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청청에게 권하는 생각들

인간성에 대하여, <아우슈비츠의 자매>

by 청파비둘기 2024. 11. 2.

 

록산 판이페런  저/ 배경린  역, 아르테, 2024

 

동료를 만난 미움
인간을 향한 미움은 애초에 힘이 그렇게 세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미움을 늘상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때로 상대방이 나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 나의 뜻에 반할 때, 내가 원치 않는 행동을 하거나 그런 모습을 드러낼 때 이따금 미움이 불쑥 찾아오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 양심과 정신은 기본적으로, 미움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고자 합니다. 미움이 주는 부정적인 영향이 몸과 마음과 정신에 이롭지 않음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죠.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 미움을 유지하며 키워가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죠.

미워하는 마음은 왜 태어날까요? 이유는 각가지입니다. 외모가, 행동이, 말투가, 사상이, 정치적 입장이, 배경이, 학벌이, 출신이, 성적 지향이, 인종 등등 그의 무언가 나를 뒤틀리게 만들어 미움이 생겨납니다. 혹은 특별한 까닭이 없기도 합니다. 영문 없이 미운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사정이 무엇이든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기 시작하는 처음엔 그 미움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예의가 있고 시민성이 있고 교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타자에 대한 미움을 바깥으로 표출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런데 미움이 힘을 받아 증폭될 때가 있습니다. 미움의 동료를 만날 때입니다. 이런 경우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한다고 칩시다. 나에겐 평균의 인간성이 있기에 그 미움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꼴이 보기 싫어 고개를 돌리거나 혼잣말하는 정도이겠지요. 그러다 어느 날 친구 혹은 동료를 만나 회포를 푸는 도중 나의 미움을 슬쩍 그에게 드러냅습니다. 이때 놀랍게도 비밀리에 털어놓은 나의 미움에 그가 동의의 응답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나도 그 녀석이 별로야, 꼴 보기 싫어"

미움이 동료를 만난 경우입니다. 그 시로부터 모든 대화의 주제가 미움하는 대상에게 집중됩니다. 서로 맞장구치며 미움의 이유를 더해갑니다. 미움이 미움을 만나 미움이 증폭됩니다. 여기서 미움은 단리가 아니라 복리로 작동합니다. 하나씩 더해가지 않습니다. 곱에 곱을 곱합니다. 이 미움의 증폭에 기름을 끼얹을 수도 있습니다. 어려운 방법이 아닙니다. 그를 미워하는 또 다른 미움을 동료로 삼으면 됩니다. 나만 미워하는 줄 알았더니 너도 미워했구나! 너도? 너도! 우리 모두 쟤를 미워해! 우리의 미움은 정당해! 이제 미움은 거듭제곱이 되고 이내 지수 함수같은 모양을 취합니다. 

이렇게 증폭된 미움은 이제 개인을 벗어나 스스로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미움이 힘을 얻어 생명이 된 셈이죠. 이때부터 미움이라는 단어보다는 혐오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기 시작합니다. 미움이 혐오로 승급하게 되면 더는 미움의 이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대상도 필요 없습니다. 특정한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미움의 동료들을 만나 힘을 키우면, 그 미움의 대상이 지니고 있는 모든 요소요소가 혐오 거리가 됩니다. 그리고 대게는 그의 타고난 외적 요소(직관적이기 때문이죠)를 혐오합니다. 주로 인종이나 피부색처럼 보는 즉시 알게 되는 것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또한 혐오는 순수를 추구합니다.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할 수 없기에 혐오의 대상을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혐오는 순수를 추구합니다. 대화나 타협의 여지가 틈탈 수 없습니다. 순수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혐오의 순수성은 마치 스펀지처럼 다른 미움들을 빨아드립니다. 높은 설산에서 굴려 내려버린 눈덩이와 같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혐오는 그렇게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립니다. 어쩌면 최초의 미움을 품은 그 사람까지도요.

인간성을 삼킨 혐오
비대해진 혐오가 일으키는 부정적인 결과가 하나둘이겠느냐마는 인간성의 말살이 그 핵심입니다. 혐오는 혐오하는 대상을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좀이나 바이러스로 보지요. 그렇기에 자기를 파괴하면서까지 혐오의 대상을 소거하려 듭니다. 순수를 지키기 위해서이지요. 그러나 혐오의 대상을 파괴하면 파괴할수록 결국 자기 자신도 파괴되고 맙니다. 혐오의 언어로 무장한 이들의 얼굴 안에 평화의 면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불과 아직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았던 1940년대 폴란드 남부 그리 크지 않은 도시 오시비엥침(Oświęcim)에서 우리는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혐오가 어떻게 인간성을 말살하는지, 어떻게 세상을 파괴하는지,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목도했습니다. 오시비엥침의 독일식 발음은 '아우슈비츠'입니다. 

