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매듭
새해 첫 번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해를 반성하고 새해 계획과 다짐을 세우며 마음을 다잡는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12월 31일과 1월 1일은 그저 하루가 지고 또 하루가 시작되는 무미건조한 시간의 전환이며 인간이 편의를 위해 고안한 달력상의 구분일 뿐인데 왜 그리 호들갑이냐고 무안을 주기도 합니다. 지당한 말씀이지만, 인간 이해의 깊이가 얕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명 12월 31일과 1월 1일 사이의 시간에는 어떤 물리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시간은 무심히 흐를 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일상적 시간의 흐름 사이를 갈라낸 후에 그 안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어째서일까요? 인간이 동물과 다른 여러 이유 가운데 한 가지, 곧 의례를 행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존재들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의례를 행합니다. 그저 흘러갈 뿐인 시간을 중단시키고, 미래를 준비하는 행위가 일종의 의례입니다. 20세기의 현대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시간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이러한 태도는 종교적 인간과 비종교적 인간을 구분하기에 충분하다. 종교적 인간은 근대적인 용어로 역사적 현재에만 사는 것을 거부하고, 어떤 점에서는 영원성과 동일시될 수 있는 성스러운 시간을 다시 획득하려고 노력한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미르치아 엘리아데, 성과 속, 이은봉 역, 한길사, 1998, 90). 우리는 지금 일상의 흐름 가운데 잠시 멈추어 지나간 시간을 매듭짓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며, 내가 더 큰 세계의 일부임을 깨닫는 의례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이 귀한 의례적 시간을 방해하고 시간의 매듭을 묶어내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현실이라는 무게입니다. 이게 생각보다 대단히 무겁습니다. 또 대단히 무섭기도 합니다. 우리 시대의 사회적 현실이 너무나 가혹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러분과 같은 청년들에게는 더욱더 말이지요. 저는 이제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전셋집을 구한다고 하면 덜컥 겁부터 납니다. 혹여 첫 직장에서 괴팍한 상사를 만나지는 않을까, 오래 준비한 시험에서 낙방하지 않을까, 지원한 회사 어디에서도 면접을 보자는 말이 없으면 어떡하나, 교제 폭력의 피해자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됩니다. 물론 때때로 실패를 경험할 수 있고, 당연히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사회가 실패에 관대하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많은 청년들이 현실이라는 세파에 밀려 소외와 도태를 느낍니다. 정신과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는 청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게 현실이라는 바다를 둥둥 떠다니는 부표 같은 삶을 살아가다보면, 불현듯 내가 선 곳이 땅의 맨 끝임을 깨닫고 말로 표혀한기 어려운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우리를 둘러싼 가혹한 현실은 그리스도인답게 살고자 애쓰는 모든 노력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저는 이것을 가리켜 세상이 우리에게서 의례를 빼앗아 간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의례란 무엇입니까? 단지 주일 11시 혹은 오후 2시 예배 시간만이 의례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의례는 범속한 시간의 흐름을 중단하고, 그 안에서 반성하며, 내가 아닌 타인을 돌아보고, 하나님이라는 더 큰 세계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욕심을 부리기보다 나누고 용서하기를 다짐한 후 시간의 매듭을 지음으로 거룩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믿음과 신앙의 의례입니다. 그러나 의례를 통해 시간의 매듭을 지어나갈 힘을 빼앗긴다면 우리는 그저 세상의 흐름을 쫓아가기 바쁜 삶, 거룩과는 먼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어제와 같이 오늘을 살고, 오늘과 같이 내일을 살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12월 31일과 1월 1일이 무슨 대단한 차이가 있느냐고 말하는 냉소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땅의 맨 끝에 선 사람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예언서 말씀에는 의미를 상실하고 의례를 강탈당한 사람들을 향해 자기 존재 전부를 헌신한 선지자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 선지자는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는 주전 650년경에 태어나서 주전 570년경까지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이 시기는 남유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 나라에 의해 완전히 패망한 시기입니다. 즉 예레미야는 자국이 멸망을 목도한 예언자입니다.
