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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소리의 끝(마 3:13-17), 주현 후 첫째 주일

by 청파비둘기 2026. 1. 12.


큰 소리들
정향(定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orienting인데요. 사전을 보면 방향을 정함, 또는 일정한 방향성을 가짐이라는 뜻입니다. 행동심리학에서는 새로운 정보가 나타날 때, 본능적으로 그곳에 주의를 돌리는 반응을 '정향 반응(Orienting Response)'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사실 거의 매일 이 '정향 반응'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길을 쾅 하는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봅니다. 이게 정향 반응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혹은 익숙한 내 방에 앉아 있는데, 평소에 들리지 않던 소리가 거실에서 나면, 선득함을 느끼고 긴장하면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행동도 정향 반응입니다.  

정향 반응은 낯선 소리를 위험으로 감지하고 그곳을 향해 즉각 바라보게 함으로 인류의 생존을 높여왔던 인간 본연의 감각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의 주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선 이 정향 반응이 작동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인간 감각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우리의 주의를 잡아끄는, 낯설고 두려운 소리가 너무 크고 또 너무 빈번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새해 벽두부터 온 세상에 큰 소리가 범람합니다. 강대국이 다른 나라의 대통령을 체포하는 모습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봅니다. 작전을 지휘한 이들이 기자들 앞에 서서 자신들은 세계 정의를 실현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정치적 논쟁이 한창입니다. 주권 침탈인가, 힘에 의한 정의 실현인가?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힘으로 구축된 정의는 결국 더 큰 폭력을 부를 뿐입니다. 국내라고 별다를 것 없겠지요. 어느 유명 브랜드의 러닝화를 수입하는 업체 대표가 자기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협력업체 직원들을 협박하고 폭행했다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보도를 통해 흘러나온 음성은 변조되었지만, 잔인하고 무정한 소리가 제 귀를 때리고 마음에까지 상처를 남겼습니다. 게다가 폭행이 자행된 자리가 폐건물이 되고 만 어느 개신교회라지요. 우리 시대와 한국 교회의 아픈 단면을 보여주는 슬픈 상징처럼 느껴집니다. 

크고 무서운 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지니 우리는 정향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주의를 둘 곳이 없으니 불안하고 움츠러듭니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서 실패는 곧 나락입니다. 저마다의 이유로 몰락하는 이들을 향해 세상은 큰 소리로 조롱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올해 2026년은 유독 혼란스럽고 시끄러운 소리들에 파묻힌 채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바른 정향을 향해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를 피로하게 만드는 온갖 거친소리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신앙을 명료하고 또 맑게 만드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들리지 않는다면 몸을 움직여서라도 그 소리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가 이 세계 안에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소리를 따라 여행을 떠나시다
2천 년 전, 주님이 사시던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란 동네에도 여러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가장 두려웠던 소리는 지금도 지나치게 과중하여 죽을 것 같은 세금을 전보다 더 올린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는 자기 궁궐을 화려하게 만드는데 열을 올렸고, 또 로마 황제의 눈치를 보며 각종 곡물과 보물을 바치는데 열심을 내었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의 한숨 소리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또 한 편에서는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성전 관리자들은 나라에 바치는 세금만큼이나 무거운 성전세를 부과하길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생계가 버겁고 바빠서 성전세를 내지 못하거나, 값진 제물을 바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믿음이 없다 정죄하고 힐난했습니다. 주님 계신 지역 도처에는 이렇듯 사람들을 억누르고 희망을 짓누르는 소리들, 삶에 지친 사람들의 한숨 소리들로 뒤섞였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다른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미약하지만 분명했습니다. 요한이라 부르는 어느 예언자가 나서서 말씀을 가르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다는 소리였습니다. 그의 소리가 어찌나 강렬한지, 많은 이들이 가슴을 치고 회개하며 세례를 받은 후 새롭게 살기를 다짐한다고까지 했습니다. 갈릴리의 더운 바람결에 들려온 소리가 나사렛 말을의 주님의 귀에까지 닿았던 어느 날, 주님은 목수 일을 멈추셨습니다. 이윽고 나무를 깎고 칠하던 모든 도구를 가지런히 정리하시고 여행 떠나실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 장면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13절이 묘사하고 있는 바입니다. 본문을 다시 봅시다. 13절입니다.

