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라는 시간과 공간
일요일 오전 11시 반쯤 누군가로부터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어디? 뭐하는 중?"
이 메시지를 그리스도인이 받았다고 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답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예배 드려"
'지금 교회에서 예배드린다'는 말, 우리에게 매우 익숙합니다. 그런데 이 짧은 문장 안에는 꽤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세 가지 층위가 있습니다. 예배라는 행위가,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 교회라는 공간 안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무시간적이며 초현실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안에서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일임을 보여줍니다. 어떤 영적이며 계시적인 시간이 임해야만 예배가 가능한 것이 아니며, 신성하다고 일컫는 특수한 장소에 가야만 예배가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는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에서(반드시 교회 건물만이 아니라) 평범한 시간 가운데(일요일 오전 11시나 수요일 저녁 8시와 같은) 반복됩니다.
이는 예배 가운데 특별하게 임재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배 가운데 놀라운 역사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기도하던 중에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있었음을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이미 배웠습니다(행 2:1-13). 훗날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불렸던 이 사건 역시 천천히 들여다보면 동료의 다락방이라는 평범한 공간에서 늘 기도했던 그날 저녁이라는 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누구도 성령이 올 것을 예측하고 그날, 그 시각, 그 장소에 모여들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기도하기 위해 늘상 모이던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을 뿐이었습니다.
이렇듯 예배가 우리의 일상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반복되기에 예배는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삶을 우리의 감각이라는 말과 대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각, 즉 경외감을 느끼고 기쁨을 누리며 진리를 깨닫고 희망을 꿈꾸게 하는 감각들과 우리의 예배는 서로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의 감각>의 저자 돈 샐리어스(Don E. Saliers)는 예배가 우리의 일상과 감각과 이렇듯 밀접히 이어진 이유에 관해 "예배는 듣고, 보고, 만지고, 움직이고, 냄새 맡고, 맛보는 우리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18).
옳은 예배와 그른 예배를 나누려는 강박
개신교 예배는 담백한 매력이 있습니다. 가톨릭 미사와 비교할 때 예배 순서와 형식은 소박하고 정갈합니다. 개신교회 예배당도 마찬가지인데 고풍스러운 성당 건물의 내외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각적 장치와 효과가 최대한 억제되어 있습니다. 설교자의 말씀이 예배의 중심을 이루는 경우가 많고, 성직자와 일반 신도 간의 관계가 비교적 평등합니다. 이는 종교개혁 전통의 흐름 속에 개신교만의 예배 형식과 스타일을 추구해 가며 완성시킨 모습입니다.
개신교 예배가 추구하는 정신은 분명 소중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 예배는 예배드리는 자의 감각적 측면을 다소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상징으로 가득한 성직자의 의복이나 제의 행위들이 말씀의 본질을 가린다는 명목으로 제거됨에 따라 개신교 예배자는 시각을 통해 전달되는 거룩한 감각을 체험할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효율의 문제로 성찬 전례를 등한시하거나 아예 하지 않는 개신교회도 적지 않습니다. 전례라는 말 자체가 낯선 용어가 되어버린 셈이죠.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감정의 고양을 지나치게 경시한 풍조에 대한 반발로, 감정을 폭발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의 개신교 예배가 출현했습니다. 이른바 현대적 예배 혹은 록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격정적인 찬양이 중심이 되는 예배도 등장했습니다(전문 용어로서 경배와 찬양 예배에도 엄청나게 다양한 갈래가 있지만). 동시대 곡을 현대적인 악기를 사용해서 화려하고 극적으로 사람들을 인도합니다. 젊은 세대가 이 예배를 적극적으로 환영했는데, 이유를 따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반발은 또 다른 반발을 낳았습니다.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타교회나 교단의 전통을 무시하고 정죄하거나 혹은 정반대로 자기 전통을 지나치게 평가절하하는 방식으로 익숙함을 파기하려 애쓰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예배와 찬양의 본질에 관한 지나친 신학적 논쟁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이런 논쟁들은 대부분 순환논리에 빠지거나 감정적 상처로 귀결되곤 합니다. 