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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밤의 순례길(요 3:1-17

by 청파비둘기 2026. 3. 1.

눈을 들어 산을 보니
인간은 시선이 향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앞을 보고 걷는다는 것은 곧 시선이 닿는 지점을 향해 걸어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 눈에 선명히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에도 침묵하시는 듯하고, 때로는 깊이 숨어버리신 것만 같아 우리의 시선은 종종 길을 잃고 방황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시선에 잡히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함께 교독한 시편의 시인이 가르쳐줍니다. 눈을 들어 산을 보는 것입니다(시 121:1). 그런데 조금 비뚜름한 생각이 올라옵니다. '산을 보면 하나님이 보이나?' '켜켜이 쌓인 저 산 앞에 서면 오히려 더 암담해지는 것 아닐까?' 하지만 시인은 더 깊은 차원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시인이 도움을 구하기 위해 산을 바라보는 이유는 그 산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산이 아니라 산을 만드신 분을 보겠다는 뜻이지요.

시편 121편은 성전을 향해 가는 어느 순례자의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순례의 길에 오른 이 앞에 놓인 산은 그의 나아감을 가로막는 벽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순례자는 자기 앞에 놓인 산을 벽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 산을 만드신 분, 벽이라는 경계 너머에 살아계신 분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산을 향하여 가고 있음에도 순례자는 두렵지 않습니다. 발을 헛딛지 않도록 지키시고, 우리가 잠든 순간에도 졸지 않으며 우리를 살피신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산중의 어둠이 제아무리 깊어도 순례자는 개의치 않습니다. 어둠과 함께 빛을 만드시고, 밤이 지난 뒤에는 반드시 낯이 도래하도록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넘어야 할 거대한 산과 같은 현실 앞에서도 순례자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듭니다. 저 막막한 산과 같은 현실보다 크신 분이 계심을 믿을 수 있다면, 순례자는 현실이라는 어둠 속으로 씩씩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밤길을 걷는 순례자
사순절 둘째 주일 복음서를 읽으며 우리는 어두운 밤에 머물고 있는 니고데모라는 한 유대인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존경받는 지도자였습니다. 복음서에 등장하기 전 니고데모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만, 주님을 만나서 했던 말을 살펴보면 그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는 유추할 수 있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2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주님을 랍비님 또 선생님이라고 높여 부릅니다. 그의 태도가 겸손합니다. 또한 주님이 행하신 많은 표징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전부터 주목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 무엇보다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마술이나 사기 행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셔야 가능한 신비한 능력임을 인정합니다. 그는 주님을 통해 내면의 응어리를 해소하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다만, 그가 '밤'에 찾아왔다는 사실이 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니고데모의 밤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합니다. 영적인 어둠을 상징한다는 견해, 동료들의 눈을 피한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견해, 혹은 밤새 율법을 연구하던 당대 랍비들의 관습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레이몬드 E. 브라운, AB 요한복음1, 416). 모두 일리 있는 해석입니다.

저는 니고데모의 밤을 정지된 시간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밤은 결국 새벽을 밝히는 빛에 자리를 비켜주어야 합니다. 니고데모의 밤은 낮으로 가는 여정 중에 만난 어둠이라는 시간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을 처음 만난 니고데모를 향해 '밤길을 걷는 순례자'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니고데모의 두려움
밤의 순례길에 오른 니고데모는 이제 막 길 위에 올라선 순례 초심자입니다. 낯선 길은 낯선 두려움을 자아내는 법입니다. 니고데모 역시 밤의 순례길 첫 번째 문턱에서 서자마자 거대한 두려움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당혹감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 주님의 첫 번째 말씀 직후입니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이어지는 니고데모의 응답에서 그의 당혹감이 느껴집니다. 니고데모가 이렇게 답하지요.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 개역개정 번역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에 니고데모는 흔들립니다. 당황한 니고데모는 늙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느냐고,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야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주님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더욱 난해한 말씀으로 니고데모의 마음을 어렵게 합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7절에서 확신에 찬 어조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7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주님은 집요할 정도로 다시 태어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했던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에 큰 괴로움을 느낍니다. 다시 태어나지 못하면 그토록 바랐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 니고데모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 앞에 주저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이 말씀이 비상식적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나'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가 무엇입니까? 니고데모를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 즉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입니다. 

