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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되돌아가는 길(눅24:13-35)

by 청파비둘기 2026. 4. 19.

실패한 여행
작가 앤드루 솔로몬의 여행기, <경험 수집가의 여행>에는 그가 일곱 대륙을 횡단하며 건져 올린 성찰의 조각들이 빼곡히 담겨있습니다. 그중 유독 제 마음을 붙들었던 대목은 그의 남극 여행기였습니다. 정확히는 '남극 여행 실패기'라고 해야겠네요.  

2008년, 솔로몬과 그의 배우자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 남극으로 향했습니다. 함께 배에 오른 이들도 저마다 일생의 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쉽게 갈 수 있는 여느 관광지가 아니라 남극이니 무슨 수식이 더 필요할까요. 항해하는 동안 솔로몬과 나머지 여행객 모두는 남극해의 경이로운 풍광과 희귀한 동식물, 그리고 낯선 이들과의 즐거운 조우를 만끽했습니다. 하지만, 이 여행의 최종 목적지이자 진짜 목표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남극 대륙에 발을 내딛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뜻밖의 난관이 그들을 가로막았습니다. 남극해를 떠다니는 거대한 유빙들이 배의 길을 완전히 차단해 버린 것입니다. 이런저런 방법을 강구했지만, 선장은 항해를 포기했고, 여행 패키지 담당자는 망연자실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실망한 이들은 여행을 떠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앤드루 솔로몬은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분노, 열패감, 속았다는 기분, 자책, 회의감.
배에 오를 때 우리 마음속에는 다시 깨어난 청춘의 희망이 있었지만, 내릴 때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은 늙은이의 불만이었다." (앤드로 솔로몬, 경험 수집가의 여행, 김명남 역, 열린책들, 2019, 553)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생에 단 한 번뿐일지도 모를 그 간절한 여정이, 목적지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채 끝났을 때의 그 무력감을요. 

오랜 갈망과 희망을 품었던 계획이 완전히 무너진 채 돌아가는 길은 참으로 무겁습니다. 시간을 버리고 비용을 허비했다는 상실감보다 더 아픈 것은, 아무런 의미도 건지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정서적 박탈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에서 만난 엠마오로 향하는 두 사람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집으로 향하는 그들의 뒷모습에는  "분노, 열패감, 속았다는 기분, 자책, 회의감"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실패한 여행의 귀환자들'이었습니다. 


임재 속의 부재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였고, 다른 이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9장 25절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였을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이 부부, 글로바와 마리아는  지금 예루살렘에서 약 11km 떨어진 엠마오로 내려가는 중입니다. 엠마오가 그들의 집이었는지, 혹은 잠시 몸을 피할 은신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지금 예루살렘을 등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사람이 안온했던 집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나라, 곧 온 유대 민족이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려온 해방된 이스라엘의 통치가 시작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며, 그 위대한 서막을 이끌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그들이 예수께 얼마나 큰 소망을 걸고 있었는지 절절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만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임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주님을 보며, 글로바 부부는 직감했을 것입니다. '아, 이제 다 왔구나! 목적지가 코앞이구나!' 예루살렘을 뜨겁게 달구었던 함성과 강렬한 열기는 이들의 여정이 곧 영광으로 마무리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 찬란한 열망은 오래가지 않아 서늘한 절망으로 뒤바뀌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십자가 위에서 무력하게 숨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고개가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 글로바 부부의 여정도 그곳에서 멈춰 섰습니다. 이제 해방의 기대는커녕, 처형당한 이의 제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위태로운 상태에 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기다려야하나? 갈팡질팡한 마음으로 예루살렘 언저리에서 서성였을 그들의 시간이 얼마나 착잡했을까요? 주님이 무덤에 안치된 지 사흘째 되던 날까지 아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은 그때, 글로바 부부는 주님을 따르던 다른 여인들로부터 믿기 힘든 소식을 듣습니다. 돌무덤의 문이 열렸고,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메시지였습니다. 급히 사람들이 달려가 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본문 24절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24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이 무덤으로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여인들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우리는 빈 무덤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부활입니다. 그러나 글로바 부부에게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실패의 확증입니다. 이제 미련 없이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이 여행이 마침내 최종적으로 실패했다는 결정적인 마침표였던 셈입니다. 

여기에 비극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부활하시어 세상에 현존하시는데, 이들은 주님이 계시지 않다고 믿었습니다. 이를 신학의 언어로 '임재 속의 부재'라고 부릅니다. 말씀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와 곁에서 말을 걸고 계심에도, 한때 그토록 사랑하며 따랐던 주님을 그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주님은 분명 임재해 계시나, 그들에게 주님은 여전히 부재한 분입니다. 16절 말씀은 이 상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16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부재 속의 임재
글로바와 마리아를 탓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영혼이 절망에 잠식되면 눈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깊은 슬픔은 온전한 판단력을 앗아가고, 익숙하던 일조차 낯설게 만듭니다. 우리 역시 그런 시간을 지나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때 눈 가려진 이를 다그치거나 몰아세워서는 안 됩니다. 이는 그를 더 깊은 심연으로 밀어 넣는 일일 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이 이 부부를 어떻게 대하셨는지 보아야 합니다. 먼저, 주님은 그들의 보폭에 맞춰 나란히 걷기 시작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아직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못한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마음이 무너져 떠나가는 이 부부를 위해 11km를 마다치 않으시고 달려가셨습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길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주님은 부활 이후에도 자신의 가르침대로 사시는 선한 목자 바로 그 분이었습니다. 