13   그 때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셨다.

세상의 온갖 소음 사이로 들어온 이 작은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임을 감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정향 반응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때가 이르렀음을 깨달으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손때가 곳곳에 묻은 공방을 뒤로하고 길을 떠나십니다. 

말씀은 그저 주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으로 요한을 찾으러 가셨다고만 기록하기에 그 여행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잘 그려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청년 시절까지 지내시던 동네가 갈릴리 호수 인근 나사렛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 주던 곳은 예루살렘 인근 여리고 근처의 요단강 하류, 즉 사해 바로 근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말로는 잘 와닿지 않기에 지도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거리가 약 80~90km이고 실제 이동로를 계산하면 110-140km까지 된다고 합니다(서울에서 대전 거리와 비슷). 당시의 이동 수단이라곤 도보 또는 낙타를 타는 정도였으니, 쉬지 않고 하루 30km를 이동한다고 계산해도 족히 4~5일 이상 걸립니다. 주님을 위해 마련된 마차도, 쉬실만한 쉼터나 숙소도 전무했습니다. 이 여정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또 세례 요한이 정확히 어디에서 언제 세례를 주는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안전하게 요단강의 세례터까지 도착하리란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이 멀고 위험한 여정을 떠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윽박지르고 위협하고 억누르는 강자들의 소리와 힘들어 울고 흐느끼고 한탄하는 소리가 서로 뒤섞인 가운데에 당신을 부르시는 하늘의 소리가 주님의 귀에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도를 보고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표지판을 따라가지도 않으셨습니다. 오직 '소리'를 따라 길을 나서셨습니다.


여행하시는 동안에
이제 그 소리를 따라가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상상해 봅시다. 말씀드렸듯이 갈릴리 나사렛 마을에서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는 요단강 세례터까지는 도보로 150km가 넘는 거리입니다. 하룻길이 아니고 며칠이 걸릴지 모릅니다. 우리 주님은 어떻게 걸어가셨을까요? 주님의 여행 가방 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모두 상상의 영역입니다만 제가 확신하는 것 하나는 있습니다. 주님께서 요한을 만나러 가시는 그 긴 여정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을 것이란 점입니다. 때때로 험상궂은 이들을 만나 위협을 당하셨을 수도 있고, 지역 경계를 지키는 로마 군인들을 만나 무슨 목적으로 여행하느냐고 취조를 당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착하고 평범한 사람들, 가실 길이 머니 오늘은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가라는 사람들, 자기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셨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들의 고단한 삶이 얼마나 무거운지, 얼마나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들으셨을 것입니다. 눈물을 보셨고, 아픔에 공감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라면 분명히 그러하셨을 것입니다. 비록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주님의 긴 보행 속에 이러한 만남들이 분명 녹아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걸음 속에서 주님의 귀에 들려온 작은 소리들은 보다 더 분명해지고 점덤 더 선명해졌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깨달으셨겠지요.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이들에게 있구나! 저는 요한을 만나기 위해 홀로 떠나셨던 이 여정이 주님을 주님되게 만든 대단히 중요했던 시간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세례 요한을 향한 긴 여행 끝에 요단강 세례터에 당도하셨고, 찾으시던 세례자 요한을 만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는지요? 요한도 소리를 들은 자입니다. 요한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 마태복음 3장 3절이 증거하는 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바로 이 소리를 듣고 마음에 새긴 사람입니다. 요한과 주님 모두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바로 여기, 요단강의 세례터에 모인 것이지요. 


