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마크 A. 매킨토시의 <신앙의 논리: 그리스도교 신학의 넓이와 깊이>를 설명합니다. 한 시간 강의로 담아내기 어려웠던 내용들,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던 부분들, 그리고 이해를 돕는 조금 더 쉬운 예시를 담았습니다. 길지 않은 분량으로 설명할 예정입니다. 설명 원고를 먼저 읽으시고 <신앙의 논리>를 읽으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1.
그리스도교 신앙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리스교 신앙과 신앙 요소들에 대해 말하거나 쓰고자 할 때 우리는 막막함을 느낍니다. 그럴 일은 거의 없지만 누군가 우리에게 믿음이 뭐야? 라고 물으면 우리는 별안간에 말문이 막히고 말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신앙에 대해, 신앙의 요소에, 대해 신앙의 구조에 대해 적절히 설명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유용한 도구가 있습니다. 바로 ‘신학’입니다. 매킨토시는 <신앙의 논리>가 신학을 말하는 책이라고 정의합니다.
신학이라고 했을 때, 자연스러운 연산으로 신학교, 목회자, 어렵고 지루함, 무쓸모 등등의 단어가 나열됩니다. 언급한 것들이 신학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신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단지 신학이 파생시키는 명사들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은 명사라기보다는 동사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신학 공부를 비유적으로 ‘신학함(doing theology)’라고도 합니다. 신학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 예수께서 남기신 말씀의 의미를 파악해 가는 일, 역사 속에 교회가 기록하고 보존하고 남기려 했던 이유와 의미를 계속해서 곱씹는 일이기에 신학은 매우 유동적이고 활력있는 활동입니다. 다채로운 신학적 활동을 한데 아우르면 신학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신비‘를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도구입니다.
그렇다면 신비는 무엇일까요? 신학이 신비를 비춰주는 도구라는 의미는 또 무엇일까요? 먼저 우리의 선입견을 제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 말장난 같지만, 신비는 신비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비는 몽환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초현실적인 어떤 현상 또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학에서 말하는 신비는 이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습니다. 신비란 오히려 일상의 익숙함에서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매일 오가는 동네 골목길이 있습니다. 지도 앱을 켜지 않고도 우리는 이 길을 오갈 수 있습니다.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아침 학교 가는 길 골목 담벼락에 핀 작은 민들레를 보았습니다. '여기 이렇게 고운 꽃이 피어있었네! 고와라!' 사진을 찍고 기록하고 각자의 소셜미디어에 감상평을 적어 친구들과 공유하고 싶어 합니다.
익숙한 공간에서 경험한 낯선 경험, 우리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이 경험이 신비입니다. 담벼락 아래 작은 민들레 한 송이가 우리 눈에 쉽게 띄지 않았던 것과 같이 신학이 말하는 신비의 대부분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천 년 전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활동하실 때 사람들은 예수를 보았지만, 그분이 무슨 의미를 지니신 분인지 몰랐습니다. 예수와 함께 여행했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지요.
신비의 깨달음이 일상의 소소한 순간에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삶의 불청객인 극심한 고통이나 난데없는 사고, 좋았던 관계의 단절,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들의 배신과 같은 어두운 순간이 있습니다. 드문 일이지만 이 또한 우리의 일상입니다. 기억할 것은 이 고통스러운 순간, 신음밖에 할 말이 없는 시간 속에도 신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그림자에서 눈을 돌리고 싶습니다. 고통스럽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가 용기를 짜내어 고통의 순간을 바라볼 때 슬픔 속에서 의미를 찾기도 합니다. 정리하자면 신비란 우리의 일상, 그것이 소소한 기쁨이건 장엄한 체험이건, 쓰라린 아픔이건 우리의 일상에 신비는 감춰져 있고 이 감춰진 신비가 드러날 때 우리는 삶의 다른 차원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신학 혹은 신학함을 통해 우리는 일상에 감춰진 신비에 감응할 수 있게 됩니다. 신비에 반응한다는 것은 곧 일상 속에 감춰져 있었지만,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던 하나님의 뜻과 계획 그리고 그분의 마음과 접속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신비와 연결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맥락을 얻게 됩니다. 풍성한 맥락을 갖게 되면 더 풍성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2.
