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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에 관하여

<신앙의 논리: 그리스도교 신학의 넓이와 깊이> 설명, 2장 삼위일체의 신비

by 청파비둘기 2024. 8. 12.

1.
<신앙의 논리> 두 번째 장,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겠습니다. 1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비가 무엇인지, 그리고 신비를 만나게되는 단계들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신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보여주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합니다. 신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여전히 어제와 같지만,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의 오늘은 어제와 같을 수 없습니다. 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신비는 우리 주변 어느 곳에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장엄한 경험, 고통스러운 경험, 잔잔한 경험 등등 우리의 일상이 마주하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신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비는 하나님의 세계를 만나게 되는 일종의 문입니다. 가장 좋은 예로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을 들 수 있습니다. 평범한 옷장의 문을 열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나니아로 들어가게 됩니다. 조건은 단 하나, 옷장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을 통해 우리는 바깥 세상에서 안쪽 세상으로, 일상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신비를 이해하는 첫걸음입니다.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 C.S.루이스 《 나니아 연대기 》


신비라는 문을 통해 안쪽 세상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한 첫 번째 사람들은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 그 신비의 문이 열렸다고 확신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알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성부 하나님 곁으로 올라가시고 난 후 성령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어렴풋하게 알던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신비의 세상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나누며 기쁨을 만끽했고 성찬을 반복하며 주님을 기억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전 가르침들의 진위를 선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신비의 문을 열고 들어간 제자들은 자기들의 스승인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하나님과 친밀한 분임을, 하나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계셨던 분임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온 인류의 구원을 가능케 하시는 분임을, 한마디로 예수가 곧 하나님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1장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깨달음은 학습이나 공부를 통해서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 결정적입니다. 제자들은 성령께서 믿음의 눈을 뜨이게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자 제자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확실히 알게 되었고, 성령의 힘으로 이 깨달음을 세상에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제자들은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끌린다는 말이 제자들을 수동적으로 만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의 손길을 따라 이들은 적극적으로 살았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심지어 목숨이 위협받는 순간까지도 말입니다. 예수께서 특별히 아끼셨던 고아와 과부 또한 잊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먹을 것도 부족함에도 말이지요. 성령의 이끌림에 자기 삶 전부를 바쳤던 가장 좋은 예시가 사도 바울입니다. 성령은 지속적으로 성부 하나님에 대해 성자 예수님에 대해 제자들을 가르쳤고 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를 온전히 알게된 제자들은 자기들이 경험하고 있는 이 놀라운 기쁨을 가둬두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쁨은 너무나 크고 넘치는 것이었기에 주변에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점은 제자들이 아니었던 사람들, 생전에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 혹은 예수님의 말씀에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조차 이 기쁨에 반응했습니다. 이 기쁨이 얼마나 아름답고 따스했는지 사람들은 지위고하, 혈통과 민족적 차이를 막론하고 이 공동체로 끌려 들어왔습니다. 왜일까요? 이 공동체 안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아름다운 교제가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그 외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이끌리심으로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교 공동체, 곧 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교회는 따라서 삼위일체 신비의 기쁨을 경험한 이들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그 자체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예가 됩니다. 이 공동체에 입회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 고백은 간단해 보였지만, 그것이 만들어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습니다.

2.
그렇다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원들은 삼위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바로 여기에서부터 삼위일체 이해의 어려움이 나타납니다. 아주 초기의 교회에서부터 다양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가면을 쓰고 오늘은 성자로, 내일은 성부로 나타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교회의 오랜 노력으로 이런저런 오해들은 교정되고 수정되었습니다(물론 이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으나). 매킨토시는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이 삼위의 하나님을 '상호 관계'로 이해했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해되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체득되었다는 말이 조금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초창기 그리스도교인들이 고도의 학문 연구를 통해 삼위 하나님 개념을 정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기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상호 관계란 이렇게 이해하고 체득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기 조상들(유대민족)을 선택하시고 지키셨던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해 자신을 전적으로 세상에 내어 주셨습니다. 이를 타자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기쁘게 타자화하셨습니다. 이 기쁨의 자기 내어줌을 오롯이 드러내신 분이 바로 성자 예수님이라고 교회는 생각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불의한 세상에 자기를 내줌으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기쁨의 내어줌과 받음은 성령님께서 함께하심으로 가능했습니다. 이 성부, 성자, 성령의 기쁨의 관계는 분리되지 않으면서 뒤섞이지도 않습니다. 오랜 시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명제를 소중히 여겼는데, 이 진술 안에서 삼위 하나님의 관계성이 잘 드러납니다. 사랑을 주는 이로서의 성부, 사랑을 받는 이로서의 성자, 이것을 기뻐하는 이로서의 성령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관계로 이해하게 될 때 세 별개의 인격이 서로 떨어지지 않으면서 각각의 역할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3.
하나님을 상호 기쁨과 사랑의 관계로 인식했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어떤 변화가 나타났을까요? 사실 삼위일체를 공부하고 이해하고 비교적(?) 익숙해진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게 되고 우리의 신앙과 인격이 월등하게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과 인격은 하나님을 아는 방식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됨을 부정하긴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하고 아는 방식에 따라 우리의 신앙 색채와 인격적 특성은 달라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때, 또 <신앙의 논리>가 주목하는 삼위 하나님의 관계성에 주목할 때,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본래 계획과 목적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자, 그러면 다시 한번 삼위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뜻을 온전 알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서 사역하고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도 성령의 도움을 받아 시련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금 확증합니다. 이 상호 관계는 예수의 자기 정체성을 오롯이 드러내게 만듭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제자들과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따르며 주님의 길을 걷고자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믿을 때, 예수께서 그러셨던 것과 같이 우리 또한 우리가 지어진 이유와 목적, 사명을 온전히 알게 됩니다. 즉,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본래 지녀야 했던 우리의 인격체가 어떤 보습이어야 하는지 드러냅니다.