모든 망국의 역사가 그렇듯 나라가 무너지기 직전의 유다는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멸망 직전 유다는 주변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이른바 줄타기 외교를 하며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시 전통적인 강대국인 이집트에 줄을 댈 것인지, 아니면 신흥 강국 바빌로니아에 의탁할 것인지 정치가들은 사분오열하여 정쟁에만 매달렸습니다. 부름을 받은 유다의 왕들 가운데 극소수의 왕, 가령 요시야같은 이들이 왕이었을 때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왕은 우상을 섬겼고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 군대의 힘에 의지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정치가 이러하니 사회는 어떠했겠습니까? 성전은 타락했고, 제사장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 본분을 망각한 지 이미 오래였지요. 예레미야서에는 기가 막힐 정도로 어이없는 고발이 많이 나옵니다. 딱 한 구절만 봅시다. 예레미야서 6장 13절의 폭로입니다.
렘 6:13 "힘 있는 자든 힘 없는 자든, 모두가 자기 잇속만을 채우며, 사기를 쳐서 재산을 모았다. 예언자와 제사장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였다.
왕, 예언자, 제사장, 권력자, 부자, 가난한 자 할 것 없이 모두 타락했습니다. 멸망을 앞에 둔 유다에 의미가 있었다면, 자기 잇속 채울 궁리뿐이었습니다. 하여 하나님은 바빌로니아를 일으켜 유다를 멸망시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를 끝으로 유다의 시간은 끝이 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종결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의 삶과 신앙을 풍성하게 만들었던 모든 의례는 끝이 납니다. 의례가 사라지니 의미도 덩달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포로가 된 이스라엘의 시간은 그저 흐름만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포로 신분입니다. 고향 땅이 아니라 정복자의 땅입니다. 성전이 없기에 안식일을 맞아 삶을 중단하고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애굽에서 조상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유월절을 온전히 지키기도 어렵습니다. 노예가 되었기에 기계처럼 일해야 하며, 또 숨죽여 살아야 했기에 스스로 시간을 멈출 수도, 시간의 매듭을 짓고 미래의 희망을 꿈꿀 수도 없었습니다. 사로잡힌 자의 삶에는 의미가 생성되는 사건이 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을 절망케 했던 것은 시간을 중단시키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들리는 것이라곤 희망을 품지 말라, 너희에게 의미 따위는 없다는 정복자 바빌로니아 황제의 우악스러운 외침뿐이었습니다. 의례를 빼앗긴 이스라엘은 그저 땅의 맨 끝으로 내몰려 무의미라는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살아갈 뿐입니다.
천막을 세우시고 그 안에 거하신 주님
땅의 맨 끝, 그 뒤로는 무의미의 낭떠러지에서 살아가야 했던 이스라엘을 묵상하며 기도하다 보니 여러분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혹은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 가운데 삶의 맨 끝자리에 몰린 이는 없을까, 시간의 매듭을 지을 힘을 모두 잃어버린 채 지쳐있는 분은 없을까, 새로 시작한 2026년을 바라보며 그저 또 한 해가 시작되었을 뿐이라고 자조하는 이는 없을까,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서 사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운 이들은 없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함께 읽은 요한복음서의 첫 번째 구절이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10절에서 요한은,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이미 이 땅에 태어나셨고, 온 세상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지만, 세상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는 주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을 알아보지 못함이 아닙니다. 이미 보았고, 또 주님을 알지만, 내면에 드리운 그림자가 우리의 눈과 마음을 가려 주님을 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뜻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현실이라는 무게에 눌려 의미를 빼앗기고, 의례를 상실한 내 마음이라는 광야 위에 작은 집, 아니 작은 천막 하나가 세워지는 소리가 있음을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복음서 말씀 14절의 첫 문장,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여기에서 "사셨다"라는 동사, 곧 '살다'라는 뜻의 헬라어 스케노오(σκηνόω)는 중의적입니다. 본래의 뜻은 dwell, '거주하다'입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의 뜻이 있는데, '짓다' 정확히는 천막을 친다는 의미입니다. 즉,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님께서 황량한 내 마음에 들어와 천막 하나를 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직접 치신 천막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지요.