일상 또는 익숙함이라는 커튼에 가린 의미를 찾는 일이 신비라면(아침 창가의 커튼을 치면 창밖의 풍경이 환히 보이듯) 그 신비를 알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맥킨토시는 신비를 발견하는 세 가지 순간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다르게 보기입니다. 다시 민들레 이야기를 떠올려 봅시다. 우리 집 골목길 어느 후미진 담벼락 아래 피어난 민들레를 보고 우리는 이 작은 생명이 주는 기쁨을 경험합니다. 아마 이 경험은 아주 모질거나 공감 능력이 0에 가까운 이들이 아니라면 공히 느끼는 바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서 조금 다른 의미를 도출합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피어난 노란 민들레를 보며 신앙인은 자연스럽게 '창조'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분이 맞다는 생각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창조 세계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라는 맥락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창조의 맥락을 갖게 되었고, 작은 생명을 보며 창조의 신비와 기쁨에 공감하게 됩니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 봅시다. 정신없이 출근 준비를 마치고 전철역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간신히 시간을 맞출 줄 알았는데 어쩐지 열차가 오지 않습니다. 그때 방송에서 이런 멘트가 나옵니다. '지금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불법 시위로 열차 운행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플랫폼에 모인 사람들이 갑자기 하나가 되어 엄한 말을 쏟아냅니다. 우리도 화가 나고 짜증이 치밀어 오릅니다. 하지만 마음 한쪽 편에서 또 다른 음성이 들려옵니다.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 마음속에 두 음성이 충돌하고 싸움을 벌입니다. 누가 이겼는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문제는 두 번째 음성이 들려서 마음에 갈등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시위로 전철이 지연되는 상황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 것이지요. 다르게 보게 한 맥락은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신학은 우리 삶의 배경과 일상의 시간이 하나님의 삶과 하나님의 시간이 겹치게 만들고, 그 겹친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이(성경에 기록된) 우리에게 새로운 해석을 '강요'하게 만듭니다. 강요라는 단어가 불편함을 주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신비의 빛이 우리의 일상을 비추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해석을 강요당합니다. 출근 시간이 늦어 화가 나지만 장애로 평생을 고통 받아온 사람들의 괴로움이 강력하게 비집고 들어옵니다.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리는 직장 상사가 끔찍이도 싫지만, 저 사람도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는 이해의 마음이 내가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쏟아져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맥락 위에 서게 될 때 나를 둘러싼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이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된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신비의 첫 번째 순간입니다.
둘째, 삶의 습관으로서의 신학입니다. 습관은 힘이 셉니다. 다른 말로 습관을 고치거나 변경하기 매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는 밥을 빨리 먹는 습관이 있는데 벌써 수년째 천천히 먹기를 올해의 목표로 삼았지만 지금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킨토시는 신학/신학함을 마음의 습관으로 익힐 것을 강조합니다. 앞서 일상에서 신비의 순간을 만나게 되는 경우를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신비와의 조우가 일생에 한두 번 일어날까 말까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맥락에 접속하려는 의지와 습관이 길러진 사람은 삶의 작은 순간 속에서도 신비를 발견합니다. 그 사람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신비를 향해 눈과 귀가 조금 더 열려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신비를 향한 좋은 습관이 길러진 사람들은 세상의 냉랭하고 무감각한 세상과 달리 마음이 유연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물론 이 습관을 기르는 일은 어렵습니다. 어쩌면 평생 걸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신앙도 성숙하기에 신비를 감각하는 우리의 눈과 귀와 촉감 모두 성장할 수 있습니다.
셋째, 대화로서의 신학입니다. 대화는 관계에 따라 밀도가 달라집니다. 서로 깊은 공감대를 형성한 사이에서 나누는 대화의 폭과 깊이는 남다를 것입니다(이 책의 부재가 그리스도교 신학의 넓이와 깊이이기도 합니다). 대화와 관계는 <신앙의 논리>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지만 삼위일체의 신비를 논함에 있어 맥킨토시는 관계와 대화를 핵심적으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논리>에서 삼위일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성부와 성자는 서로 지극한 사랑의 교감 안에서 대화한다. 성령은 이 둘 사이에서 기뻐하며 우리를 그 대화의 장으로 초대한다. 대단히 어려운 문장입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다음 장인 삼위일체의 신비에서 더 자세히 설명할 예정이기 때문에 간략히 언급하겠습니다.
구약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기 뜻과 사랑을 세상에 보이기 위해 특별한 예시의 민족으로서 아브라함에서 시작되는 민족, 곧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물론 온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죄의 길로 빠졌습니다. 그리고 복음서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오셔서 완전히 단절된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회복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회복이 가능했던 이유는 성부이신 하나님과 성자이신 예수님 사이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했고 아들은 아버지를 무한히 신뢰했습니다. 둘이자 하나인 성부와 성자는 서로를 깊이 사랑했고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서로를 확증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제자들과 갈릴리의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제자들과 사람들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대화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고깝게 여겼던 이들은 오해 수준이 아니라 곡해하고 음해했습니다. 슬프게도 예수는 자기가 한 말 때문에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을 살려내셨고 아들은 부활하여 사람들에게 몇 가지 말씀을 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대화의 맥락을 파악하게 되었고 그 내용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점, 부활하시어 하늘로 가셨지만, 곧 다시 오시리란 점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스스로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깨달음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 나눈 대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맥락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비로소 우리(또는 교회)는 성령의 초대를 받아 성부와 성자의 대화 안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성령의 도움으로 하늘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시는 것들을 우리가 스스로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과 같습니다. 물론 매 순간 성령의 도움이 있어야 하지만요. 동시에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께 대화를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고민을 털어놓고 아픔을 고백하고 기쁨을 공유할 수 있게 됩니다. 이 행위를 다른 말로 기도라고 합니다.
1장을 정리하겠습니다. 신비는 일상(그것이 사소한 순간이던, 장엄한 순간이던, 고통의 순간이던)의 틈을 헤치고 들어옵니다. 그렇게 쏟아진 신비의 빛은 우리가 익숙하게 여겼던 혹은 불편하게 여겼던 세상의 원리와 사람들을 다르게 보게 만들어줍니다. 그들도 창조주의 자식들임을 말이지요. 이 과정은 단번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습관을 들여야 하는 일입니다. 힘들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하나님과 대화를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음 장에서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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