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으로 만드는 말
이번 한 주간, 우리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어느 대형 커피 프랜차이즈 업체의 소식에 온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월요일, 제46주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에 나온,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그 광고 카피 문구' 때문입니다. 어떤 말이었는지 이 자리에서 다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을 희화화하고 당시 무자비한 폭력 앞에 쓰러져간 이들을 조롱하는 문구였습니다. 게다가 87년 6월 민주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연상케 하는 단어까지 동원하여 열사의 죽음을 희롱하는 듯한 카피마저 사용되었습니다. 저 역시 일상에서 자주 방문하던 곳이었기에, 그 참담함과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기사가 나간 이후 이 카페 뿐만 아니라, 유명 의류 업체를 비롯해 정말 많은 곳에서 이와 비슷한 이해할 수 없는 마케팅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인정하는 바, 우리는 이 사건을 단순한 마케팅의 실수나 착오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잃어버린 자본이, 어떻게 역사적 비극마저 얄팍한 유희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마는지를 보여주는 징후적 비극입니다. 자본과 기업은 마케팅이라는 말로 슬쩍 회피하여, 아직 반세기도 채 지나지 않은 뼈아픈 사건이며,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처참했던 죽음들을 어떻게 이토록 우습고 가볍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혐오와 멸시로 무장한 '언어'를 마주할 때마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깊은 탄식이 흘러나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유명한 명제를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 언어의 집에 인간이 산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프레와 나눈 편지, <휴머니즘 서간>에 실린 말입니다. 흔히 이 말을 '인간이 사유하고 행동하는 데 언어가 중요하다'는 정도로 이해하지만, 하이데거의 진짜 논지는 훨씬 엄중합니다. 인간의 사유와 행위는 철저히 언어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바로 뒤이어 이렇게 경고합니다.
"인간은 마치 자신이 언어의 형성자이자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주인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언어, 그리고 그 언어가 촘촘하게 직조해 놓은 세계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이데거의 통찰에 기대어 보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토록 비열하고 거친 언어를 쏟아내는 이유는, 우리의 존재가 이미 부패한 언어에 점령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이렇습니다. 죄로 물든 세상의 언어, 그 거대한 굴레에 갇힌 우리는 악한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루가 멀다고 쏟아지는 혐오의 언어들은 결국 우리가 발딛은 세상을 사막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 사막에 갇혀, 사막의 논리에 지배받는 우리는 별수 없이 메마르고 무정한 말들을 되풀이하는 악순환 속에 살아갈 뿐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의 강림은 우리의 전 존재를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변화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언어적 풍경을 바꾸어내야 합니다. 사막 같은 세상과, 그 세상이 오염시켜 버린 사람들의 언어를 성령의 은총을 내려받은 믿음의 사람들이 전복시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그 일을 가능케 합니다. 말씀을 통해 그 길을 찾아봅시다.
사막의 샘물
오늘 복음서 본문은 '명절의 가장 중요한 마지막 날'이라는 시점을 일러주며 시작합니다(37절). 여기서 말하는 명절이란 '장막절' 혹은 '초막절'로, 하나님께서 애굽의 포로였던 이스라엘을 해방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그 시절 자기 조상이 광야에서 초막을 치고 살았던 때를 기억하며 일주일가량 자기들도 집 밖으로 나가 초막에서 지냅니다.
이때 제사장들은 특별한 의식을 치릅니다. 실로암 못에서 황금 대접에 물을 길어와 성전 제단에 붓는 것입니다. 이는 광야에서 반석을 깨뜨려 물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유대 민족에게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를 내려 달라는 간절한 바람이 담긴 행위였습니다. 생수로 상징되는 영원한 해방을 향한 열망이 절정에 달한 초막절의 마지막 날, 주님이 일어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애굽을 물리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구원의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님의 이 외침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해방은 항상 '넘쳐흐르는 생수'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14장 8절은 해방의 날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 날이 오면,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솟아나서, 절반은 동쪽 바다로, 절반은 서쪽 바다로 흐를 것이다. 여름 내내, 겨울 내내, 그렇게 흐를 것이다." (슥 14:8)
여기서 스가랴가 말한 "그 날"이란 언제입니까? 과거에는 바벨론 포로기가 끝나는 날이 바로 그 날이었으며,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에겐 로마의 압제가 끝나는 완전한 해방의 날이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에스겔 47장 1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다시 성전 문으로 갔는데, 보니, 성전 정면이 동쪽을 향하여 있었는데,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의 오른쪽에서 밑으로 흘러 내려가서, 제단의 남쪽으로 지나갔다." (겔 47:1)
에스겔 역시 해방의 날이 오늘 날, 성전에서 물이 솟아오르는 환상을 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에게 물과 해방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막 기후에 살던 유대 백성들에게, 물을 마음껏 쓸 수 있는 날이 곧 구원의 날인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생수를 바라는 소망이 가득한 초막절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친히 "생수가 강물같이 흐를 것"이라 선포하셨으니,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가슴이 얼마나 뛰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봅시다. 에스겔과 스가랴는 사막을 생명으로 바꿀 그 물이 '예루살렘과 성전'에서 터져 나온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예언이 성취되는 장소를 완전히 뒤바꾸십니다. 생수의 강물이 예루살렘과 성전이라는 공간이 아니라, 바로 그분을 믿는 사람의 '배', 즉 우리의 몸 안에서 흘러나온다고 선포하십니다.