또 다른 축에는 다른 모든 예배 전례는 부차적이며 오로지 목사의 설교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 또한 개신교 역사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설교 중심 예배는 설교자에게 지나친 기대를 부여하게 되었고(설교자를 지치게 하는 원인이지요), 다른 전례 전통이 모두 설교를 떠받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돈 샐리어스 어떤 전통이 더 옳은, 더 성경적인, 더 신실한 예배인가에 대한 논쟁은 사실상 별다른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고민하고 성찰해야 할 주제는 우리의 예배 안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놀라움, 기쁨과 회복, 진리에 대한 헌신, 희망에 대한 순전한 기대가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지 어떤 예배가 좋고 어떤 예배가 나쁜지(그래서 없어져야 하는)에 대한 판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예배를 갱신하고 개혁하는 길은 예배의 전례적 요소요소를 더욱 두텁게 만들거나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시도를 수행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경외, 기쁨, 진리, 희망의 기대를 회복시키는 데에서 예배 개혁은 출발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꾸어 말해 예배 안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무한한 기쁨, 진리에 대한 헌신과 세상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꾸는 일이 없다면, 그 예배의 전례가 제아무리 근사하고 선포되는 말씀이 주옥같다 할지라도 그 예배에 생명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주해야할 예배의 감각들 - 경외, 기쁨, 진리, 희망
그렇다면 경외는 무엇일까요? 예배에서 회복해야 할 경외라는 감각은 친밀함과 동시에 낯섦에 대한 감각입니다. 예배에서 경외란 온전한 언어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하나님에 대한 혹은 하나님에 관한 것들에 대한 감각입니다. 대자연의 압도적인 풍광 앞에 섰을 때 느끼는 낯설지만, 위로와 격려를 받는 감각과 흡사합니다. 때때로 경외는 두렵고 부정적인 감각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죽음은 마주치기 싫은 주제이지만 매우 일상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가까운 이의 죽음 혹은 나의 자아에 대한 죽음은 기이하고 설명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신비를 알아가는 통로가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찾고 싶은 마음과 두려워 피하고 싶은 마음이 뒤섞인다면 그것은 예배의 실패가 아니라 경외로 가는 좋은 첫걸음입니다. 경외는 낯설지만, 친밀한 감각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기쁨이라는 감각은 글자 그대로 예배 가운데 마르지 않는 기쁨입니다. 넘치는 기쁨과 다소 다릅니다. 마르지 않는 기쁨을 잘 보여주는 엘리야의 일화가 있습니다. 기근으로 먹을 것이 없어 죽게 된 모자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가루 한 움큼으로 빵을 만들어 먹고 아들과 함께 죽기로 마음먹지요. 그런데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로 알려진 그 어머니에게 찾아와 마지막 남은 그 가루를 달라고 합니다. 매우 낯설고 기이한 장면입니다. 욕심쟁이 예언자라니요! 그런데 그 여인은 용기를 내어 예언자에게 자기에게 남은 마지막 음식을 줍니다. 자기 생명을 타자에게 건네준 위대한 결정입니다. 예언자는 가루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인의 빵가루 주머니에서 한 움큼의 가루가 줄지 않는 것입니다. 그날도 그다음 날도 한 덩이의 빵을 짓고 나면 또 한 움큼의 가루가 생겨났습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생명은 계속 이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왕상 17:1-22). 예배 가운데 기쁨은 이와 같습니다. 기쁨은 선물로 주고받을 때 공동체 안에 마르지 않는 샘이 됩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기쁨이 이와 같습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우선 진리라는 말을 풀어서 봅시다. 진리란 참인 명제라는 뜻입니다. 어떤 명제가 옳을 때 우리는 그 명제를 진리라고 판명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명제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러냄입니다. 찬송이나 전례 행위 뒤에 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죄 가득한 나를 드러내 용서를 구하는 마음, 다시는 죄를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하는 것이 예배에서 우리가 도출해야 할 명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 모습과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 사이에 커다란 괴리로 부끄러움과 고통을 느낍니다. 