유대인 니고데모는 아브라함의 혈통 안에 있는 선택된 민족의 사람입니다. 자기를 비롯한 모든 유대인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들은 모두 한 가족입니다. 그런데 다시 태어나면 유대인의 혈통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됩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유대인의 피를 지닌 유대의 자손이 아니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제 유대 민족이 내 가족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유대인으로 살아오며 쌓아 올린 많은 자랑과 업적들, 가령, 바리새인이라는 존경의 표지, 유대 사람들의 지도자라는 명예로운 호칭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만약 다시 태어나 유대인이 아니게 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끊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근원적인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렇기에 니고데모는 어머니의 태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든, 물이든 성령이든 아니 그 어떤 신묘한 능력이 발휘되어 다시 태어나는 일이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다시 태어남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길에서 어긋난다는 것은 혈통의 순수성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며 살아온 바리새파 유대인 니고데모에게는 어마어마한 도전입니다.


궤도에서 이탈할 때
주저하는 니고데모를 보며 이탈과 어긋남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탈과 어긋남은 분명 부정적 단어입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기 위해선 이전의 삶과 어긋나야 하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서 이탈해야 합니다. 주류의 길에서 이탈하여 빠져나올 때 세상은 우리를 비난하고 조롱할지 모릅니다.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 이들, 다양성을 추구하는 이들을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탈하고 어긋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전의 삶과 다른 새로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김중식 시인의 <이탈한 자가 문득>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뿐이다

한 번도 자기 궤도를 이탈해 보지 못한 별이 그저 제자리를 맴도는 모습을 보며 시인은 일상의 굴레에 갇힌 오늘날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궤도를 이탈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을 발견한 모양입니다. 김중식 시인의 시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시인은 비록 집도 절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이 되었을지라도, 궤도를 이탈해 자기 획을 그을 수 있는 이탈한 자가 진정 자유로운 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탈은 곧 실패로 간주합니다. 남들처럼 살지 못하면 망한다는 공포가 만연합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다는 것, 바꾸어 말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현실과 사회가 규정한 궤도를 이탈할 때 시작합니다. 세상이 제시한 기준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기준으로 사는 삶, 그렇기에 세상의 궤도 속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 곧 다시 태어난 사람은 바람 같은 사람이라고요. 바람은 어떤 기준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누구도 바람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바람의 존재를 분명히 느낍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바람이 되어 세상을 자유로이 다니며 숨을 불어넣는 사람입니다.

물론 익숙한 삶의 굴레에서 이탈하는 삶은 두렵고 어렵습니다. 다시 태어나는 일은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닙니다. 뼛속까지 유대인인 니고데모에게는 아브라함 혈통의 후손임을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 생업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에게는 지휘관으로서의 지위와 권위를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을 박해했던 바울은 이제 주님을 위해 죽기로 결정하는 일이었습니다. 모두 익숙하고 당연했던 자기 삶에서 이탈하고 어긋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탈과 어긋남을 통해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복음은 이탈한 자들을 통해 세상에 전해졌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에서 이탈하고 어긋난 자들은 세상으로부터 공격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당연하다 여겨온 근본적인 토대에 질문을 던지고 의문시하며 그에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소유, 권력, 정의에 대한 근본적 물음은 세상의 방식에서 이탈하고 어긋난 자들이 던질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오늘 읽은 복음서 말미에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요한복음 3장 16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과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셨고,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우리를 멸망하지 않도록 지키신다는 고백입니다. 이탈해도 괜찮습니다. 계획했던 삶에서 조금 어긋나도 괜찮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냅시다. 산을 향하여 눈을 듭시다. 산으로 걸어 들어가기 두려워하지 맙시다. 
밤의 순례길을 시작한 니고데모는 이 암담한 산맥을 과연 통과했을까요? 답을 미리 말씀드리자면 그는 통과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니고데모는 훗날 주님을 공격하는 바리새인들과 맞섰고(요 7:52),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주님의 시신을 수습해 무덤에 안치하는 일을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밤의 순례길을 지나 빛의 세계로 걸어 나온 사람입니다. 사실 이미 그 가능성이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장 21절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1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사랑하는 청년여러분, 니고데모는 고민하고 괴로웠으나 밤의 순례길을 뚜벅뚜벅 포기하지 않고 걸어갔습니다. 그가 주님의 부활의 빛을 한껏 누렸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밤의 순례길을 걷고 계신 청년 여러분, 우리의 길은 분명 어둡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발을 헛딛지 않도록 지키시며 그늘이 되어주시니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리고 함께 이 여정 끝에 계신 주님께 나아갑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