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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260531 삼위(三位)의 풍경(창 1:1-2:4a, 시 8, 고후 13:11-13, 마 28:16-20)

by 청파비둘기 2026. 5. 31.

선거철이라는 살풍경
선거철이 되니 확신과 장담의 언어가 도처에 가득합니다. 거리에는 자신감 넘치는 메시지가 박힌 현수막이 빼곡하게 내걸렸습니다.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독특한 홍보 방식이지요, 특수 제작된 ‘선거 유세 차량’에서는 민망하기 그지없는 가사로 개사된 유행가 선거송이 끊임없이 두 귀를 강타합니다. 선거 현수막 문장들만 따로 모아도, 현시점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현상학 논문 한 편이 거뜬히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 기간에 쏟아지는 기묘한 말들의 향연이야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요. 다만, 선거가 만들어내는 이 살풍경에 여전히 적응하기 힘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경쟁자를 향한 힐난과 비난, 그리고 조롱이 섞인 말의 폭격을 우리가 거의 반강제로 견뎌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보도되는 거친 언사들을 보노라면,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만큼 거대한 것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책 <인간의 조건>에서 ‘힘’과 ‘권력’에 관해 유의미한 통찰을 들려줍니다. 아렌트에 따르면, ‘힘’은 개인의 몫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힘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소유할 수 있습니다. 반면, ‘권력’은 내가 단독으로 갖는 것,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은 반드시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즉, 힘은 개인에게 속하지만, 권력은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독립된 실체입니다. 권력 그 자체가 악은 아니지만, 권력에 지나치게 함몰될 때 세상은 힘의 위계로만 작동됩니다. 

나 외에 다른 모든 이를 통제하려는 힘,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구를 중심에 둔 세계에서 온전히 호흡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매일 이런 세계를 살아갑니다. 세계는 점점 메말라가고, 그 세계 안에서 우리 또한 생명의 빛을 잃어가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통제와 지배가 아니라, 사랑이 중심이 된 풍경이 그립습니다. 관계의 중심에 권력이 아니라 사랑이 놓인 풍경, 너와 나를 잇는 모든 연결망마다 사랑이 새겨진 풍경 말입니다. 이런 세상이 가능한가? 저는 우리가 삼위일체를 깊이 묵상할 때, 미세하지만 분명한 가능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사랑이 중심이 된 풍경의 원형이자 완성이 바로 ‘삼위 하나님의 풍경’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만드시는 아름다운 풍경을 은유로 삼아, 삼위일체라는 신비의 세계로 한 걸음 들어가 보려 합니다.


성부의 풍경
먼저, 성부 하나님의 풍경을 봅니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의 시작이자 세상이 지어진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손길이 닿기 전의 세상을 향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혼돈, 공허, 그리고 깊은 어둠은 모두 무질서, 즉 ‘카오스’를 뜻합니다. 이 카오스의 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마침내 질서가 잡힙니다. 빛과 어둠이 제자리를 찾고, 그 공간 안에 해와 달과 별이 자리합니다. 카오스의 세상이 질서와 생명의 세상, 곧 ‘코스모스’가 된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을 관계의 중심에 두고, 타자를 억누르며 배제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은 다릅니다. 만물이 제자리를 잡고, 서로를 밀어내거나 배제하지 않은 채 조화를 이루며 협력하는 세상, 이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이 세상을 바라보며 "보기 좋았다"고 선언하십니다. 히브리 시인은 시편 8편에서 무질서를 생명으로 바꾸신 창조주를 향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 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님의 전능하심이 하늘 높이까지 가득하다고 찬양하지요. 시인은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며 그것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노래합니다. 이윽고 시인의 시선은 광활한 우주에서 작디작은 ‘사람’에게로 향합니다. 그리고 별을 지으신 창조주께서 사람을 돌보고 계심을 깨닫습니다.

시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인은 상징의 감각을 언어의 재료로 삼는 사람입니다. 해와 달과 별, 높은 산과 망망한 바다는 전능자를 감각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전능자의 위대함을 감각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란 존재는 자연 만물 가운데 가장 약하고 하찮은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자연에는 ‘실수’나 ‘탐욕’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지만, 인간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단어들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어쩌면 가장 결함이 많은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 흠 많은 사람을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고, 무엇보다 깊이 사랑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전능자가 가장 결함 많은 존재를 사랑하십니다. 신학자 로완 윌리엄스는 하나님의 전능함이란 단순한 힘의 크기가 아니라, "극도로 불안정하고 부정의하며, 믿을 수 없고 반역적인 세상을 향해, 그리고 그 세상을 위해 신실하게, 언제나 함께 있을 수 있는 무한한 힘"이라고 말합니다(로완 윌리엄스, 신뢰하는 삶, 41).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이루는 본질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장로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라고 선언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당신이 만드신 존재 가운데 가장 반역적인 우리에게로 기꺼이 들어오셔서 영원토록 사랑하시기로 마음먹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우리 삶에 온전히 성취하신 분이 바로 성자 예수님입니다.