진리의 감각이란 이 괴로움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내 안에 잘못된 것이 있음을 자각할 때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도 무언가 잘못되어 있음을 감각하게 됩니다. 진리를 추구할 때 나와 나의 세상이 비로소 온전히 보이게 됩니다. 진리의 감각이 회복될 때 우리는 정의의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게 되며 정의의 마음을 품을 때 세상을 애통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희망의 감각을 생각해 봅시다. 돈 샐리어스는 그리스도교 예배가 말하는 희망은 낙관주의와 다르다고 말합니다. 예배의 감각으로서 희망은 오히려 분투에 가깝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고 보여주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바로 희망입니다. 그 희망의 세상은 거저 오지 않습니다. 희망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회복과 통치를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투쟁이 희망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교 예배의 희망은 분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리라 약속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서로의 어깨를 걸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힘이 빠진 사람을 부축해 주고 약한 사람들을 잠시 쉬게 합니다. 그렇기에 희망은 공동체적입니다. 또한 의롭지 못한 세상에 대해선 하나님이 보여주실 세상은 그렇지 않다고 용감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희망은 예언자적입니다. 그리스도교 예배에서 희망은 달콤한 위로와 무책임한 낙관으로 미래를 포장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지금도 나쁘고 여전히 나쁘고 앞으로는 더 나빠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허무와 포기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반드시 있다는 결단을 하는 것, 바로 그 결단이 우리의 예배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언어만 달랐지 예식 자체는 똑같아!"*
동방의 몽골 땅에 '사우마'라 불리는 존경받는 위대한 그리스도교 성직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동방, 그것도 몽골인의 땅에 뿌리 내리고 토착화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통과 전례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사우마는 하나님의 음성에 이끌려 서방, 곧 로마를 향한 순교의 길에 오를 마음을 먹습니다. 이윽고 제자였던 마르코스와 함께 목숨을 건 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두 동방의 수도사는 위대한 교회가 자리 잡고 있는 로마에 당도합니다. 동방의 순례자들이 왔다는 말에 서방의 교황을 비롯한 로마의 사제들은 잔뜩 긴장했습니다. 완전히 다른 외모와 다른 전통과 다른 문화에서 방문한 이방인들과 그들의 그리스도교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불신의 눈초리 아래서 두 사제는 로마에서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때가 되어 사우마와 마르코스는 로마 교황 앞에 섰습니다. 사제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경내를 메웠습니다. 사우마는 두려웠지만 마음을 다해 말했습니다. 부활절을 맞아 성찬례를 집전하게 해달라고 말이지요. 로마의 주교들은 미심쩍으면서도 내심 기대했습니다. 그들의 전례가 자기들과 얼마나 다른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허락했고 사우마는 로마의 주교들과 성찬례를 집전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경탄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사우마의 집례는 비록 쓰는 언어와 표현은 달랐지만, 예식에 담긴 정신은 로마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교들은 하나같이 외쳤습니다.
"언어만 달랐지 예식 자체는 똑같아!" (동방수도사 서유기+그리스도교 동유기, 96)
한 몽골 수도사의 동방 서유기에 담긴 이 일화는 우리가 회복해야 할 예배의 감각이 무엇인지 명징하게 보여줍니다. 어떤 예배를 선택하고 어떤 순서를 넣고 빼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통을 존중하며 현대 감각을 충분히 활용하면 예배의 외형은 그 형태가 무엇이든 큰 관계가 없습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예배 안에 경외와 기쁨과 진리와 희망이 있는지 입니다.
돈 샐리어스의 <예배의 감각>은 예배를 인도하고 준비하는 이들만을 위한 예배학 교과서가 아닙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읽고 고민해야 하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에 경외와 기쁨과 진리와 희망이 있는지 돌아봅시다.
*동방수도사 서유기 + 그리스도교 동유기, 곽계일, 감은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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