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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에게 권하는 생각들

신에게서 시선을 돌려야 할 때: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by 청파비둘기 2025. 5. 14.

어떤 죽음은 설명될 수 없습니다. 아니, 설명할 수 있는 죽음은 거의 없습니다. 고령의 노인이 숙환으로 별세한다고 그의 죽음을 반듯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 지금인가, 어째서 오늘일까, 조금 더 계실 수는 없었나 하는 부질없는 물음이 뒤따라오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참사라는 이름의 죽음들은 더더욱 설명될 수 없고 설명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4월 그날, 아이들은 왜 그 배에 올랐고, 배를 띄운 바다는 어째서 그 배를 삼켰는지, 아이들은 왜 부모 품으로 돌아올 수 없었는지, 우리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평소와 같이 아침을 먹고 신발 끈을 묶고 현관문을 열고 일터로 나간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들이 어째서 같은 날 저녁, 아침에 열고 나간 문을 다시 열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는지, 그들이 어째서 죽음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는지 우리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죽음은 함부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설명 불가의 죽음들을 설명하고픈, 원인을 유추하고픈, 그 죽음에 어떤 힘이나 신의 계획이 작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알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무엄하고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결국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왜‘입니다. 고통의 이유, 죽음의 이유이지요. 왜 저들이 저렇게 허망하게 죽어야 했는지, 하나님은 저들이 죽어갈 때 어디에 계셨는지, 거기에 계셨다면 그 죽음에 당신의 뜻과 의도가 있었는지 우리는 묻고 싶습니다. 이도 저도 아니라 그저 '우연'이라면 죽은 이를 기억하는 이들은 무너져 내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에 황망한 죽음의 의도와 이유를 찾는 모든 행위는 절망적입니다. 무정한 이들의 눈에 죽음의 이유를 찾으려 악다구니하는 이들이 어리석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죽음에 무슨 이유가 있어, 그냥 거기에 있었으니까 죽은 거지.’라는 비정한 눈빛을 보내기 때문이고, 슬프지만, 그 말이 꼭 틀린 말도 아님을 우리 또한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1714년 7월 20일 금요일 정오, 페루에서 가장 멋진 다리가 무너지며 다섯 명의 여행자가 그 아래의 골짜기로 추락했다.” (11)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책을 여는 첫 번째 장의 제목, “어쩌면 우연”과 마지막 장의 제목 "어쩌면 신의 의도"는 의도된 배치이자 이 책을 여는 열쇠입니다. 페루의 다리가 끊어져 추락하고 만 여행자들의 죽음은 우연일까? 아니면 의도, 특별히 신의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의 서술자가 소개하는 '주니퍼 수사'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이 비극에 분명한 신의 의도가 있다고 믿습니다. 주니퍼 수사가 다섯 명의 여행자를 추적하고 그들의 삶을 기록해 방대한 자료를 만든 이유입니다. 비극으로 생명을 잃은 다섯 사람을 조사하고 인간관계를 연결하면 이들의 죽음 안에 신의 의도와 계획, 그리고 뜻이 있음을 밝혀질 테고, 나아가 언제나 안개 속 같던 신의 섭리라는 것이 명징하게 드러나리라 기대하면서 말이지요.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손턴 와일더, 정혜영 역, 클레이하우스, 2025

 

이제 다섯 명의 여행객, 도냐 마리아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 그녀의 개인 하녀 페피타, 에스테반, 피오 아저씨와 그가 대동했던 하이메라는 소년의 삶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주니퍼 수사가 조사하고 편찬한 책을 근거로 소설의 화자이자 서술자가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1장은 책의 시작으로 주니퍼 수사가 다섯 사람의 죽음을 통해 신의 의도를 밝히려한 배경, 2-4장은 각 사람들의 이야기, 마지막 5장은 수사의 작업에 대한 결과와 후일담 그리고 서술자의 입을 빌려 저자 손턴 와일더의 마지막 메시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책을 잘 따라간다면 주니퍼 수사의 작업이 매우 성공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섯 사람의 삶과 관계가 촘촘하게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니퍼 수사는 어쩌면 가장 결정적인 것들을 놓치고 맙니다. 책의 말미에 나오는 주니퍼 수사의 자조가 그의 실패를 잘 보여줍니다. 