록산 판이페런이 모으고 기록한 <아우슈비츠의 자매>는 특정 인종 절멸을 목표로 폭주하는 혐오에 굴복하지 않은 두 자매의 실화를 담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동네에서 소박한 일상을 살아가던 브릴레스레이퍼르 가문의 자매, 레베카 린테(린테)와 마리안네 야니(야니)가 그들입니다. 린테는 예술가 자질을 타고나 무용수의 길을 걷습니다. 야니는 천성이 의롭고 약자를 돕는 일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나치가 세력을 확장하고 유럽 전역에 전운이 감도는 그때에도 두 자매와 자매의 가족들은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보듬었으며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아직 힘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기갑부대가 결국 네덜란드 국경을 넘었고 책임자들을 서둘러 국경을 벗어나 도망쳤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폭행을 당하고 집을 빼앗겼으며, 매일 같이 출근하고 등교하던 길을 자유롭게 거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에 침입한 나치가 타깃으로 삼은 민족은 단 하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자, 유대인을 도운 자, 유대인과 결혼한 자, 유대인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은 자들을 끌어내어 혐오를 뒤집어씌웠습니다. 린테와 야니 자매의 싸움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친구들을 숨겨주고, 위조 신분증을 만들어 나치의 체포를 지연시키고,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살길을 마련해 줍니다. 자매의 싸움은 그녀들의 고향 암스테르담에서 하이네스트라 불리는 숲속의 별장(이 책의 중심 소재이며, 자매는 이 별장에서 많은 동료들을 숨겨주고 지켜냈습니다)으로, 그리고 죽음의 땅 아우슈비츠로 이어집니다.

 



서로가 인간임을 확인할 때
하지만 꼭 기억해 두었으면 하는 바가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자매>는 린테와 야니의 승리의 역사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출판사가 소개하는 나치에 맞선 두 여인의 삶의 찬가라는 표현은 어쩐지 린테와 야니의 고통을 축소하는 듯한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아우슈비츠의 자매>는 미움에서 시작한 혐오가 어떻게 제 배를 불리며 번성하는지 보여줍니다. 이 책의 구성은 3부로 되어 있는데, 장소를 따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하이네스트 별장, 폴란드 아우슈비츠로의 이동 경로를 따라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지 장소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암스테르담의 혐오가 1이었다면, 하이네스트에서의 혐오는 100으로 아우슈비츠에서의 혐오는 10000, 아니 무한에 가깝게 커져 버린 나치의 유대인을 향한 혐오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자매와 자매의 가족 그리고 친구들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려버린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책의 페이지는 점점 무거워지고 두터워집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거의 넘기기가 힘들 정도로 말이지요. 그렇다면 <아우슈비츠의 자매>는 패배의 기록이기만 한 것일까요? 전혀요. <아우슈비츠의 자매>는 인간성을 절멸시키는 혐오 앞에 맞설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열쇠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들려주는 기록입니다. 그것은 인간성의 파괴에 맞서는 인간성입니다. 혐오가 인간성을 짓누를 때 그것을 버텨낼 힘은 바로 인간성입니다.

린테와 야니가 나치의 맞서 벌인 일들은 그야말로 위대한 것들입니다. 남들보다 몇 배의 용기와 노력이 필요한 일들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자매가 행한 일은 승리를 위한 전술이나 계책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라는 인간성에 대한 인식,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인간이 가진 본능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이지요.

승리라는 말이 나왔으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나치의 저 잔혹한 혐오에 맞선 승리가 언제 찾아왔을까요? 아우슈비츠 해방군이 도착했을 때일까요? 연합군이 베를린에 승리의 깃발을 꽂았을 때일까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린테와 야니의 승리는 그와는 달랐습니다. 린테와 야니의 승리는 우리가 인간임을 깨달았을 때 일어났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은신을 도왔을 때, 발각 즉시 처형이 정해진 문건을 품에 숨겨 전달하는 일을 맡아줄 사람이 나타났을 때, 어찌할 수 없이 나치에 부역했지만, 위기에 빠진 유대인들의 퇴로를 열어주었을 때, 파괴된 듯 보였던 인간성을 여전히 살아있음을 자매는 확인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자매>가 정말로 승리의 역사라고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성의 승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습니다. 하지만 그 작디작은 인간성의 살아있음이 아우슈비츠라는 지옥에서 사람들을 서로 살려냈습니다. 서로가 중요합니다. 인간성의 확인만으로도 사람들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야니의 머리 위로 빗줄기가 쏟아졌다. 푹 젖은 옷이 그녀의 피부처 럼 착 달라붙었다. 야니는 짧은 속옷 차림으로 바들바들 떨었다. 하 의를 입지 않은 다리 사이로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추위에 언 발에 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리 밑에 곧장 나막신만 붙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야니는 스스로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다른 이 들은 가지지 못한 것을 생각했다. 바로 의지할 사람이었다. 자매는 자아를 잃지 않도록 서로를 도왔다. 서로의 존재는 자신이 누구인지 를 끊임없이 일깨워 줬다. 나는, 우리는, 암스테르담에서 온 자매라는 사실을. 354

혐오가 끊임없이 동료를 모으고 있는 시대입니다. 같이 미워할 사람들을 찾으며 거리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미움이 미움을 만나면 그 힘이 몇 배로 커진다는 것을 혐오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맞서야 합니다. 나도 그도 우리도 모두 다 인간임을 자각함으로 말이지요. 혐오의 시대에 인간성을 지켜야 합니다. <아우슈비츠의 자매>는 그 이유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