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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거룩한 무죄자들(Holy Innocents)(마 2:12-23)

by 청파비둘기 2025. 12. 28.


성탄 후 첫 날
성탄절을 기념하는 온갖 장식은 신기한 데가 있어서, 25일을 기점으로 하루만 지나도 그 있음이 어색해지기 시작합니다. 거리마다 흘러나오던 성탄 캐럴은 중단되어 더는 들리지 않고, 보기만 해도 마음이 명랑해지던 멋진 트리와 형형색색 장식물들은 이제 철거 일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됩니다. 불과 하루만에 존재만으로도 마음을 설레게 만들어 주던 것들이 이제는 서둘러 처분하고 싶어지는 어색한 장식품이라는 운명이 되어버립니다. 현대인들에게 성탄은 도래와 동시에 망각으로 돌입하는 찰나의 기쁨인 듯 합니다. 

가혹한 평가인가 싶지만, 마태복음서가 이야기하는 성탄 그다음 날이 그러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서 2장 13절의 첫 마디가 이렇게 시작하지요. "박사들이 돌아간 뒤에" 동방의 박사들은 하늘에 뜬 별을 보고 주님이 계신 곳을 찾았습니다. 밤이라는 뜻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박사들이 주고 간 진귀한 선물을 앞에 두고 설레기도 하면서, 혹 이것이 선물인지 아니면 어떤 불길한 일의 징조는 아닐지 속 복잡한 심경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님은 잠이 들었습니다. 아마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잠들었겠지요. 그렇게 성탄의 첫 밤을 맞았습니다.

세 가족이 설핏 잠에 빠져들 무렵에 아버지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 무서운 경고를 내립니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니,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마치 성탄절 다음 날 거짓말처럼 사라진 캐럴처럼, 아기를 품에 안은 기쁨은 사라지고, 난데없는 살해 위협이 이 연약한 가족에게 들이닥쳤습니다. 요셉은 서둘러 아내를 깨우고 피난을 준비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요셉이 일어나서, 밤사이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하여"라는 말씀에 긴박감과 초조함이 느껴집니다. 성탄의 기쁨과 메시아의 탄생이라는 벅찬 감동은 단 하루도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행복감이 흘러넘쳐야 할 갓난아기의 집은 하룻밤 사이에 빈집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성탄 후 첫날의 현실입니다.


천사의 경고
이후 펼쳐진 사건은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헤롯은 정탐꾼으로 보낸 박사들이 자기를 배신했다는 것을 알고 치를 떨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잔악무도한 명령을 내립니다. 베들레헴과 그 인근 지역을 샅샅이 뒤져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이라고 지시한 것이지요. 성경에는 헤롯이라는 이름의 왕이 여럿 나오는데, 마태복음 2장의 헤롯은 헤롯 가문에서 가장 강력했던 왕이자, 유대 땅 전체를 다스린 왕, 그래서 영어로는 Herod the Great, 우리말로는 헤롯 대제 또는 헤롯 대왕으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자가 분노했으니, 그의 명령은 속전속결로 이행되었습니다. 왕의 군사들은 베들레헴으로 군대를 몰아서 닥치는 대로 사내아이들을 끌어내어 죽였습니다. 부모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방문을 부수고 들어온 우악스러운 군인의 칼날을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권력에 의한 집단적 영아 절멸 사건이 발발합니다. 역사가들인 이때 벌어진 영아 학살이 수십에서 수백 명 정도라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어머니의 눈앞에서 자기 아들이 국가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믿기 힘든 비극이 벌어졌다는 것 그 자체를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도시 전체에 비극적인 울부짖음이 가득합니다. 죽음이 입을 벌리고 아이들을 삼켜버렸으니,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부모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이 말 할 수 없는 비극을 보며 이스라엘의 연약한 사람들은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씀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울부짖으며, 크게 슬피 우는 소리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우는데, 자식들이 없어졌으므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라마"라는 동네에서 절절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고 말합니다. 그 울음은 라헬, 곧 아브라함의 며느리이자 야곱의 아내인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우는 소리입니다. 마태복음이 인용하고 있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역사적 사실과 슬픔의 은유가 뒤섞인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아내 라헬은 자식을 잃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라헬은 자식을 낳다가 죽은 여인입니다. 그 아들이 요셉의 동생이자 야곱의 열두 번째 막내아들인 베냐민입니다. 라헬은 아이를 잃어 본 적이 없음에도 어째서 마태복음은 라헬이 아이를 잃고 통곡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할까요? 그것은 이 "라마"라는 도시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라마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8km, 베들레헴은 예루살렘보다 조금 아랫동네였으니 베들레헴에서 출발하면 약 17-18km 정도 됩니다. 라마는 그다지 특색있는 도시는 아니지만, 매우 슬픈 역사적 기억을 간직한 도시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에 멸망하여 무수한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갈 때, 바로 이 라마에서 집결하여 먼 나라로 귀향길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라마는 젊은 자식들과 늙은 부모들이 영원히 헤어지는 장소,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장소, 서로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아야 하는 생이별의 장소였습니다. 그렇기에 마태복음이 예레미야의 예언 말씀으로 이 상황을 기록한 이유는 헤롯이 저지른 이 끔찍한 범죄가 초래한 고통은 자기가 낳은 아이를 보지 못하고 죽는 어미의 심정, 자식을 두고 먼저 죽어야 하는 어머니의 심정과 같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햄에서 벌어진 고통의 수준이 아이를 두고 죽어야 하는 어머니의 심정과 같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성탄 후 이틀째부터 벌어진 일입니다.