 

다리 붕괴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에 관한 책을 편찬하면서, 주니퍼 수사는 아주 작은 세부 사항이라도 빠뜨리면 어떤 중요한 단서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작업을 오래 하면 할수록 엄청나게 많은 희미한 암시들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느낌이 들었다. (191)

 

주니퍼 수사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요? 다섯 사람의 이야기가 겹겹이 쌓이면 쌓일수록 오히려 흐릿해졌던 것들 말입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1장의 마무리 문장을 보겠습니다. 서술자는 주니퍼 수사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지런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니퍼 수사는 도냐 마리아가 살면서 가장 간절하게 몰두한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했다. 피오 아저씨에 대해서도, 에스테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안다고 주장하는 나조차도 샘 속에 숨겨진 더 깊은 샘을 놓쳤을 수 있다. (18-19)

 

주니퍼 수사가 알아차리지 못한 갈피(갈피란 겹치거나 포갠 물건의 하나하나의 사이 또는 그 틈을 말합니다.)를 세심한 눈으로 보고 찾아내는 일이 이 소설을 읽는 데 중요합니다. 이것이 책의 저자 손턴 와일더가 남긴 "샘 속에 숨겨진 더 깊은 샘" (19) 이기 때문입니다. 주니퍼 수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다섯 사람의 정보를 캐내어 정리했음에도, 모든 정보가 완벽했음에도 그는 결국 샘 속의 깊은 샘에 도달하지 못하고 만 것이지요. 그 이유를 찾아가는 것이 이 책을 대하는 우리의 몫입니다. 

 

작은 암시를 하나 드리면서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의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주니퍼 수사는 다섯 사람의 죽음에 신의 의도가 반드시 개입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책의 말미에 이 믿음에 작은 균열이 발생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완전히 흔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역설적으로 그의 신념이 여전히 '신의 의도'에 확고히 머물렀기에, 바꾸어 말해 그의 시선이 끝까지 '신'에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주니퍼 수사의 시선은 사람에게 닿을 수 없었습니다. 다섯 사람에 대한 정확하고 방대한 정보와 주변 사람들의 믿을만한 증언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각 사람 깊은 곳에 숨어있는 회한, 실패, 희망과 같은 작고 미세한 마음의 조각들을 감지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을 파악한다고 죽음에 대한 신의 의도를 알아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책의 마지막 페이지 다다르면 우리는 질문을 바꿀 수 밖에 없음을 직감합니다. '이 죽음에 대한 신의 의도는 무엇인가'에서, 신이 있음에도 죽음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로. 

 

죽음의 고통과 상실로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 우리의 시선을 신이 아니라 남은 자들에게로 옮겨야 함에 대해서, 이것이 포기와 망각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하기 위한 투쟁임을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재난이 일상이 된 시대입니다. 우리는 말도 안 되는 죽음을 매일같이 목격합니다. 모든 죽음은 설명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결국 우리 자신, 이 죽음 앞에 살아남은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정확히는 너는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책의 마지막 문단은 이 책의 정점입니다. 부디 책을 통해 그 문단을 접해보시길 권합니다. 진심으로 일독을 권합니다. _ 청비. 



*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사랑'에 관한 책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을 소개하며 '사랑'이라는 단어를 피했습니다(마지막 문단 제외). 단지 사랑 예찬을 설파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이 책은 이미 여러 차례 번역되었는데, 금번에 새롭게 번역되었습니다. 새 책에는 신형철 교수의 해제가 달려있습니다. 사실 그의 해제는 더 보탤 말이 없을 정도로 완전합니다. 하여 제가 감히 이 책에 대한 소개와 안내를 해도 되는지 고민했습니다. 책을 다 읽고 해제를 꼭 읽으세요. 두 번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