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둘 곳 없는 그리스도
요셉과 마리아는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기뻐했습니다. 예기치 않았던 손님인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와 진귀한 보물을 주고 축복의 말을 전해 주기도 했습니다. 작고 가난한 가족이었으나,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이제 막 육신의 옷을 입은 아기 예수님 주변에는 따듯한 온기가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가족을 둘러싼 정치적 현실은 차갑기가 그지없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두 부부가 가장 먼저 들어야 했던 계시는 "헤롯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니,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는 간담을 서늘케하는 천사의 메시지였습니다(마 2:13). 헤롯이라는 유대 최고 권력자로부터의 살해 위협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몸도 풀리지 않은 아내와 제 목도 가누지 못하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아버지 요셉의 근심은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요셉은 동방 박사들이 떠나간 직후, 그 밤늦은 시각에 아내의 손을 붙잡고 아기를 끌어안은 채 이집트로 피난을 결정합니다. 아기는 물론 아내의 목숨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었으나,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황제의 군대를 피하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온 세상의 축복을 받아 마땅한 아기가 태어난 바로 그날 밤, 주님의 가족은 난민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집트로 피난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끔찍하고 절망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유대의 헤롯왕이 자기들이 떠나온 고향 땅 베들레헴과 그 근방에서 태어난 자기 아들 또래의 아기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는가? 정치는 무엇이고, 권력은 또 무엇이기에 인간이 차마 저지를 수 없는 그러한 끔찍한 짓을 벌이는가!? 요셉과 마리아는 낙망했겠지요. 품에 안은 아들과 같은 또래의 사내아이라면, 그들의 부모 또한 자기들과 비슷한 또래였을 것입니다. 자식을 잃은 울부짖는 아비와 어미의 절규가 요셉과 마리아의 마음을 찢어 놓았습니다.
낙심한 마음으로 이방 땅 이집트에 도착한 유대인 요셉은 몸을 숨긴 채 고향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희망이라 여길만한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 끔찍한 헤롯이 죽었다는 소문입니다. 이는 사실이었고 주님의 천사도 요셉에게 어서 일어나 아기와 아내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돌아가라고 전했습니다. 요셉은 서둘러 고향으로 갑니다. 이제 좀 형편이 나아지려나 싶었는데, 또다시 괴로운 소식이 찾아옵니다. 헤롯이 죽었지만, 그 못지않게 폭압적인 아들 아켈라오가 유대의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켈라오 치하에서의 삶이 어떠할지는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또다시 죽음의 위협을 느낍니다. 결국 두 부부는 또다시 고향을 떠나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아주 작은 동네로 피신합니다. 이렇듯 구원의 빛이 세상에 도래했으나 그 빛을 둘러싼 세상은 가혹하기만 합니다. 이집트 피난과 나사렛 정착이라는 숨죽인 세월이 흐른 뒤, 여전히 어둠이 걷히지 않은 바로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납니다.
그 무렵이라는 시간, 광야라는 장소
따라서 우리는 "그 무렵에"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구에 주목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어딘가에 은둔해 있다가 그저 자기 시간이 되어 갑자기 복음서의 무대로 튀어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세상에 선 그 무렵은 언제입니까? 세상의 구원자요 빛이며, 인류의 소망 되신 예수님이 태어나셨으나, 그 주님께서 머리조차 둘 곳이 없어 이리저리 쫓겨 다녀야 했던 때입니다. 메시아의 등장을 예고하는 밝은 별이 하늘 위에 나타났으나, 절망적인 정치적 현실이 그 빛을 가려버렸던 바로 그 무렵입니다. 세례 요한은 빛이 있으나 어둠이 그 빛을 삼키려는 때, 작은 희망조차 거대한 절망에 삼킴 당하고 있던 그 무렵에 예언자의 옷, 곧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고 세상에 나타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이 선 땅인 "광야"라는 장소 역시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적막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곳, 역사와 문명이 단절된 장소, 낙관적이라기보다는 비관과 심판에 더 익숙한 곳이 광야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곳입니다. 회개의 세례가 펼쳐지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광야는 현실과 동떨어지거나 일상과 괴리된 공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지가 선포되던 장소였습니다. 요한이 전한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오늘 본문 7절과 8절입니다.
7-8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요한은 거룩한 척 행동하지만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권력과 인기를 탐하던 사람들의 비겁함을 매섭게 질타했던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잔악한 영아 살해를 저질렀던 헤롯 대왕의 아들이자 그 악을 그대로 대물림한 유대 최고 권력자 헤롯 안티파스의 부정한 결혼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비판했습니다. 광야의 요한은 현실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현실적이고 동시대의 감각을 지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메시지 또한 언제나 현재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광야는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철저한 현실의 공간, 심판과 구원이 중첩되는 장소입니다.
가교가 된 예언자
세례 요한의 등장을 알리는 "그 무렵에" 그리고 "광야에서"라는 말씀은 요한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어둠이 빛을 위협하며 삼키려던 그 시간 사이를 뚫고 들어간 사람입니다. 또한 요한은 생명이 힘을 잃은 것 같으나, 말씀이 살아 숨 쉬는 광야라는 공간 위에 우뚝 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의 역할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가교(架橋) 즉 다리입니다. 요한은 빛과 어둠의 시간을 연결하고 심판과 구원 사이에 다리를 놓았습니다.