당시 히브리 전통에서 사람의 '배(내장)'는 온갖 탐욕과 불결한 것들이 가득한 곳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령이 임하시면, 바로 그 가장 인간적이고 연약한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세상을 살리는 맑은 물이 쏟아져 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물이 샘솟는 주체가 거대한 건물과 도시에서, 성령을 받은 '우리 각 사람'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이제 이 사막이 되어버린 세상에 생수의 강물을 흘려보낼 주체는 다름 아닌 성령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이는 책임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사막의 세상을 바꾸는 주체는 예루살렘이라는 시스템도, 성전이라는 종교적 상징도 아닙니다. 바로 성령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출수(出水)의 조건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가만히 앉아 생수가 터져 나오기만 기다리면 될까요? 언제, 어떻게 우리의 배에서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온다는 말일까요? 요한은 39절에서 우리를 잠시 멈춰 세웁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은 사람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오시지 않았다." (요 7:39)
주님께 나아간 사람들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를 테지만, '아직은 그 때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 후에 성령이 내려오셔야만 비로소 물이 흘러나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난 몇 주간 함께 말씀을 나누며 성찰했습니다. 주님이 받으시는 영광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죽음'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으셨기에 성령이 아직 내리지 않으셨고, 생수의 강물도 멈춰 있었습니다. 생명의 물이 출수(出水)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단 한 가지, 주님이 죽으셔야 합니다. 주님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당신의 몸을 온전히 깨뜨리고 열어 놓으셔야 비로소 생수가 흘러나옵니다.
우리는 네 권의 복음서 중 오직 요한만이 기록해 둔 십자가 위 주님의 마지막 순간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온갖 고초를 모두 당하신 후, 마지막 "다 이루셨다"는 말씀을 힙겹게 내어 뱉으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로마 병사 하나가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주님의 옆구리를 찌릅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러나 병사들 가운데 하나가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요 19:34)
창에 찔린 주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터져 나옵니다. 주님을 찌른 병사의 머리 위로, 그리고 주님을 죽음으로 몰아간 대지 위로 그 생수가 쏟아집니다. 어둠이 휘어잡고 있던 땅이 주님의 피와 물을 머금는 순간, 사막이 되어버린 땅의 구조와 성분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나를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올 것이다"라는 당신의 말씀을,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가장 먼저 실천하심으로, 생수가 그 땅에 흐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주님은 부활 승천하셨고, 약속하신 성령이 제자들, 그리고 오늘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우리 위에 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 안의 생명수를 이 사막 같은 세상으로 흘려보낼 수 있겠습니까?
생명의 강물이 출수되는 조건과 방식은 똑같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죽어야 합니다. 나의 이기적인 자아를 깨뜨리고 우리의 몸을 열어젖힐 때, 비로소 우리 안의 생수가 세상을 향해 흘러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몸에서 나온 물이 세상에 흘러야 사막은 초원이 됩니다.
죽음으로 우리의 몸을 열어 생수의 강을 흘려보내야 한다는 말씀을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거친 말을 내뱉고, 세상이 강요하는 성공의 기준을 맹목적으로 따르던 걸음을 멈추고,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예수회 사제 헨리 나우웬은 이를 가리켜 '하향성의 길'이라고 불렀습니다. 나우웬은 "제자란 낮아지는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 그분과 함께 새로운 삶에 들어가는 사람"이며, "복음은 상승 지향의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기본 전제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킨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가 하향의 길을 갈 때, 우리의 몸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그 생수는 무엇보다 먼저, 타인을 향한 '아름답고 다정한 말'이 되어 사막 같은 세상에 뿌려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길게 읽은 사도행전 말씀에서 성령을 받은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나타난 기적이 '말'과 관련이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자기들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갈릴리 너머의 낯선 땅의 언어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은 신비로운 음성이 아니라, 일상의 언어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넘어 너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 땅으로 가서 그들의 언어로 말하고 들으라는 성령의 뜻입니다. 높으신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셨듯, 성령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낮추어 일상의 언어가 되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터져 나온 우리의 일상 언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겠습니까? 사람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고 위로하는 말, 찢긴 마음을 다정하게 감싸 안는 말, 모욕받은 이들의 곁에서 함께 울어주는 생명의 말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시대 거대한 자본과 권력이 만들어낸 언어는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고 역사적 비극마저 얄팍한 유희로 조롱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언어는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며, 혐오의 사막에 사랑의 길을 내는 언어입니다.
성령의 은총을 덧입은 여러분, 생수의 강물을 그 마음 깊은 곳에 가득 품고 계신 여러분!
이제 이 사막 같은 세상으로 나아갑시다. 세상이 누군가를 향해 조롱의 말을 던질 때 우리는 위로의 말을 전하고, 거친 혐오의 언어를 쏟아낼 때 우리는 다정한 사랑의 언어로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줍시다.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성령께서 항상 함께하시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막의 언어를 넘어 생명의 말을 묵묵히 실천해 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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