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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에 관하여

<신앙의 논리: 그리스도교 신학의 넓이와 깊이> 설명, 3장 창조의 신비

by 청파비둘기 2024. 8. 25.


1.
매킨토시의 <신앙의 논리> 세 번째 설명입니다. 창조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3장에서 매킨토시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음을 믿는다'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후 매킨토시는 그 의미를 차근차근 풀어가는데, 형이상학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다면 다소 어렵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 형이상학의 초보적인 이해 가운데 '개체'를 다루도록 하겠습다.

철학에서 개체란 단일하고 독립적인 통일적 존재를 가리킵니다. 이 통일된 존재는 물질적, 양적 측면을 모두 포함하고 정신적이고 질적 측면도 포함됩니다. 가령, 개체란 한 마리의 개를 가리키기도 하고,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집단 개념은 물론 사랑이나 믿음 같은 정신적 측면도 가리킵니다. 철학에서는 오랜 시간, 이 개체가 무엇이고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오랜 논의가 있었습니다. 개체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데,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만 조금 다뤄보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개체를 질료와 형상의 복합체로 이해합니다. 가령 개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개라는 개체는 개를 구성하는 질료, 털, 근육, 피, 뼈 등등 이런 질료들과 개라는 형상이 합쳐져서 개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형상은 그 사물이 사물되게끔 만들어주는 필수적이고 본질적인 원리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개가 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개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어렵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지나가다가 네 발 달린 동물이 우리 옆을 뛰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칩시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그 동물을 보고 '어, 귀여운 개 한 마리가 지나가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동물을 개라고 직관한 이유는 그 개의 동물학적 특성들을 보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개라면 응당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소들이 있음을(개의 모습, 털, 행태, 짖는 소리 등등) 보고 아는 것이지요. 설사 종이 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크셔테리어, 불도그, 진돗개 등등 아무리 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우리 앞을 지나가도 우리는 모두 개라고 부릅니다. 개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개체에 대해 염두에 두어야 할 것 하나는 모든 개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연적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와 여러분들이 청파에서 만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제가 태어난 것도 우연입니다. 저는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사람으로 존재하지만 제가 존재하게 된 것 자체는 우연입니다. 저는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개체는 이렇듯 우연적(철학적 표현으로 우유적)입니다.

정리하면 세상에 어느 '개체'가 '존재'하려면 그 개체의 형상, 즉 필수적인 원리나 구조, 요소들이 있어야 하고, 이 형상을 세상에 구체화하고 특정하게 만들어주는 질료(다른 말로 매체)가 합쳐져야 합니다. 자, 그러면 애초의 문장,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분이다'의 맥락이 구체화 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혹은 존재하려면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구성하는 질료가 있어야 합니다. 형상과 질료가 복합되면 하나님이라는 개체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존재는 다른 개체들과 마찬가지로 우연적인 결과입니다. 여러분, 어떠신지요? 무언가 덜컹거림이 발생하지요?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난 세기의 무수히 많은 신학자와 신앙인들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개체로 존재할 수 없는 분임을 말이지요.

여기서 창조의 신비의 첫 번째 맥락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 모든 개체를 존재케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존재 위에 계신 분, 개체 너머에 계신 분이며 질료를 필요치 않으며 형상을 파악할 수 없는 분입니다. 13세기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나님을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활동"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퀴나스가 고심 끝에 개체가 아니라 활동이라고 표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잠깐 곁길로 새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개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개체화는 것을 믿음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고백과 다릅니다. 제가 고백이라는 단어를 선택함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우리 삶에 역사하고 계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하나님이 개체로서 세계 내에 존재자의 형태로 계시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는 개체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을 우상화(질료를 가진 개체)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큰 소리로 기도해서 하나님을 움직이고 우리의 뜻(정확히는 욕망)을 실현케 하는 도구로 여길 때 우리는 하나님을 개체화하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을 돌과 나무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손에 잡히는 개체로 만들어 내 뜻대로 하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인간의 뜻에 따라 조종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신앙의 논리>로 돌아오겠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분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 개체로서 형상과 질료를 갖고 세상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존재의 원천이며 모든 존재가 존재하게끔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형상과 질료를 갖는 분이 아님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개체가 자기들이 본래 지어진 바대로 자기의 생명을 뽐내며 아름답게 피어남을 이끄시는 분입니다.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몸을 이루는 질료와 사람이라는 형상을 지니고 세상에 우연히 존재하게 된 개체들입니다. 그러나 창조 신앙 안에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지만, 필연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닮아가려 애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 신앙의 시작점입니다.