 


성자의 풍경
이제 성자 예수님의 풍경을 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셨기에, 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얼마나 짙게 사랑하고 계신지 아셨습니다. 아버지의 기쁨은 곧 아들의 기쁨이었고, 아버지의 슬픔은 곧 아들의 슬픔이었습니다. 세상이 창조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미움의 언어를 뱉어내며 총과 칼을 들 때, 하늘의 아버지와 땅의 아들은 함께 슬퍼하셨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서 밀려나고 버림받은 자들을 유독 아끼셨습니다. 환대와 인정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맨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너희들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데 아무런 결격 사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손가락질당하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셨으며, 아버지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벽이 있다면 과감히 부수어 버리셨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하늘과 땅의 권세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이 명령의 핵심은, 나의 아버지가 아무런 차별 없이 세상 모든 이를 사랑하고 계심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주신 이 사랑의 권세에 힘입어 세상을 권력의 풍경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를 깨뜨려야 합니다.

이처럼 성자 예수님의 풍경에는 아버지의 전능하신 사랑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성자의 마지막 풍경은 참혹한 골고다 언덕이요, 그 위에 세워진 십자가였습니다. 아버지도 아들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무너진 세상과 우리 모두를 온전히 영원한 사랑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아들이 스스로 죽음이라는 벽을 허물고 사랑을 확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들은 죽음의 요구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그 신뢰와 사랑 안에서 당신의 능력으로 아들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로써 성부와 성자는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세상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완전한 사랑의 풍경을 완성하십니다.

 


성령의 풍경
마지막으로 성령의 풍경에 관하여 생각해 봅시다. 삼위의 풍경 속에서 성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이 들립니다(막 1:11). 여기서 사랑을 말씀하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고, 사랑을 받는 분은 아들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사랑하는 분과 사랑받는 분 사이를 흐르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이 역동적인 '사랑'이야말로 성령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은유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었던 <환대의 신학>에서 김진혁 교수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성부가 성자에게 사랑 곧 성령을 주시고, 성자가 성부에게 사랑으로 응답함으로 다시 사랑 곧 성령을 내어주신다." (김진혁, 환대의 신학, 80) 즉, 사랑이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그 사랑의 연대를 굳건하게 하십니다. 성령이 계시기에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풍경은 비로소 완성됩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사랑을 주고받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나아가 그 사랑의 궁극적인 완성인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다름 아닌 바로 저와 여러분을 향한 사랑이었음을 잊지 않게 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 성령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사역의 비밀이 있습니다. 성령은 세파에 지치고 허덕이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전하십니다. 이를 가리켜 삼위 하나님의 풍경 안으로의  초대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기꺼운 마음으로 성부와 성자의 교제 안으로 이끄십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자격이 없으나 하나님은 자격을 묻지 않으시며, 성령은 우리의 자격 없음에 위축되지 말라며 위로와 용기를 주십니다. 성부께서 허락하셨고, 성자께서 십자가로 길을 여셨으며, 성령께서 우리의 손을 이끌어 그 풍경 안으로 들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만들어내시는 사랑의 풍경입니다.

삼위의 풍경 속으로
여러분, 삼위 하나님의 풍경에는 우열이나 위계질서가 없습니다. 권력으로 작동되는 관계가 아니기에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를 통제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지극히 사랑하고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며, 온전히 하나 되어 생명으로 충만한 풍경을 일구어 가십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이 거룩한 풍경의 일원이라는 점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 권력의 풍경을 꾸며주는 들러리가 아니라, 내 사랑의 풍경 속에 있는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일깨워 주십니다. 그렇기에 권력의 풍경이 우리의 배경이 될 수 없습니다. 이 풍경은 저 너머 피안의 세계에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세상은 이미 삼위 하나님의 풍경 안에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세상이 모든 관계의 중심에 권력을 두고, 힘의 논리로 사람을 재단하며, 결국 스러지고 말 것들을 움켜쥐려 발버둥 칠 때, 우리는 사랑이 중심에 있는 삼위 하나님의 풍경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 사랑의 역동이 우리 삶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도록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인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13장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온전해지기를, 서로 격려하기를, 평화의 마음을 품기를 권면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가 삼위의 풍경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감당해야 할 지침이요 훈련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한다는 바울의 기도는, 우리의 일상이 곧 삼위 하나님의 세계임을 알아차리라는 간곡한 부탁입니다.

여전히 험한 세상입니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자본이고 능력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을 쥐지 못한 이들은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아예 추방당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홀로 뒤처질까 두려워, 살기 위해 권력에 매달립니다. 이것이 세상의 쓸쓸한 풍경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묵묵히 삼위의 풍경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삼위의 풍경 안으로 초대받은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기준으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이신 삼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든든한 배경이자 풍경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 자격 없는 우리가 머물러야 할 진정한 자리가 바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품임을 믿으십시오.

삼위 하나님이 사랑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계시듯, 우리도 서로 사랑으로 긴밀히 연결되어야 합니다. 누구도 밀어내서는 안 됩니다. 끊어져 떨어진 이가 있다면 애써 달려가 먼저 손을 맞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삼위의 풍경 속을 살아가는 성도의 마땅한 책임입니다. 삼위의 풍경을 가득 메운 그 사랑 안에 우리가 온전히 거할 때, 우리의 영혼은 깊은 안식을 누리고 우리가 맞잡은 손은 더욱 굳건해질 것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메마른 세상 속에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풍경을 선명하게 그려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