둘째, 주님은 그들과 차분히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꾸짖거나 핀잔 주지 않으시고 천천히 구약의 말씀과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풀어주셨습니다. 절망의 무게에 눌려 힘을 잃고 사그라졌던 그들의 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이름 모를 길손의 말씀을 들으며 부부의 마음에 드리웠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합니다. 

셋째, 저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또한 결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함께 식사하셨다는 뜻입니다. 글로바 부부와 주님이 늦은 밤에 엠마오에 도착했습니다. 부부는 주님에게 유숙하기를 청합니다. 주님은 흔쾌히 그렇게하시지요. 30절을 봅시다. 

30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무엇이 떠오릅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성찬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성찬의 본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빵을 떼어 부부에게 나눠주며 축복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걷고, 듣고, 마침내 그분이 떼어 주신 빵을 먹는 순간 부부의 몸에 마음에는 말할 수 없는 뜨거움이 차오릅니다. 마침내 그들의 가려졌던 눈이 비로소 열립니다. 31절입니다. 

31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곁에서 먹고 마시며, 그 먼 길을 함께 걸어온 분이 바로 그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님임을 깨닫는 찰나, 주님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설입니까? 이제야 주님을 알아차렸는데, 주님이 다시 사라지시다니요! 그러나 글로바 부부는 당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부는 주님이 우리에게 말을 거시고 성경을 가르쳐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느냐며 주님과의 신비로웠던 만남을 회상합니다. 주님의 육신은 사라지셨지만, 그들의 영혼에는 선명히 남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을 잘 톺아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부재 속의 임재'입니다. 앞서 글로바 부부는 주님이 곁에 계셔도 알아보지 못하는 '임재 속의 부재'를 겪었습니다. 낙담과 절망이 그들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이 보이지 않아도 그분의 현존을 확신하는 '부재 속의 임재'로 건너갑니다. 이제 '시각'은 그들의 신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마음에 남아 있고, 주님이 나눠주신 빵의 온기가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눈으로만 주님을 찾을 때, 우리는 오히려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육신의 감각으로 주님을 찾는 단계를 지나, 우리 삶에 새겨진 그분의 말씀과 뜻을 따라 몸과 삶으로 살아내는 성숙으로의 이행입니다. 부재 속의 임재하신 주님을 바로 보고, 그 길을 용감하게 걸어갈 때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집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부재 속에 주님의 임재를 알아차린 글로바 부부는 즉시 몸을 일으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말씀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서“ 길을 떠났다고 증언합니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었고, 11km를 걸어왔으니 이미 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으나, 그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 예루살렘으로 달려갑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되돌아가야 할 예루살렘은 패배와 절망, 죽음의 공포가 서린 도시였습니다. 부부는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그 쓰라린 장소로 다시 들어갑니다. 무엇이 이들의 걸음을 이토록 재촉했을까요? 예루살렘에 두고 온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요? 하나님 나라 통치가 다시 시작되는 꿈입니다. 십자가와 함께 끝난 듯 보였으나, 부활과 함께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그 꿈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곳엔 아직 이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슬픔에 잠겨 있을 동료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올 때는 남은 동료들의 안위보다 나의 상황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남아있는 이들이 걱정됩니다. 서둘러 돌아가 그들에게 자기들이 만난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밤이 깊었음에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길 선택한 이유들입니다. 

글로바 부부에게 이제 예루살렘은 고통의 도시가 아니라, 부활의 도시였습니다. 도망쳐야 할 곳이 아니라, 돌아가서 희망을 전해야할 사명의 자리입니다. 부재 속에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증언하는 것, 그것이 그들이 도달해야 할 진정한 그리고 최종 목적지였습니다.  

사랑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가 도망치듯 떠나온 예루살렘은 어디입니까? 주님이 눈에 보이지 않아 낙담했던 장소,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과 경험, 도저히 맞설 수 없어 물러섰던 냉혹한 현실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은 부서진 현실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용기를 내어 보라고 우리를 응원합니다. 그곳에 외롭게 남은 사람들과 함께 손을 잡고 주님의 꿈을 이야기하고, 환대하고, 음식을 나눠먹으라고 독려합니다. 절망의 장소로 다시 가서 부서지고 깨졌던 이들이 모여 서로를 확인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이야기해보라고 말합니다. 그때 잠시 중단되었던 하나님 나라의 꿈을 다시 볼 수 있을것이라고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그것이 설령 되돌아 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나를 괴롭게하는 현실과 독대해야 하는 시간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낭비가 아니며, 의미 없음 또한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지난 16일, 경기도 안산에서 열린 세월호 기억식이 있었습니다. 열 두 번째였습니다. 12주기 기억식에 무려 11년 만에 처음으로 대통령이 참석했습니다. 정말 다행스런 일입니다. 국가가 그 참사에 가장 큰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함께 아픔을 나누겠다는 의지였기 때문입니다. 한 사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곁을 지키기까지 이토록 오랜 인고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그 고통의 장소로 되돌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들, 서로의 손을 맞잡고 텅 빈 자리를 온기로 채웠던 연대의 발걸음이 있었기에 이 일이 비로소 가능했음을 말입니다. 아픔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은 결코 헛된 낭비가 아닙니다. 

여러분, 주님은 그리고 그 분의 길은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재 속에 분명히 임재하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과 몸에 새겨진 주님의 기억을 붙드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낙담케 하는 현실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갑시다. 그곳에서 서로 연대하고 말씀을 나누며, 서로를 환대합시다. 부재 속에 임재하시는 주님 굳게 믿는 이들은, 제아무리 어두운 밤길도 거뜬히 걸어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