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신앙에 관하여

<신앙의 논리: 그리스도교 신학의 넓이와 깊이> 설명, 4장 계시의 신비 2

by 청파비둘기 2024. 9. 27.

2.
그러나 근대가 시작될 무렵부터 나타난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 가운데 오늘도 울려 퍼지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려 노력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 맞는지, 하나님의 계시가 맞는지에 대한 문제에 골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쉽게 이게 하나님의 계시인지 누가 알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빠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근대에 이르러 이 문제를 확실성의 문제 또는 실증성의 문제라고 부릅니다. 도대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노래하시는 음성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아침에 태양이 뜨는 것을 보고 나를 위한 회복의 빛이라고 도대체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뜻이 무엇이고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등등의 문제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 책을 다루며 주제로 삼고 있는 신비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신비를 어떻게 알 수 있고 확신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확실히 아는가? 매킨토시는 그리스도인에게 깊은 차원의 앎이란 실증적 지식의 차원으로 아는 것과 결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앎이란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품었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계시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은 바꾸어 말해 계시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상호적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두 항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상호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부터 하나님, 곧 신적인 존재와 인간 사이에는 이러한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 상당한 설득력이 있고 존재했습니다. 절대적인 분과 유한한 인간 사이에 상호작용은 물론 서로 사랑이 가능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들은 신과 인간 사이에는 일방적인 관계만이 있으며 그마저도 신이 원하지 않으면 관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고대의 그리스 철학이 이러한 자장 안에 있습니다.

중세에 이르러 이러한 흐름이 더욱 도드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활동과 말씀하심을 인간이 이해할 수 없으며,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드러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영향은 생각보다 강력해서 후대의 신학적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인 타자로 상정하고 인간의 편에서는 하나님의 어떠한 것도 인지하고 감각할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문제는 인간이 자신의 정신과 감각으로 하나님을 인지하고 알 수 없게 된다고 믿을 때,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때 우리의 앎이라는 능력은 하나님을 아는 데 사용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앎이라는 능력은 하나님과 거대한 자연 세계, 계시, 정신의 영역, 나가서 타자에 대해 알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대신 앎은 사적인 부분으로 축소됩니다. 자연을 안다는 것,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 하나님을 알고 사랑한다는 것은 이제 인간의 정신과 능력 바깥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기서 안다는 것은 사랑하고 인격적으로 교감함을 의미합니다. 근대의 사상가들은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는 것이 불가능하고 사랑하지 못하면 자연에 대해 정신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알고자 했을까요? 매킨토시는 해부와 분석, 그리고 공식화 방법으로 이것들을 정립하고자 했다고 평합니다. 

16, 17세기, 이른바 합리의 시대에 이르자 사람들은 하나님의 현상, 계시를 끌어안기기보다는 실험대 위에 놓고 분석을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 신학자들이 믿음, 성경, 하나님을 완전히 무가치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바꾸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은 여전히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다만, 합리의 영역에서 이것들을 잘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이들은 느낀 것입니다. 신화적인 요소들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언어로 재신화화 할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의 출연이 시작된 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말에는 정말 크고 넓은 함의가 있습니다. 또한 자유주의는 규범 언어가 아닙니다. 좋고 나쁘고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논의가 여기에 있지 않으니 이 정도로 언급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와 그분의 언어가 명쾌하게 이해되지 못하는 것은 비단 오늘날의 문제가 아닙니다. 1세기에도 그랬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사는 세계에 하나님의 뜻이 가득하다고 믿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완벽하게 정리된 매뉴얼을 따라 선교에 임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힘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일깨우셨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계시는 측량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의 길로 들어설 때, 내가 죽지 않고 살아야겠다, 없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될 때 계시는 일어납니다.

 



3.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매킨토시는 계시의 성격을 설명하면서 '사건이면서 동시에 상호적'이라고 말합니다(매킨토시는 정말 상호성을 이 책의 주요 논지로 삼고 있습니다.). 계시란 분명히 어떤 시점에, 느닷없이 일어나는 사건의 특성을 보입니다. 그러나 계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자연을 통해, 이웃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리고 계시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변화를 끌어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받은 우리가 이전의 삶과 같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계시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변한다는 점에서 계시는 상호적입니다. 우리의 삶은 상호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계시를 사건으로만 인식하길 좋아합니다. 

계시가 사건이며 상호적이라는 말은 계시가 정말로 일어났음을 확증해주는 역할도 합니다. 오랜시간 계시가 정말 계시인가? 계시가 일어났는가? 일어났다면 알 수 있는가에 대해 중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실증적으로 접근했지만 한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계시의 상호성이라면 우리는 확증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삶의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계시를 경험한 우리는 인격적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유욕과 정욕에 휩쌓여 살던 우리가 타자를 향해 마음과 지갑을 열기 시작합니다. 예배당의 십자가가 전과는 다르게 느껴집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계시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 주변에 영향을 미칩니다. 상호적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계시가 객관적인 사실이냐 주관적인 고백이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계시란 이천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 여전히 오늘날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역사적예수가 정확히 구현된 그 시절의 예수냐 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학문적 토론의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가 사신 삶의 의미를 이천년 전에 태어나 한 시절 살다가 이천년 어느 시절 세상을 떠난 이야기로 제한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시고, 온 인류의 그림자를 걷어내신 것, 육신을 입고 우리 삶으로 들어와 우리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죽음의 문제까지 끌어 안으셨음은 시공간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계시란 시간과 장소에 갇힌 사건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상호적 사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시가 단순히 역사적이냐, 객관적이냐, 주관적이냐를 떠나서 상호적인 사건이라면, 최종적으로 계시는 개인은 물론 공동체적 사건입니다. 교회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실천들은 계시를 드러내는 표시이자 증거가 됩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서로를 상호 돌보는 행위는 예수께서 사신 모습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역사 속의 예수가 어떤 행동을 했다, 안 했다, 등으로 제한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여전히 우리 세계에 존재하고 우리가 예수의 삶을 기억하고 실천하고 적용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내가 사랑 받는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고 나 또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음을 아는 것은 삼위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는 길이며, 계시의 통로가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중요합니다. 

교회의 필요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교회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성경과 교회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 주장에 반대하는 분들이 분명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인 교회는 말씀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실천하길 애쓰며 자기 개인의 삶과 가족, 그리고 사회 속에서 그 뜻을 드러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역할의 핵심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실현하는 몸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