메마른 땅 위에 세워진 천막은 자연스럽게 광야 한 가운데 세워진 성막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랜 광야 생활로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막을 보며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비록 허름한 텐트였으나 그 위에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위로입니까. 주님이 마르고 황량한 내 속에 직접 천막을 치시고 그 안에 계신다니 말입니다. 나 자신조차 보기 싫어 고개를 돌리고 마는, 그야말로 광야와 다를 바 없는 내 속 마음인데, 그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천막이 하나 있고, 또 그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웬걸, 우리 주님이 미소 지으시고 그 천막 안에 앉아 계시니 말입니다. 내 마음의 천막 안에 있는 주님과 눈이 마주칠 때를 가리켜, 요한은 14절에서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묘사했습니다.
내 속에 계신 살아계신 주님과 눈이 마주쳐 그의 영광을 본 이들에게 비로소 의미가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의례가 다시 시작됩니다. 말씀드렸듯 그리스도인의 의례란 세상이 강요하는 시간을 멈추고 거스르는 힘입니다. 믿음의 의례를 통해 나를 돌아보고 무엇보다 앞만 보느라 눈치채지 못했던 내 곁에 있는 이들의 슬픔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위로와 격려를 나누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연대하기를 다짐합니다. 세상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네 삶이나 살아가라 말하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습니다. 내 안에 주님의 천막이 있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땅의 맨 끝에서 주님과 돌아갈 시간이 된 것입니다.
땅 끝에서 돌아오는 사람들
예레미야가 이 돌아옴에 관하여 이렇게 예언합니다. 본문 8절입니다.
8 내가 그들을 북녘 땅에서 데리고 오겠으며, 땅의 맨 끝에서 모아 오겠다. 그들 가운데는 눈 먼 사람과 다리를 저는 사람도 있고, 임신한 여인과 해산한 여인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북녘 땅과 땅의 맨 끝이 단지 지리적 의미만은 아니겠지요. 바빌로니아라는 힘에 밀려 소외된 사람들의 자리를 지시하는 강력한 은유입니다. 주님은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안으로 데리고 오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기 돌아오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십시오. 힘이 세고, 능력이 많고, 준수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아닙니다. 눈먼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그리고 임신하고 해산한 여인들입니다. 모두 힘겨운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임신하고 해산한 여인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의 이름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부르며 함께 데리고 가신다고 예레미야는 선포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익하고 쓸모없으며, 같이 가기를 꺼리는 바로 그 사람들, 어쩌면 바로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님은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너를 빼놓고 가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그리고 땅의 맨 끝에 있는 것 같아 두렵고 불안한 여러분, 주님이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도저히 걸을 힘이 남지 않았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새롭게 시작한 2026년에도 우리는 무수한 전쟁 소식을 듣게 될 것이며, 거대 기업들의 횡포를 목격하고,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참사를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마다 의미를 잃어버리고 의례가 중단될지도 모릅니다. 예배는 물론 교회의 문턱조차 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무너진 일상 한복판에, 비참한 사건으로 눈물짓고 있는 이들 가운데에, 그리고 의미를 잃고 의례를 빼앗긴 이 땅의 젊은 청년들 마음 안에 당신의 천막을 짓고 계십니다. 주님의 천막은 견고합니다. 주님은 그 안에 분명히 계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맙시다. 올 한 해도 기쁘고 명랑하게 살아갑시다. 세파에 맞서고, 세상이 강요하는 시간 앞에 당당히 멈추어 나와 너를 돌봅시다. 뒤처진 이들을 기다려 함께 갑시다. 하여 예레미야 13절의 말씀, "그 때에는 처녀가 춤을 추며 기뻐하고, 젊은이와 노인들이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고, 그들을 위로하여 주겠다. 그들이 근심에서 벗어나서 기뻐할 것이다."라는 예언을 우리 삶에서 실현하며 살아갑시다.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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