어째서 침묵하셨는가?
우리는 성탄절을 지나며 주님의 탄생이라는 벅찬 감동과 기쁨을 느낌과 동시에 성탄 후 단 하루 만에 벌어진 참극을 목도하며 절망합니다. 아이들이 죽어가고 그 아이들의 엄마들이 소리 지르며 실신하는 모습을 일방적으로 목격할 수밖에 없고 또 어떠한 개입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가위에 눌린 듯 꼼짝할 수 없습니다. 어서 빨리 이 버거운 말씀을 넘어가고 싶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독자로서, 또 신앙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먼저 쏟아낼 수밖에 없는 분노는 이것입니다. 어째서 주님의 천사는 요셉과 마리아에게만 헤롯의 잔악한 계획을 미리 경고하시고, 베들레헴의 다른 부모들에게는 전하지 않으셨는가?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천사가 베들레헴에 살고 있는 주님 또래의 아기를 둔 부모들의 꿈에도 나타나 서둘러 피난을 가라 했다면, 이런 영아 살해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천사는 침묵했습니다. 아니, 숨긴 것은 아닐까요? 그리스도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 많은 영아들이 살해당하도록 내버려둔 것은 아닐까요? 너무나 어렵고 또 무서운 문제입니다. 어떠한 신학적 대안을 내놓는다고 해도 설명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사건은 신에 의한 폭력이 아니라 인간에 의한 폭력이라는 것, 즉 이 참극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은 설명 불가능한 고통의 문제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부재와 무능력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참상이 벌어졌을 때 하나님은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 심정 모르는 바 아니며, 절대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하나님을 탓하는 일은 부조리한 현실의 가장 간편한 도피처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신의 부재를 따지기 전에 인간의 의도가 얼마나 악했는지를 우리는 먼저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헤롯이 영아 집단 살해의 칼날을 휘두르던 때, 천사는 어째서 침묵을 지켰는지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불가해한 폭력 앞에 여전히 침묵하는 우리 자신에 대해 그리고 모르는 척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이 옅어지길 바라는 인류의 침묵 앞에 분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라야 우리는 본문 18절의 마지막 문장,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우는데, 자식들이 없어졌으므로, 위로받으려 하지 않았다."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는 단지 자식 잃은 슬픔이 너무 커서 어떠한 위로도 별무소용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위로받으려 하지 않았다는 말은 정확히 말해 위로받기를 거절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나에게 위로하지 말라, 나는 계속해서 울겠다는 선언이며, 나의 울음소리를 그치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제아무리 큰 상처와 아픔도 결국 아물기 마련입니다. 그 시작은 위로이지요. 위로를 통해 치유가 일어나고, 치유와 함께 망각도 시작됩니다. 슬픔의 기억이 점차 옅어지며 일상을 되찾아 가는 것이 곧 회복입니다. 그러나 폭력으로 아이를 잃은 베들레헴의 어머니들은 슬피 울기를 중단하지 않음으로 회복을 거부하고 망각에 저항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저항으로서의 애도입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그리고 세상은 이 울음소리 듣기를 버거워합니다. 여인들의 울음이 계속되면 폭력과 학살의 기억이 망각되지 않으며, 그 폭력을 일으킨 당사자들은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베들레헴에서 아이를 잃은 양육자들의 애곡 소리를 가장 듣기 싫었던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헤롯입니다. 대왕이라 불리던 헤롯은 세상에서 가장 작고 약한 아기 하나가 두려워 그 또래 아기를 모조리 죽였습니다. 저 아기 가운데 하나가 언젠가 자기가 가진 모든 부와 권력을 무너뜨리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영아 살해 명령이 완수되고 헤롯은 안심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초토화되었다고 믿었던 베들레헴에서 울음소리가 그치질 않더니 오히려 점점 커져 큰 슬픔의 흐느낌이 세상을 가득 메웠습니다. 이 소리는 헤롯을 미치게 했겠지요. 자기의 잔악함, 나약함 그리고 비겁함을 고발하는 나팔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헤롯 대왕은 이 시점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습니다. 당대의 유대인 역사가였던 요세푸스는 그의 <유대 고대사>에서 헤롯의 몸이 안에서부터 썩어 들어갔고, 벌레가 생겨서 매우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죽었다고 기록합니다(유대 고대사 17.6.5). 물론 헤롯의 영아 살해 지시와 그의 죽음 사이에 실체적 관계가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헤롯의 잔인성과 그의 비참한 죽음 사이에는 결코 멀지 않은 상징적 관계가 있습니다. 헤롯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보았던 민중들의 심정이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19절에서부터는 헤롯의 죽음 이후를 다룹니다. 절대 악으로 군림하던 헤롯 대왕이 죽어 잠시간 평화가 찾아온 듯하였으나, 그에 못지않은 잔혹한 군주인 아켈라오가 집권합니다. 악이 대를 이어 그 힘을 유지한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어린 예수는 이번에도 피난을 떠나 나사렛으로 갑니다. 이 일은 성탄 후 몇 년이 채 되지 않은 시기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성탄 후 바로 그날 밤으로부터 수년이 지나기까지 단 하루로 평화로운 날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동방 박사들의 감격스러운 영접과 작은 동네 베들레헴을 비추던 별빛의 따스함은 단 하루도 이어지지 못하고, 온 세상에는 자식을 잃은 어미와 아비의 통곡과 권력자들의 살벌한 눈초리가 세상을 뒤덮었습니다.  

