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인지 아는 때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기다림의 초가 더욱 밝아졌습니다. 빛이 빛을 더해 온기와 밝기가 더해짐에 따라 진정한 빛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의 소망도 더욱 든든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 주에 걸쳐 주님을 기다린 이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인 세례 요한을 살피고 있습니다.
요한은 누구입니까? 요한은 빛이 세상에 왔음에도 여전히 어둠이 가득한 그 무렵에 광야 위에 우뚝 선 사람입니다. 요한은 옛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이자 새 시대의 문을 여는 예언자였습니다. 그의 한 손은 어둠과 심판이라는 과거를 움켜쥐고, 또 다른 한 손에는 소망과 구원을 기다리는 미래를 움켜쥐고 그 사이에서 가교가 된 사람입니다. 요한은 어둠에 잠식당하여 세상 구석으로 도피하지 않고, 대책 없는 낙관에 사로잡혀 먼 미래만 쳐다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빛과 어둠 사이, 명징한 증거가 없고 확신의 약속조차 없는 그 사이 공간에서 가교가 되어 주님이 오실 길 그 자체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이 옛 시대와 새 시대를 연결하는 가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주님보다 뒤에 있는 자, 주님보다 앞서지 않는 자, 주님이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시면 나의 사역은 끝난다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인격과 마음의 그릇이 참으로 큽니다. 요한은 내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았던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과 같이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이들은 단단합니다. 이들은 나의 위치, 역량, 약점과 한계를 잘 알고 있기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오롯하게 걸어갑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하는 일이 가치 있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는 의미를 품으면 몸의 괴로움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힘든 줄도 모르고 일에 매진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반면, 내면이 가벼운 이들은 자기를 두르고 있는 외적 표지들이 자신인 줄 착각하지요. 자기가 졸업한 학교, 다니는 직장, 심지어 입고 있는 옷이나 자동차 따위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요새는 부동산 시세를 사람 시세로 여기며 강남의 어느 유명한 브랜드 아파트에 사는 것이 내가 나임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죠. 참으로 빈곤한 인식입니다.
세례 요한은 반대로 살았습니다. 요한은 진귀한 비단으로 만든 명품이 아니라 낙타 털로 성기게 짜서 만든 옷을 입었고, 그의 거처는 궁전이나 성전이 아니라 광야였습니다. 주님이 그 안에 계시니 세상 누구보다 풍요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셨고, 그가 오실 길을 준비하는 일이 그의 사명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요한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헤롯의 정치적 위협도, 성전 권력자들의 힐난과 비판도 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 앞을 가로막는 그 무엇도 자기 뒤에 오실 분을 넘어설 수 없음을 그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삶은 고달팠으나 행복했습니다. 자기 안에 충만한 힘이 그를 이끌었고 흔들릴 때마다 곧 오실 그 분의 위력을 상상하며 견뎌 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요한은 자기 이전 시대의 그 어떤 예언자도 누리지 못한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모든 예언자들이 한 마음으로 기다린 메시아, 바로 그 분을 요한은 자기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는 복을 누린 사람입니다.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지 못하고 생을 다했습니다. 그 유명한 이사야도, 엘리야도, 엘리사도 이후의 모든 예언자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해방의 날과 그날을 이끌 구원자 곧 메시아 그리스도를 예언하였으나 누구도 그리스도를 자기 눈으로 본 자가 없습니다. 오직 한 사람, 세례 요한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세례받으시기 위해 자기 앞으로 나오실 때 단번에 저분이 메시아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어찌 감히 저와 같은 자가 주님께 세례를 베푼단 말입니까? 요한은 물러서지만, 주님은 부드럽지만, 단단한 말씀으로 당신이 요한에게 세례받음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이 공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세례를 주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주님 머리 위로 내리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과연 이 분이 내가 기다린,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예언자들이 기다린 바로 그분이구나!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주님의 오심을 예언했던 세례 요한과 그 예언의 당사자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동시대, 동시간을 살아갑니다.
내가 누구인지 잃어버릴 때
자, 여기에서부터 말씀을 깊게 성찰해야 합니다. 요한은 자기 사명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무엇입니까?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예비한 그 분이 이제 오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요한은 옛 시대와 새 시대 사이의 가교가 되어 주님이 그 위를 지나시게 했습니다. 이것으로 요한의 사명은 끝났다는 뜻입니다. 이제 자기가 예비한 그 분의 사역을 보며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를 기쁨으로 기다리면 됩니다. 그의 남은 생애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혀 곧 죽음을 앞에 둔 세례 요한의 질문은 어딘가 이상합니다. 본문 2절과 3절입니다.
2 그런데 요한은,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3 물어 보게 하였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은 당대 유대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의 부정한 결혼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었습니다. 요한은 자기가 다시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없음을 직감했고, 실제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참수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질문은 그가 예수님께 던진 마지막 메시지 입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문장에는 어떤 절박함과 더불어 의심과 불안마저 담겨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았던 사명자 요한과 사뭇 다른 모습이 느껴집니다. 그의 믿음이 흔들렸던 것일까요? 자기 두 눈으로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 직접 보았음에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기대하고 예측했던 그리스도의 상(像)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난주 복음서 본문의 마지막 구절, 마태복음 3장 12절입니다.