삼위 하나님의 대가나 이자를 바라지 않는 사랑의 자기 내어줌이 우리가 닮아야 할 본래의 우리 모습임을 자각할 때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사랑 없는 세상인지, 나 자신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사랑의 관계에 들어감에 따라 우리의 어둠을 보게 되는 일종의 신앙적 역설을 경험합니다. 이를 죄라고 말해도 좋겠습니다. 이 세상은 죄로 물들어있습니다. 세상은 사랑에 실패합니다. 관계가 모두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정리한 내용을 토대로 말하자면 이 세상은 하나님 사랑의 자기 내어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오히려 거부하는 세상, 곧 죄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와 인간의 죄 사이에는 닿을 수 없는 간극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관계 안으로 우리를 끌어안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조차 갖지 못합니다. 이 거대한 단절을 깨부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자기희생입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끌어안고 사랑의 관계에 동참시키기 위해 그 손을 뻗으셔서 우리 세상으로 침입해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말할 수 없는 대가를 치르면서 말이지요. 이는 성자 예수님의 독단적 결단이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모두 십자가에 참여하셨습니다. 성부는 아들을 죽음에 내어준 커다란 슬픔을, 성자는 십자가에서 성부와 단절되는 슬픔을, 성령은 이 모든 것을 이뤄낼 수밖에 없음에 대한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무한히 자기를 내어준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4.
삼위 하나님은 사랑의 상호 관계이자 죄의 세상에 갇힌 우리를 끌어안기 위해 무한히 자기를 내주셨음이 이해가 되는지요? 쉽지는 않습니다. 다만 삼위일체 이해가 쉽기만 했다면 교회의 역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납작해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삼위 하나님께서 개별로 각각 존재하는 분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는 개별성에 더 익숙합니다. 명료함을 지식의 높은 가치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은 개별성이 아니라 상호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호 관계성으로 하나님을 인식해야 하나님의 유기적 일체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상호 관계성(개별성)과 유기적 일체성이 어떻게 등식이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식은 수학적이기보다 관계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조금 익숙한 다른 말로 인격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은 무한히 자기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그 복잡성을 서로 끌어안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로 자기 사랑을 완성하십니다. 십자가 사랑으로 삼위 하나님은 완전한 일체, 승리의 일체가 됩니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이해한 관계로서의 삼위 하나님이자 한 분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 이해입니다. 이 관계성을 깨달아가며 각자 자기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이해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으로 자기를 내어주신 하나님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세상이 얼마나 불화로 얼룩진 곳인지, 죄로 가득한 세상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그림자로 가득한 불화의 세상에 하나님의 조화를 꽃피우는 일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며 가르쳐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됩니다. 이 일은 마지못해하는 일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자기 사랑의 관계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시는 그 마음을 우리도 동일하게 갖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이처럼 어둠에 물들어 있는 상태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자들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매킨토시는 오늘날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인식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정말 많은 대답이 가능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를 명징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지각 있는 신앙인이라면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정확히는 내 욕망을) 얻어 내기 위한 거래가 아님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성자 예수님과 사랑의 친교를 나누고 계신 성부 하나님께 말을 거는 것입니다. 대화를 요청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과 의지로 아버지께 말을 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기도하게 하는 분은 바로 성령님입니다. 우리는 그저 성령님의 도우심과 이끄심에 기대어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성령을 따라 기도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은 친밀한 관계를 이루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때때로 우리의 기도가 어린아이같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달라는 때 부림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기도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 또한 기도입니다. 어려운 질병에 고통받는 그리스도인은 낫기를 위해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천국 바깥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떨어진 곳에서 큰 소리를 불러야만 겨우 목소리가 닿을락 말락 한 곳에서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천국 안에서, 하나님의 친교 관계 안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미 하나님 안에서 드려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발은 세상을 터하고 있지만,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 품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기도를 두려워할 필요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에 초대된 사람들이고 삼위 하나님과 대화의 기쁨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리합니다. 삼위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하는 길은 대단히 어렵고 복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관계 안에 들어와 있음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삼위 하나님은 서로를 내줌으로 일치를 이룹니다. 죄에 물든 우리를 끌어안기 위해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를 끌어안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과 희생으로 하나님의 관계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야 할 책임 또한 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음 장에서 우리는 바로 그 어둠의 공간, '세상'에 대해 생각합니다. 세상은 처음부터 어둠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한 의지로 세상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