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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계시의 신비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먼저 계시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야겠습니다. 영어로는 revelation, 드러내 보이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계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신에 의해 혹은 신적 힘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드러나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을 계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계시란 어렴풋이 알던 것이나 감추어져 있던 중요한 어떤 내용들이 신의 힘으로 말미암아 드러나서 우리가 깨닫고 이해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길동무 삼고 있는 매킨토시는 자연 세계의 질서와 규칙,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여러 모습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 창조의 신비를 다루며 이해했듯, 하나님의 뜻으로 창조된 이 세계는 하나님의 충만함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으며, 우리 인간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신비로운 뜻과 은총을 맛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밤하늘의 별, 아름다운 석양, 파도가 만들어내는 불규칙하면서도 정돈된 소리 등등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축복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계시가 됩니다. 따라서 창조 세계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는 "성사적 징표"가 됩니다.
여담을 잠깐 나누겠습니다. 며칠 전 저의 가까운 친구와 식사 하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제 지인은 최근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었고 그로 인해 불면에 시달렸다고 말했습니다. 잠을 자지 못한 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 거리로 나왔는데, 별이 떠 있고 이윽고 태양이 떠오르더랍니다. '나는 이렇게나 괴로운데 아침의 태양은 저리도 무심히 떠오르는구나'라는 생각에 잠겨있을 때 문득 그의 생각이 이렇게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지금 태양을 떠오르게 하셨구나. 아침을 주셨구나. 새 날을 주셨구나. 나를 오늘도 살게 하셨구나!'
짧은 고백이지만 이는 아름다운 계시적 체험입니다. 아침에 해가 뜨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 아닙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워 별 성찰적 가치조차 없는 일이지요. 게다가 하나님께서 해를 뜨게 하신 이유가 저의 친구 때문이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지요. 그저 지구가 태양을 돌며 밤이 낮이 된 것 뿐입니다. 하지만 제 지인은 자연의 당연한 진행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일상의 아침 태양이 그에게 너를 지키고 있다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은총의 음성이였습니다. 그는 그날 아침 햇빛을 바라보며 계시를 본 것입니다. 그날 아침의 태양은 적어도 제 친구에게 하나님의 성사적 징표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창조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계시하는 곳은 바로 당신께서 창조한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인간을 포함한) 만드실 땐 단지 구현된 물질로서 만들지 않았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각각 자기 형태 안에 당신의 뜻과 마음을 집어넣으셨습니다. 게다가 인간을 만들 때는 당신의 형상을 닮아 손수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창조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내뿜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태양과 별과 물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 보일 수 있습니다. 제 지인에 쏟아진 그날 아침의 태양은 단지 천체물리학에서 증명하는 태양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태양이었습니다. 태양과 제 친구 사이에 하나님의 계시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매킨토시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계시를 드러내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자 도구로 여깁니다. 주목할 것은 단지 물리적 자연 세계만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현실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계시를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계시가 초월적인 어떤 이공간 속에 기묘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환상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과 현실 세계와 맞닿아 있다는 뜻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은 이러한 이해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의 원리에 따라 작동된다고 믿었습니다. 어떤 현상과 변화에서 하나님의 뜻을 성찰하길 주저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요한복음서가 말하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신비로운 뜻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말씀은 고도의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아주 익숙한 말씀이었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세상의 물질인 육신에 임함으로 그 육신의 세계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구현해 낼 수 있게 됨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육신은 이제 하나님의 생명을 담은 그릇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 보이는 계시의 도구들(성사)이라면 가장 탁월한 도구는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인간입니다. 인간은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으며 인격과 감정, 자유의지를 비롯해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단지 천체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역할을 했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의 계시를 가능케 할까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전하는 이로 살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나의 것을 포기할 때, 손해를 감수할 때, 세상과 타자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우리의 힘이 아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드러나는 일이며, 이는 바꾸어 말해 계시의 도구로서 우리가 사용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고 특별하게 사용하길 원하셨습니다. 인간에게 마음과 지성을 주시고 감정과 감각을 주심으로 당신께서 창조한 세상이 노래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감지하도록 하셨고, 감지한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 세상을 하나님의 뜻이 가득하게 하도록 특별히 부르셨습니다. 인간은 지성과 감성을 모두 활용하여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율을 알아채고 그 아름다움을 악보에 옮겨적어 세상에 공유하길 원하셨습니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창조된 모든 것 가운데 인간이 유일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별은 아름답게 빛나지만 그 안에 인격은 없습니다. 비인격적인 빛입니다. 바람이 부는 이유는 나를 시원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긍휼에 기인하지 않습니다. 그냥 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타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압니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진짜로 할 때 우리는 계시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감지해 낼 수 있습니다. 태양과 별과 바다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곳, 바로 타자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또한(내가 싫어하고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지으셨으며 말씀으로 빚어진 존재임을 말입니다. 그렇게 발견한 사랑을 표현하고 다시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 드립니다. 타자를 비롯한 세상을 아끼고 보듬으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본래 지어진 그 모습 그대로를 지키도록 우리는 노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킨토시가 보는 계시란 일방적으로 하늘에서 주어지는 모습이 아니라 창조 세계에 드러난 당신의 사랑을 깨닫고 표현하는 것, 즉 상호적 사건입니다. 인간은 이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매킨토시는 계시를 일방적으로 상영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계시란 영화나 공연이 아닙니다. 관객들이 침묵을 지키며 가만히 공연을 보다가 적당한 때에 박수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들의 놀이터라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불규칙하지만 신명 나게 뛰어놀고 새로운 친구를 환영하고 집에 가는 친구에게 인사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내는 그런 놀이터가 계시를 보여주는 좋은 비유입니다.
계시란 하나님과 세상, 자연, 그리고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이란 점에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품고 있고 그것을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인간은 창조 세계(타인을 포함한) 안에서 그 뜻을 간파하고 감지할 수 있지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진술 모두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을 다시 세상에 전하여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인격이 서로에게 서로를 사랑으로 내어주듯 상호 교류하고 소통하는 관계입니다. 이것이 계시의 신비입니다.
이를 조금 응용하면 죄에 문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죄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일을 게을리하는 것, 왜곡하는 것, 타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워버리는 일을 말합니다. 세상이 뿜어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고 타자들이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것이 계시라는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죄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애를 써왔습니다. 죄를 멀리하고 자기 거룩함을 지킴으로 세상 속에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지했고,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미움보다 사랑을 택하고 파괴보다 창조를 선택했습니다.
이때 인간은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 계시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 보고 느끼기보다는, 이 계시처럼 보이는 현상이 계시가 맞는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되는 이것이 음성이 맞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근대성의 문제가 출현하게 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 계시에 대한 인식, 예수에 대한 인식들에 커다란 도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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