 



2.
앞 장에서 우리는 삼위일체를 다루면서 삼위 하나님이 서로 긴밀한 사랑의 친교를 누리고 계시고, 성령의 도움을 통해 우리가 그 친교의 세계로 초대된다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성부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온 만물과 함께 기쁨을 누리고 싶었지만, 인간은 그 기쁨을 마다하고 어둠으로 숨어 들었습니다. 성부는 성자를 세상에 내려보내 이 문제를 고치려 하셨습니다. 성자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세상에 성부의 뜻을 전했습니다. 세상은 성부의 뜻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나 죄의 문제는 너무나 커서 성부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성부와 성자는 가장 고통스러운 결정을 세상을 위해 내리셨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자는 십자가로 모든 고난을 지셨고 이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어 그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성령은 이 모든 것을 기쁨과 슬픔 안에 공유하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우리에게 이 사랑의 이야기를 증거하고 계십니다.

상호 관계성으로서의 삼위 하나님 이해의 정중앙에 위치한 것이 무엇인지 보이시는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모든 활동과 뜻은 결국 사랑을 세상 가운데 내어 보이기 위함입니다. 온 우주가 만들어진 근본적인 이유가 사랑입니다. 고대 근동 신화에서 세상의 창조는 많은 경우 신들의 무료함과 지루함, 귀찮은 일들을 대신해 줄 존재들이 필요해 세상을 만들고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야훼 하나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지으시고, 자기 형상을 닮은 존재를 만드셔서 그 사랑을 함께 나누길 원했습니다. 고대 근동의 창조 설화와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해보셨는지요?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연인을 만나게 되면 온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비단 연인관계뿐만 아니지요. 암벽 등반을 시작한 사람은 온 세상의 벽과 산이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은유로서의 전환뿐 아니라 실제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인이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가졌다고 칩시다. 결혼은 물론이고 아이가 생기게 되면 온 세상이 바뀌게 됩니다. 단순히 아름다워진다는 의미 이상입니다. 실제 세계가 바뀝니다. 아이를 위해 집안의 물품을 변경하고 구조를 바꿉니다. 두 부부의 일상 스케줄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깁니다. 매우 피곤하고 귀찮은 일입니다. 나의 일상이 뒤틀린다는 느낌도 듭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시작됩니다. 그리고 갓난아기가 본래 두 사람만의 공간에 들어오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설렘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세계를 변화시키게 됩니다. 창조가 이와 같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상호 사랑이 우리의 세계를 바꾸는 것입니다.

매킨토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삼위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뜻이 심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결과로 창조된 존재들 가운데 가장 섬세하고 하나님의 뜻을 가장 많이 구현한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창조된 존재로서 인간은 창조의 섭리를 가장 온전히 구현한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이 창조 세계의 청지기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물론 청지기란 말에 약간의 오해가 있습니다. 청지기라는 말은 단지 창조 세계를 지키는 관리인 됨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인간이 특별한 권한을 갖는다던가 관리 감독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인간이 창조 세계의 청지기라는 말은 사랑으로 지어진 창조 세계 안에서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 가장 많은 사랑을 구현해 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창조 세계의 모습을 본래 지어진 그 모습으로 만들고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는 존재라는 뜻이 바로 창조 세계의 청지기라는 말의 본뜻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인류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구현해 내기는커녕 서로를 미워하고 밀어내고 구분 짓고 짓밟는 데 익숙합니다. 의심하고 질투합니다. 인간 대 인간을 넘어 민족 대 민족, 국가 대 국가 단위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렇기에 전쟁이 창조 질서의 가장 극명한 반대 행위이자 파괴 행위인 이유입니다. 사랑으로 지어진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파괴하고 동료 시민을 억압하는 모든 행위는 창조 질서에 반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를 파괴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파괴하려는 시도와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슬프게도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 피조물은 그 존재로서 사랑의 창조 행위를 반복하고 아름답게 피워내고 있습니다. 시절을 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계절은 아름답게 변합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그 모든 순리를 거스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에서 죄라고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거부하고 부서뜨리려는 욕망입니다.

서로를 억압하고 파괴하려는 어두운 마음이 창조 세계의 본래 목적이 절대 아닐 것입니다. 이것들은 창조 세계의 본래 모습에는 없던 것입니다. 피조 세계는 본질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교제와 친밀한 사랑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실은 인간도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잘 보지 못하는 것뿐이지만요.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피조된 존재로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자각하게 되면, 다른 말로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 알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전달하는 존재가 됩니다. 앞서 얘기한 창조 세계의 청지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존재임을 깨닫고 나면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상이 얼마나 뒤틀려있는지 보게 됩니다. 나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내 옆의 존재가 자기의 본모습을 알지 못한 채 어둠 속에 신음하고 있을 때 우리는 당신도 사랑으로 피조된 존재임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창조 세계에서 우리의 역할입니다.