3:12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있으니,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요한이 기다리고 기대했던 메시아는 알곡, 즉 하나님의 사람들은 따로 보호하시고, 쭉정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을 불에 태우는 강력하고 권위 있는 그리스도였습니다. 요한은 자기 손으로 세례를 준 하나님의 아들이 즉시 세상으로 나가서 불을 뿜고 심판의 칼을 휘두르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요한의 예상했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갈릴리의 촌부들을 모아 여기저기 다니며 말씀을 가르치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찾아다니길 즐겨 하셨습니다. 쭉정이를 모아 태우실 생각도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로마의 군대를 물리치고, 부패한 성전 제도를 혁파하고, 바리새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아집과 위선을 폭로하여 세상을 뒤집을 계획은 도무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요한의 마음속에서는 슬금슬금 먹구름이 드리웁니다. 혹, 내가 엉뚱한 곳을 연결하는 실패한 다리였던가? 나를 밟고 지나가신 저분이 혹 내가 기다려야 하는 분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가? 요한이 기다리던 주님과 요한 앞에 현존하는 주님 사이에 괴리가 커지자, 요한이라는 가교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인식했던 요한이었지만, 점점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나를 찾기 위해 다시 질문하라
평생토록 주님 오실 길을 준비한 신실한 사람으로 살았으나, 생의 끝에 이르러 감옥에 갇히고, 정치적으로 위협당하며, 자신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그리스도의 행보를 대면하자 요한은 흔들렸습니다. 이 흔들림,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청년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세속의 가치보다 더 높은 뜻이 있음을 믿고 살아가고 싶지만, 현실 앞에 타협하고 때론 무너질 때가 적지 않습니다. 학교 성적은 고만고만하고 취업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고, 지금 다니는 직장도 언제까지 이런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내가 나임을 여실히 드러내며 살아갈 수는 없는지 고민의 쳇바퀴만 돌리곤 합니다. 청소년부에선 뜨거웠는데, 대학 선교단체에선 나도 장난 아니었던 적이 있었는데, 세상에선 어쩐지 별 볼 일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 청년으로서의 나'와 '세상에서 허덕거리는 나'가 자꾸만 충돌합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본래 누구였는지 잊어갑니다.
이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내가 누구인지, 내가 따르고자 했던 분이 누구인지 자꾸만 잊어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례 요한의 마지막 토로를 다시 들어봅시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짧지만 탄식 깊은 이 질문을 곰곰이 묵상하면, 요한은 지금 주님을 향해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라고 묻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의심에 가득 찬 물음이 내가 나를 의심하고 잃어버렸을 때 던질 수 있고, 던져야만 하는 가장 바른 질문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누구인지 잃어버렸다면, 다른 것에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죽음을 목전에 둔 요한 역시 이 질문을 주님께 던집니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가 평생을 기다린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가서, 요한에게 여러분이 듣고 보는 것을 전하세요. 시각장애인들이 다시 보게 되고, 지체장애인들이 걸어 다닙니다. 심한피부병 앓는 사람들이 깨끗해지고, 청각장애인들이 듣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일으킴받아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듣습니다. 복 있습니다, 누구라도 나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사람은!” (마 11:5-6, 새한글)
주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그대로 인용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바로 요한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요한이 주님을 향해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라는 질문에 주님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시고, 당신의 계심으로 이룩되는 세상이 곧 나임을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강력한 힘으로 세상을 호령하는 자가 아니라 병들고 힘없는 이들이 회복하고 건강해지는 세상임을, 주님은 권위로 복종하게 만드는 자가 아니라 사랑과 위로로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세상임을, 주님은 자기를 반대하는 자들을 따로 모아 불에 태우는 분이 아니라, 입장과 처지가 달라도 누구나 와서 쉴 수 있는 세상임을, 힘없고 마음 상한 이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세상 그 자체라고 요한에게 답하십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때부터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들과 누리고 싶어 하신 세상 그 자체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세상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가르치셨고 그 세상 자체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이 누구인지 안다는 것은 주님의 세계가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며, 우리가 주님께 간다는 것은 그의 세상에 속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세상이요? 차별과 배제가 없고 다름이 무시의 이유가 되지 않는 세상, 곧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가 주님입니다.
이번 주 사회면 뉴스 가운데 제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했던 뉴스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보셨는지요.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있다는 이유로 어느 활동가가 식당에서 나가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1975년의 일이 아니라 2025년의 일입니다. 어떤 옷을 입었느냐가 그 사람을 배제할 이유가 되는 삭막한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좋은 소식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는 세상입니다. 주님은 배제 없는 세상 그 자체입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네가 나의 길을 예비해 주어 이 세상이 조금씩 움트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복음서는 요한의 대답을 기록해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요한이 비로소 안심하고 편히 쉬었다고 믿습니다. 요한은 잃었던 자신을 되찾았으리라 역시 믿습니다. 그는 비록 감옥 안에 있으나 주님의 세계 안에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비좁은 감옥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누구인지 아는 이의 눈에는 무한히 넓은 세계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청년으로 살아가며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 너무 크고 어두워 나 자신을 잃어버릴 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조차 의심이 들 때,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러했으나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때 요한과 같이 다시 질문하십시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면 주님은 답하실 것입니다. 나는 세계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에 백합화가 피며, 사자와 어린양이 뛰노는 그 세계다. 나의 세계로 오라. 그렇기에 우리가 보내고 있는 이 대림절,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단지 성탄절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세계를 기다린다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의 세계로 들어갑시다. 그리고 그 세계를 조금씩 넓혀갑시다. 요한처럼 의심이 들어도 괜찮습니다. 다시 물으면 됩니다. 주님은 언제든 여러분을 그 따뜻한 세계로 초대하실 것입니다. 그 세계를 누리고, 그 세계를 닮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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