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청청에게 권하는 생각들

기억의 공간은 어디인가? <내가 알던 사람: 알츠하이머의 그늘에서>

by 청파비둘기 2025. 1. 6.

<내가 알던 사람: 알츠하이머의 그늘에서> 샌디프 자우하르, 서정아 옮김, 글항아리, 2024.


우리 몸에 영혼의 자리가 있다면 아마도 그곳은 '기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억은 생의 경험과 감각을 저장하고, 슬픔과 기쁨의 흔적들이 오롯이 축적해 지금 우리에게 삶의 의미라는 메아리를 울립니다. 영혼의 자리가 기억이라면 우리는 기억을 통해야만 온전한 나를 구성하고 너를 이해하고 세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기억이 우리 삶에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타자와 인격적으로 관계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사람을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제일 표지라면, 기억은 더욱더 중대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타자의 얼굴과 몸짓을 새겨놓고, 그 타자와 대면할 때 그것들을 다시 꺼내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낯선 타자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에 관하여 기억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기억은 인격의 본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반대로 말하면 기억이 없는 삶은 삶이라고 부르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망자와 산자가 이생에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면 망자는 산자를 더는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산자의 몫이 될 뿐이지요. 그렇기에 기억을 잃는다는 것, 기억이 점차 사라져지는 일은 무척 괴롭고 두려운 일입니다. 타자와 주고받았던 기억을 잃어간다는 뜻이고 그 타자와의 관계 역시 끊어지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망각은 사람을 차별하지도 않아 사랑하는 아내, 남편, 아이들, 부모, 이웃을 가리지 않고 모든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타자들과 맺은 기억이 소실되면 관계는 그와 함께 사라집니다.

현대 의학이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이며 첨단 시대의 인류가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 가운데 하나인 알츠하이머 질환이 바로 기억을 잃어가는 병, 망각의 질환입니다. 오늘 청청에게 권하는 책 <내가 알던 사람: 알츠하이머의 그늘에서>는 알츠하이머로 아버지를 잃어가는 아들의 수기입니다. 

저자인 샌디프 자우하르는 인도계 미국인으로 심장 전문의입니다. 그의 아버지이자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프렘 자우하르 또한 저명한 과학자로 생물학 연구에서 많은 업적을 이룬 학자였습니다. 망각의 그림자는 자우하르 가족의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습니다. 명예로운 은퇴를 앞에 둔 프렘은 어느 날부터인가 깜빡깜빡하는 일이 잦아졌고, 익숙한 계산, 지리, 운전,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떠올리는 일이 이전과 다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프렘과 그의 자녀들은 직감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알츠하이머가 찾아왔다는 것을요. 

 

<내가 알던 사람: 알츠하이머의 그늘에서>  샌디프 자우하르, 서정아 옮김, 글항아리, 2024.



이 책은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글의 전개는 우리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아버지 프렘의 병세는 점차 악화합니다. 통상 우리가 알고 있는 알츠하이머의 증세가 프렘에게 정확하게 나타납니다. 기억 소실의 속도는 점차 빨라지고 그에 따라 거동이 불편해지며 감정은 거칠어지고 가족과 지인들과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집니다. 아들 샌디프는 의사답게 명징하면서도 차분하게 아버지의 병환과 그에 따른 증세 그리고 돌봄 경험을 서술합니다. 역시 의사답게 샌디프는 알츠하이머병과 관련한 각종 의학 정보와 뇌와 관련한 의학적이며 전문적인 내용을 함께 설명합니다.

그러나 <내가 알던 사람>이 집중하는 것은 알츠하이머라는 병이나 그 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있지 않습니다. 알츠하이머 질환이 이 책의 핵심이지만 질병으로서의 알츠하이머가 아니라 이 병이 만들어내고 있는 그늘, 그리고 그 그늘 속에서 빛을 잃어가고 있는 환자가 아닌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내가 알던 사람>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이야기의 중심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억, 삶을 이루는 기억의 문제입니다.

샌디프의 질문도 여기에 있습니다. 기억이 없는 삶도 삶일 수 있는지에 대해 샌디프는 끊임없이 묻고 답을 찾습니다. 그러나 기억이 붕괴하는 아버지 앞에서 샌디프는 답을 찾기는커녕 거대한 절망과 압도적인 슬픔 앞에 무너지기를 반복합니다. 샌디프는 감정을 조절하는 뇌 기능을 상실했고 그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병리적으로 폭력적일 수밖에 없음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감정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평생을 동반한 사랑하는 아내를 향해 아무렇지 않게 요양병원에 보내야 한다고 말하거나(프렘의 아내 역시 뇌 질환 가운데 하나인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으며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헌신적으로 프렘을 돌본 입주 요양보호사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하는 모습을 보며 샌디프 절망합니다.

기억이 없는 아버지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버지에게 인격적 대우를 하는 것이 맞는 일인가? 가령, 알츠하이머 환자를 다루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행위(치료적 속임수)가 인격적으로 올바른 일인가에 대해 샌디프는 고민합니다. 이 문제로 가족과 갈등을 겪기도 하지요. 그리고 불행히도 샌디프가 던지는 질문의 답을 아버지에게서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알츠하이머는 현실이고 그 질환은 호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샌디프는 거의 매 순간 절망하지만, 이따금 미세한 빛을 발견할 때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소실된 기억의 파편과 자기의 기억이 만나 하나의 그림을 이룰 때였습니다. 그 기억들은 서로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마치 깨진 유리 조각 같습니다. 그러나 그 조각들이 서로 이어 붙여진 다음 빛을 만나 스테인드글라스가 되어 기이하지만,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듯 샌디프의 기억과 아버지의 기억은 서로 만나 빛을 만들어 냅니다. 그 빛은 애처롭지만 무기력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 대한 기억을 잃어 어린 시절의 별명을 부를 때, 요양보호사에게 죽은 아내의 이름을 부를 때, 잊고 있었던 아주 오래전의 노래를 흥얼거릴 때, 그리고 진심을 담아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때, 샌디프는 아버지가 인격을 상실한 알츠하이머 환자가 아니라 온전한 사람임을 느끼게 됩니다.

기억은 온전히 개인의 것일 수만은 없음을 샌디프는 아버지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그가 마르틴 부버의 <너와 나>에서 인용하는 대목이 잘 보여줍니다.

"영혼은 '나'의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당신' 사이에 존재한다. 우리 몸속을 순환하는 피가 아니라 우리가 들이쉬는 '공기'처럼." 248.

기억을 개인의 소유로만 돌린다면 한 개인의 기억이 소멸하면 그의 인격은 물론 그와 맺은 모든 관계 또한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 혹은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너와 나 사이의 공간에 있다면 우리는 누군가의 붕괴를 막아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기억이 사라진다 해도 내가 그와의 기억을 붙들고 있다면, 그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이를 무능력한 환자로 보지 않고 여전히 한 명의 인격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알던 사람>은 읽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병세가 악화하는 프렘을 보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나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를 떠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도인으로서 미국 이민자이며 차별과 베재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지키고 성공하기 위해 오로지 일에만 매진한 프렘을 보며 우리, 특히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보기도 합니다(책을 읽는 동안 자꾸 어떤 기시감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내가 알던 사람>은 기억과 인격 사이의 관계를 재조명하도록 도와줍니다. 사랑하는 이가 기억을 잃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기념하고 나의 자리에 그의 기억을 남겨 둔다면 그 사람이라는 존재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게 된다고 샌디프는 책을 마무리하며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기억과 삶 그리고 존재와 관계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내가 알던 사람>을 추천합니다. 일독을 권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