물론 이 깨달음이 그냥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림자 속에서 본래의 내 모습을 잊고 살아온 인간이 갑자기 본래의 자기 모습을 제 힘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가 우리의 본래 모습, 본래 창조된 존재임을 자각게 하는 빛이 있습니다. 바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입니다. 예수께서 상처 입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 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이 문은 또한 내 옆의 사람을 보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상처는 사랑의 통로이자 문입니다. 예수의 상처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의 문을 세워 모든 피조물이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도록 길을 안내합니다. 인간은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우리의 창조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십자가)가 창조 세계의 무질서를 바로잡고 본래 자기가 지어진 모습 그대로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 인간이 자기가 지어진 본래의 뜻과 모습을 회복하여 이웃과 자연 세계에 사랑의 전달자가 되어 사는 것, 이것이 창조 세계가 온전히 작동하는 모습이며, 그때 이 세계는 거룩한 친교의 장이 됩니다.

3.
창조의 신비를 마무리하며 한 가지 논의를 추가하겠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피조된 모든 존재가 본래의 창조성을 회복하고 온 세상이 거룩한 친교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세계의 목표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거룩한 친교의 장과는 너무 멀어 보입니다. 세계는 여전히 파괴적이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망가지는 정작 이 세계를 만드신 분은 아무 말씀도 개입도 없습니다. 도대체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 논의는 신정론 문제와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를 다룹니다. 특이하게도 매킨토시는 신정론과 자유의지 논의를 창조 신학 논의로 끌고 들어옵니다. 그러나 신정론과 의지 논의는 창조의 신비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이 작동되지 않는 죄 많은 세상에서(신정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자유의지) 늘 생각하고 성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두 가지 오해를 수정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강하게 개입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우리의 자유가 제한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멀찍이 계시며 인간이 모든 일을 해결하게끔 가끔 도움을 주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혹은 방임하는 방식으로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자유가 무엇인지 생각해야겠지요. 자유란 어떠한 억압이나 제한 없이 본래 우리의 모습이 되는 것이며 우리의 의지를 거슬러 무언가를 억지로 하게 만들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자유는 인간 홀로 유치할 수 없습니다. 내가 자유로운 존재임을 자각하려면 반드시 내 외부의 힘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나 홀로 있다면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외부의 힘을 생각해 봅시다. 어떤 힘은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과중한 업무 지시나 음악회를 방해하는 앞사람의 기침 소리는 내 자유를 방해하는 힘입니다. 그러나 다른 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미소, 친구의 격려, 아름다운 자연이 보여주는 경관은 내 안의 자유를 북돋게 만들어 줍니다. 이 힘에 의지할 때 우리는 자유롭고 본래의 내가 갖고 있는 나의 모습을 용기 있게 드러낼 수 있으며 긍정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어 줍니다.

따라서 자유롭기 위해 우리는 이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서부터 오늘날 많은 현대의 사상가들은 말하길 인간의 자유는 이 힘으로부터 결별하는 것에서 온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리키는 힘은 대부분 신, 곧 하나님입니다. 대표적으로 니체가 그러하지요.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신앙과 믿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신의 명령을 거부할 때 비로소 나의 나된 모습을 발견한다고 말합니다. 일견 옳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세계 안에 거할 때, 하나님의 친교에 친밀하게 붙어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우리가 창조된 모습 그대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친교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창조의 빛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은 매 순간 우리에게 손짓하여 자기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합니다. 창조자의 정신에 잇대어야만 우리는 우리의 본래 지어진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세상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자, 이제 정말 마지막 단락입니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친교에 머물 때라야만 우리의 본모습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친교 안에서 우리는 생명이 가득하게 되고 그 생명을 세상에 나눠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가 이 친교에서 벗어나 생명의 빛을 잃어 간다면 우리는 우리의 아름다운 창조의 본모습을 잃어 갈 것입니다. 우리의 말은 가시가 되고 우리의 눈빛은 칼날이 됩니다. 이웃을 아프게 하고 세상에 상처를 내는 사람이 됩니다.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란 잃어버린 창조성이라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리스가 열어 놓으신 사랑의 문이 있습니다. 그 문으로 우리는 들어갈 권리를 얻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구원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창조성의 회복과 다름없습니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계시를 살필 것입니다. 계시란 우리의 잃어버린 창조성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한 방법들입니다. 계시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문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바로 창조된 모습으로 돌아오라는 그 음성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