이 그림을 함께 봅시다. 



미국의 어느 정교회 건물 외벽에 그려진 이콘 성화입니다. 주님 아래에 있는 아이들은 헤롯에게 살해당한 아이들을 상징합니다. 상단의 헬라어는 타 하기아 네피아(Τὰ ἅγια νήπια), 번역하면 거룩한 아이들입니다. 주님은 이 아이들 가운데에 서 계십니다. 아이들의 머리엔 거룩의 상징인 후광이 있습니다. 즉 이 아이들은 모두 거룩한 성자들이란 뜻이지요. 교회 전통에선 헤롯에게 죽임당한 아이들을 "거룩한 무죄자들"이라 부르며, 주님을 위해 죽은 최초의 순교자들로 기억합니다. 아이들은 분명 비참하게 죽었지만, 그 죽음은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라 메시아를 살린 순교입니다. 그런데 아이들 가운데 서 계신 주님의 표정을 보십시오. 슬픔으로 가득 찼습니다. 주님은 이 아이들의 죽음과 부모들의 슬픔을 평생 지고 계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자기 때문에 이 아이들이 자기 대신 죽었다는 무한한 부채감을 잊지 않고 계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이들만 보면 어쩔 줄 모르며 사랑하셨던 주님의 모습엔 자기 대신 죽은 아이들을 향한 사무친 마음이 있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라마의 통곡과 베들레헴의 슬픔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거리에 캐럴은 멈췄지만, 고통의 울음은 여전합니다. 아름다운 성탄 장식은 이내 사라지겠지만, 라마의 상처는 이 땅에 여전히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 상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울고 아파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죽음에서 살아남은 자의 책임입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는 절멸 수용소에서 생환한 이들이 남들보다 뛰어나거나 도덕적이거나 현명했기에 살아 돌아온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건강하고 인격적으로 훌륭한 이들, 남들의 짐을 대신 진 이들은 가장 먼저 죽었고, "오히려 최악의 사람들,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 무감각한 자들, '회색지대'의 협력자들, 스파이들이 살아남았다"고 말합니다(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이소영 역, 2014, 돌베개, 94). 하여 레비는 말하길, 살아남은 자기들이 증언자가 아니고 먼저 죽은 이들이 진짜 증언자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행운이든 우연이든 혹은 신의 뜻이든 생명을 부지하게 된 생존자들은 진실을 알리고 전해야 할 책무가 있다고 역설합니다.

이 책무를 그리스도인인 우리 역시 지어야 합니다. 성탄의 기쁨이 도래했으나 우리 사는 세상은 여전히 칼바람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위로를 거절하고 슬프게 우는 사람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울음이 들리지 않는다면 기도하십시오. 마음을 청결히 하고 민감한 귀와 눈을 달라고 주님께 부탁하십시오. 우리는 비록 약하고 어리지만,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줄 때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하나님의 든든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울 때, 세상을 사로잡고 있는 무수한 헤롯들이 긴장할 것입니다. 다가오는 새해 우리가 있어야 할 곳, 들어야 할 소리, 보아야 할 장면들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며 새날을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