요한은 자기 앞에 찾아온 주님을 보았습니다. 오랜 여행으로 행색은 초라했을지 모르나, 그 표정만큼은 세상 어떤 얼굴보다 밝고 또 맑게 빛나는 분이었습니다. 눈 앞에 선 이를 보자마자, 내가 이 분을 영접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부르셨음을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하여 감히 묻지요. 제가 어찌 주님께 세례를 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과 의를 이루는 길이라고 겸손하게 답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요한에게 세례 받습니다. 주님의 정향과 요한의 정향이 만나자 하늘은 반응합니다. 본문 16절은 주님이 세례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니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렸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지금껏 세미하고 연약했던 소리가 분명하고 또렷하게 들려옵니다. 17절입니다. 

17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하였다.

하나님의 음성 소리가 세상에 울려 퍼집니다. 온갖 욕망의 소리, 다툼의 소리, 판단의 소리, 정의를 가장한 폭력의 소리를 압도하시고 온 세상 사람들의 귀에 크고도 분명한 하늘의 소리가 쟁쟁하게 들립니다. 이 소리는 구원의 소리이며 해방의 소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의 선언이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시 29:3   주님의 목소리가 물 위로 울려 퍼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로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큰 물을 치신다. 주님의 목소리는 힘이 있고, 주님의 목소리는 위엄이 넘친다. 

주님의 목소리가 하늘에서 선포되어 떨어지자, 땅을 가득 메우고 있던 온갖 잡다한 소리들이 사라집니다. 주님이 들으셨던 소리의 끝이 여기 물 바깥으로 나온 이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늘의 선포요, 내가 그를 통해 온 세상을 살리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라 부르는 소리
사람들은 하늘의 소리를 듣고 저기 우리와 함께 줄을 서서 세례받은 저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물 위로 울려 퍼진 하늘의 음성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말씀은 곧바로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받으신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주님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을까요? 말씀의 기록자들은 왜 주님의 음성을 기록해 두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주님은 무언가 말씀하셨는데, 그 음성 소리가 너무 작아서 복음서의 저자들마저도 그 음성을 듣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훗날 교회는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며 그의 예언에 기록된 주님의 종, 오늘 우리가 읽은 42장의 바로 그 종이 예수님을 가리킴을 깨닫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이러하지요.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소리 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할 것"이며,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라고요(사 32:2-3). 그렇다면 하늘의 소리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기록되지 않음이 이해가 됩니다. 주님은 하늘의 광대한 선포에 대해, 맞습니다. 내가 바로 당신의 아들입니다. 라고 세상에 외치지 않으셨겠지요.

대신 주님은 하늘의 소리를 들으신 후, 다시 세상의 소리를 들으시기 위해 긴 여정에 오르셨을 뿐입니다. 세상의 울음과 흐느낌, 실패와 좌절로 무너진 사람들의 말로서 표현되지도 못한 소리를 듣기 위해 물 바깥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생애라 부르는 여정을 시작하십니다. 이것이 하늘의 소리를 들을 신 후 주님의 답변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과 같이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시고,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지도 않게 작은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인지 온갖 소음으로 가득 메워진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주님의 이 음성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 바깥으로 나오신 주님은 우리의 소리를 듣기 위해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작지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지만, 나는 너에게 말한다. 아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나의 세례 받음이 바로 그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란 옛 자아가 죽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남입니다. 주님은 그 본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은 이 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시기 위해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심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청년 여러분, 세상은 지칠 줄도 모르고 우리 귀에 확성기를 들이대고 세상은 엉망이다. 답이 없다. 너도 별다를 것 없다고 소리 높입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무기력해지고 무감각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을 뚫고 들어오는 세미한 음성을 들으십시오. 네가 지금 서 있는 곳이 네가 다시 시작하는 첫 자리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작이 있게 하기 위하여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과거의 실패에 머물기 위함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로운 시작을 써 내려가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소리에 '정향'하십시오. 나를 주저앉히는 세상의 소음에서 고개를 돌려 나를 '시작'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나의 온 감각을 고정하십시오. 그 소리의 끝에 이르러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한다'는 하늘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더불어 주님과 같이 그 소리를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며 사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