거주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변방을 가리키는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라는 별칭은 곧 '멸시받는 변방'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중심의 시각
멸시받는 변방이 있다면, 그 변방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존재합니다. 바로 '중심의 시선'이지요. 유대의 중심은 어디겠습니까? 남쪽의 예루살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정통성이 뿌리내린 도시, 위대한 조상 다윗의 성이 자리 잡은 도시, 무엇보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스불론과 납달리가 멸시받는 변방이라면, 예루살렘은 존중과 선망이 가득한 중심지였습니다.
변방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변방과 중심은 상호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가 멸시와 천대의 시선을 받는 주변부였다면, 그 시선을 쏘는 중심이자 출발점이 있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이 그 출발이고 중심이었습니다. 지극히 중심적 시각으로 무장한 이들은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주변과 주변인들을 끊임없이 변방으로 몰아냅니다. 그럴수록 자기중심성이 더욱 견고하게 확보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중심의 사람들은 스불론과 납달리를 변방 취급하고 요단 강 건너편을 무시함으로, 자기들이 저들보다 정의롭고 바르며 높은 문화적 수준을 갖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자화'입니다. "너희는 변방이고 우리는 중심이다"라는 구별 짓기를 통해, '다름'을 '열등함'으로 만드는 작업이 바로 타자화입니다. 타자화가 확보되면 그 다음은 '소수화'가 진행됩니다. "너희들의 영향은 미미하다. 없어도 그만인 존재다. 너희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중심은 변방을 이렇게 여깁니다. 이것이 소수화입니다. 소수화까지 진행되고 나면 마지막 단계는 '원격화(遠隔化)'입니다. 이제 변방과 중심은 완전히 끊어져 닿을 수 없게 됩니다. 변방은 중심에 다가갈 수 없고, 중심은 변방에 갈 필요가 없게 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중심은 갈릴리라는 변방을 이렇게 타자화하고 소수화하고 원격화했습니다.
타자를 변방으로 밀어내는 이유
어째서일까요? 변방이 있어야 내가 중심에 있음이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위협이 가득하고 이교도들이 득실거리는 저 바깥 외부가 있어야, 내가 있는 중심이 더 빛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종교 지도자들이, 율법의 수호자라 자처하던 바리새인들이, 그리고 유대 민족의 정통성을 주장하던 헤롯의 왕족들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를 멸시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족하고 만족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세상에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 세상의 풍조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세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타자화, 소수화, 그리고 원격화는 언젠가부터 우리 시대의 성공 공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모두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 되는 예루살렘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 경제적으로 성공해 존경받는 일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그러나 자기 주변을 타자화하고 소수화하고 원격화하여 멸시받는 변방으로 만들고, 타자를 밀어냄으로써 자신을 예루살렘 성벽 안에 가두는 것이 문제입니다.
무서운 사실은 인류가 자행한 모든 종류의 학살이 이 공식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츠는 물론이고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최근 미얀마 사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다른 종족을 타자화하고, 소수화하고, 원격화하여 '있지만 없는 존재'로 만듭니다. 바깥 변방에 앉아 있는 이들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법의 보호를 요청할 권리도 없다고 여깁니다. 아감벤과 같은 철학자들은 법 바깥으로 내몰려 법의 보호는커녕 살해를 당해도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는, 피해자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을 가리켜 ’호모 사케르’라 불렀습니다. 중심의 사람들은 변방의 사람들을 멸시하며 그들을 호모 사케르로 만듭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중심의 시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변방에도 자기와 같은 사람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아니, 변방에는 사람다운 사람 자체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변방에도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변방에 있는 이들을 가리켜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 그리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이라 말합니다. 바깥에도 사람이 있습니다. 중심의 사람들이 아무리 이들을 타자화하고 소수화하고 원격화하여도, 그 어둠 속에서 힘겹게 숨 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변방으로
중심의 사람들이 모르는 척 할 때, 시선조차 두기를 거부할 때, 단 한 분, 우리 주님은 변방 어두운 곳, 그늘진 죽음의 땅에 사람이 숨 쉬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변방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복음을 듣도록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의 손에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시자 주님은 당신의 발걸음을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과 바다로 가는 길목, 곧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인 변방으로 옮기십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첫 번째 외침이 울려 퍼집니다. 17절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주님의 육성으로 선포된 첫 번째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멸시받는 변방의 사람들이라는 점은 중요합니다. 전쟁의 소문이 가장 먼저 들렸던 곳에서 복음이라는 복된 소식이 가장 먼저 들렸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언제나 적의 군마가 달려오는 소리, 칼과 창이 부딛치는 날카로운 파열음, 피난을 가기 위해 허겁지겁 짐을 싸는 소리, 아이들의 비명과 어른들의 탄식뿐이었습니다. 기쁘고 복된 소식은 모조리 중심에서만 울려 퍼지고 변방에까지 들린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대전환의 소리를 변방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주님은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서 9장 2절,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는 말씀을 이렇게 실천하셨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가장 먼저 들은 변방의 멸시받던 백성들 위로 빛이 비칩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그림자는 옅어집니다.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던 우리 땅에 하나님 나라가 가장 먼저 임한다니! 이제 그들의 땅은 변방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최근 성찬 후 기도 찬양으로 부르는 곡의 가사를 기억하시지요. "고통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가사입니다. 주님의 눈에는 중심에서 원격화되어 떨어져 나간 그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중심입니다. 주님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곳으로 달려가셔서 가장 먼저 "너희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넓히는 사람들
멸시받던 땅에서 복음이 울려 퍼지자, 반응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들을 부르시지요.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에게 하셨던 유명한 말씀,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는 주님의 부름이 여기에서 등장합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람을 낚는다'는 말의 헬라어 동사 포이에오(ποιέω)는 흔히 말하듯 낚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만들다, 창조하다, 살려낸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늘진 땅에 앉아 희망을 잃어버린 이들을 건져내어 살리게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고통받는 우리가 있는 곳이 하나님 나라의 중심임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변방의 어부들은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 갈릴리를 두루 다니며 우리가 선 땅은 멸시받는 자의 그늘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라는 복음을 전합니다. 이 소식은 점차 커져 결국 스스로 중심이라 여기며 고압적인 자세로 버티고 있던 예루살렘에도 전해지지요. 중심의 사람들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씀에 당혹해합니다. 귀를 닫고 그 입에 재갈을 물립니다. 그러나 변방에서 시작된 복음을 막을 수 있는 인간의 힘은 없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의 견고한 벽을 무너뜨리고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승리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스스로를 예루살렘의 중심이라 여기는 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가 참 어렵습니다. 주님은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서 외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중심이라 일컫는 곳에서 예수 닮은 사람들을 찾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신다면, 여러분은 지금 변방에 있는지 모릅니다. 마음이 힘들고 처지가 답답하고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지요. 찬송을 듣거나 부를 때 괜스레 마음이 울컥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변방에 서 있는 여러분을 향해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때임을 믿으십시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네가 세상의 변방에 서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중심에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주님을 만난 어부들이 서로의 친구들과 형제들을 향해 함께 주님을 따르자고 했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함께 하나님 나라의 중심을 넓혀 갑시다. 변방에 있는 이들에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중심임을 선포합시다. 서로의 아픔을 돌아보고, 고통의 흔적을 위로할 때 바로 그곳이 세상의 중심이며 하나님 나라의 중앙임을 깨달읍시다. 서로를 향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임하고 있다고 기쁘게 외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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