세례 요한이라는 가교의 양 끝을 자세히 봅시다. 한쪽에는 옛 시대의 심판이 놓여있습니다. 어둠과 절망의 시간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세계, 혹은 그리스도가 왔으나 그리스도를 보지 않는 시대가 가교의 한 쪽 끝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교의 다른 한 편은 그리스도가 있는 세계,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세계입니다. 당연히 빛의 세계이고 의미가 가득한 세계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두 세계는 본디 만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세례 요한은 두 세계의 양 끝을 움켜쥐었습니다. 닿을 수 없는 두 세계를 자기 온 몸을 던져 연결했습니다. 마치 우리 시대 청년들 앞에 놓인 불투명한 미래라는 '현실'과, 하나님이 주실 비전이라는 '소망' 사이에서 찢어질 듯한 긴장을 견디는 여러분처럼, 요한은 그 간극을 온몸으로 버텨낸 것입니다. 영원히 만나지 못하리라 여겼던 두 시간과 공간이 요한을 통해 이어지고 끊어졌던 그 길이 비로소 곧게 펴진 것입니다. 가교가 된 세례 요한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바로 그 의미입니다(3).
요한은 그 무렵 광야에서 어느 한쪽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예수를 죽이려는 어둠의 시간을 살았지만 낙담하지 않고 버텨냈습니다. 적막하고 무기력한 광야에 섰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대책 없는 낙관도, 냉소적인 비관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서 힘겹게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는 바로 이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마 11:11). 요한의 예언자적 외모나 그가 전했던 강력한 웅변 때문이 아니라, 엄혹한 현실을 끌어안으면서 동시에 도래하는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가교가 되는 삶을 살았기에 그는 큰 인물입니다.
우리의 그 무렵과 우리의 광야에서
지난 한 주일, 세례 요한을 묵상하며 그의 삶이 참으로 고단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허름한 옷을 입고 바깥에서 한뎃잠을 자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기 때문이 아닙니다.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고자 하면 방법은 간단합니다. 어느 한쪽 편을 들면 그만입니다. 거대한 어둠을 보며 어차피 우리는 안 될 테니 힘 빼지 말고 순응하며 살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분별없는 절망에 사로잡힌 사람의 전형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상이나 운동에 과도하게 몰입하여 자신을 투신하기도 합니다. 이는 무분별한 낙관에 기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달랐습니다. 요한은 사가랴 제사장의 아들로 제사장직을 이어받아 성전 체제 복무하며 살면 그만이었습니다. 황제가 직접 나서서 그리스도를 제거하려 혈안이 된 판국에 권력자들과 싸워서 얻을 이익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요한은 현실에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그 현실에서 도피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시대의 어둠을 보면서 다가올 미래의 빛을 함께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광야로 나가 빛과 어둠을 잇는 다리가 된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정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자기 시대의 어둠과 거리를 두면서도 그 어둠을 회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들러붙어 투쟁하는 사람을 가리켜 동시대인이라 말했습니다. 아감벤은 말합니다.
"동시대인이란 자신의 시대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빛이 아니라 어둠을 지각하는 자이다. 모든 시대는 그 동시대성을 체험하는 자들에게는 어둡다. 따라서 동시대인이란 이 어둠을 볼 줄 아는 자, 현재의 암흑에 펜을 적셔 글을 써내려갈 수 있는 자이다." (조르조 아감벤,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 양창렬 역, 도서출판 난장, 2017, p76)
이런 의미에서 세례 요한은 동시대인입니다. 자기 시대의 어둠을 직시하고 동시에 빛을 붙잡은 자입니다. 광야 위에 굳게 서서 빛과 어둠 사이의 가교가 되었기에 주님은 그 다리를 통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낙관과 비관 사이에서 바장거리는 인생들입니다. 완전히 세속의 사람이 되지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경건으로 무장한 신앙인이 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이따금 나의 인생과 신앙이 참 별 볼일 없고 무기력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맞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사이 어딘가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낙담하여 포기하거나 어느 한편에 나의 판단과 의지를 그저 내어 맡겨서는 안 됩니다. 요한과 같이 그 사이에서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한 손에는 세상의 아픔을 움켜쥐십시오. 철저하게 현실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사회의 여전한 부조리에서 눈을 돌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또 다른 한 손에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소망을 움켜쥐십시오. 주님께서 이 모든 폐허를 고치시고 죽은 생명을 살리시고 신원의 날을 선포하심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렇게 우리가 빛과 어둠, 구원과 심판 사이에서 가교가 되는 삶을 살 때 주님의 길이 곧게 펴지고 복된 주님의 소식은 그 다리 위에서 소통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가교가 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아감벤은 동시대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동시대인은 어둠 속에 펜을 적셔 글을 써 내려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쥐고 있는 펜은 무엇입니까?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잃지 않는 것, 기도을 포기하지 않고 의로운 선택을 하기 위해 몸부림 치며 투쟁하는 것, 그렇게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기록하며 살아야 합니다. 힘들겠지만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가교가 되는 삶을 살아갑시다. 아멘.

'⌞ 청청 말씀 나눔'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당신은 누구십니까?(마 11:2-11) (0) | 2025.12.14 |
|---|---|
| 고요를 간직한 사람(마 24:36-44) (0) | 2025.11.30 |
| 지극히 낮으신(눅 23:33-43) (0) | 2025.11.23 |
| 재난의 징조(눅 21:5-19) (0) | 2025.11.19 |
| 침묵의 소리를 듣기 위하여(욥 19:24-27a) (0) | 2025.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