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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260504 나는 길, 진리, 생명 (요 14:1-14)

by 청파비둘기 2026. 5. 3.


근심의 저녁
예루살렘 성내, 주님과 제자들이 마주 앉은 저녁 식탁이었습니다. 식사 중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당부를 건네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다정한 음성과는 달리, 제자들의 눈빛은 흔들렸고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습니다. 평온해야 할 식탁 아래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이 심상치 않은 밤의 분위기를 이해하려면, 시간을 나흘 전으로 되돌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의 풍경을 살펴야 합니다.

주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던 날, 도시는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였습니다. 수많은 인파가 쏟아져 나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 부르며 환호했습니다. 제자들은 무언가 거대한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그리고 자신들이 그 영광스러운 사건의 한가운데 서 있음을 직감하며 벅차올랐습니다.

그 환호의 시간이 지나고 유대 민족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을 하루 앞둔 저녁이 찾아왔습니다.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여든 인파들 사이로 주님에 대한 소문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곧 세상이 뒤집힐 만한 대단한 일이 벌어지리라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새시대의 기대감이 최고조에 달한 그날 밤, 주님은 제자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말씀을 쏟아내기 시작하셨습니다.

식사 도중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신 주님은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민망하고도 낯선 세족식이 끝난 후, 주님은 더욱 충격적인 말씀을 꺼내십니다. 너희 중 하나가 당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섬뜩한 예고였습니다. 말씀은 이미 사탄이 가룟 유다의 마음에 들어갔다고 증언합니다. 유다는 말 문을 닫은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남겨진 제자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님, 나는 아니지요?"라며 서로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깊은 절망에 빠뜨리는 결정적인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이제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고, 나는 곧 너희들을 떠나갈 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었습니다. 주님은 마치 영영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애틋한 작별 인사마저 남기셨습니다.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자, 수제자인 베드로가 다급하게 묻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직전에 기록된 요한복음 13장 36-27절 말씀입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호기로운 외침이었지만, 주님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베드로는 단호한 주님의 대답 앞에 아무 말도 잇지 못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시작되기 직전의 배경입니다. 주님은 작별의 말씀을 나누고 계시지만, 제자들은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가룟 사람 유다는 스승을 팔아넘기러 자리를 떴고, 남은 이들은 불안에 떨고 있으며, 베드로는 책임지지도 못할 장담을 허공에 흩뿌립니다. 십자가 고난을 불과 하루 앞둔, 이른바 '최후의 만찬'이라 불리는 식탁의 씁쓸한 민낯입니다.


베드로의 장담
우리는 종종 주님의 길을 걷겠다고 거창하게 다짐하지만, 정작 주님의 깊은 마음은 헤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죽기를 각오한 베드로의 결기 앞에 주님은 왜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며 선을 그으셨을까요? 목숨을 바치겠다는 용기는 가상하지만, 정작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베드로는 아직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이 향하시는 목적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필시 베드로는 주님이 영광스러운 왕의 길을 가신다고 착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목숨 걸고 그 길을 따르면, 훗날 그에 상응하는 달콤한 보상이 주어지리라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걸어가신 길이 십자가라는 심판대임을 목격한 순간, 그는 목숨은커녕 이름 모를 문지기 소녀의 추궁 앞에서조차 무너져 내려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맙니다. 목숨을 걸겠다는 허망한 장담보다 먼저 치러야 할 일은, 주님의 길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그분의 십자가가 어느 자리에 세워져 있는지를 헤아리는 일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저 무구한 얼굴과 섣부른 다짐을 보며 몹시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이 다정한 위로가 정작 가장 절실했던 분은 제자들이 아니라, 홀로 십자가의 무게를 견디셔야 했던 주님 자신이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흔들리는 제자들의 마음을 다독이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요 14:2-4)

주님은 제자들이 영원히 거할 안전한 처소를 마련하러 가는 길이니 안심하라고, 그리고 너희는 이미 내가 가는 그 길을 알고 있다고 일러주십니다.


도마의 장담
이번에는 또 다른 제자 도마가 불쑥 나섭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주님은 도마의 당돌한 질문에 다시 한번 타이르듯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요 14:6)

그러나 도마는 여전히 주님의 뜻을 알아채지 못한 채, 마치 따지듯 묻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도마의 말을 뒤집어 보면 이렇습니다. '주님, 제게 명확한 목적지를 보여주십시오. 하나님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주십시오. 그러면 지체 없이 그 길을 따라가겠습니다!'

명확한 증거를 요구하는 도마의 외침은 앞선 베드로의 장담과 공명합니다. 배드로가 주님의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른채 목숨을 걸겠다고 장담했다면, 도마는 목적지만 확실히 보여주면 완벽하게 따라갈 수 있다는 또 다른 형태의 장담이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 달라는 도마의 도전은 오늘날의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얕은 마음을 폭로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명확한 응답과 확실한 방향을 제시해 주시기만 하면 손쉽게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주님의 길이 분명하다는 확실한 증거가 하나라도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 길을 달려가겠다고 거창하게 다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주님의 책망이 우리의 폐부를 찌릅니다.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느냐?" (요 14:9)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말씀을 통해 주님이 어떤 분인지, 어떤 삶을 사셨는지 충분히 본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길을 모를 수 없습니다. 아니, 가야 할 길을 모르겠다고 핑계 대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나와 동행하며 나를 보았다면 이미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1절도 봅시다.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요 14:11)

주님이 제자들과 동고동락하며 행하셨던 일들을 떠올려 보라는 부탁입니다. 그 일들이 무엇입니까? 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아무도 곁을 내어주지 않는 병자들에게 다가가 손을 얹으신 일입니다. 불의한 권력을 향해 준엄하게 꾸짖으시고, 무력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일입니다. 칼과 창이 아닌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장 낮아진 곳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신 일, 바로 그것 아닙니까? 이 일들을 보았다면 너희가 아버지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길과 진리와 생명인 이유
제자들은 주님의 곁에서 이 모든 일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그분의 가르침을 귀로 들었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를 통해 주님의 온 생애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가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탄식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과 나의 기대가 서로 어긋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이 보여줄 길은 어쩌면 더 크고 거창한, 성공과 안락이 보장된 길이라고 믿고 싶은 것은 아닌지요? 그날 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알아 듣지 못했던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밤낮을 함께했지만, 주님의 행보는 그들이 상상했던 '메시아 상'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섬김의 삶을, 그저 덕스러운 성품쯤으로 취급해 버렸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주님이 로마를 무찌르고 새로운 제국의 왕이 되시면, 자신들도 그 나라의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세속적인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께 정답을 요구하지만, 정작 우리가 원하는 길은 '사랑과 희생, 환대와 십자가'가 아니라 '나의 성공과 안위, 번영과 성취'인 경우가 아닌지 진지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그 모든 삶의 궤적이, 곧 하나님 아버지가 일하시는 본질 그 자체입니다. 주님이 살아오신 삶 안에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화려한 성취를 목적지로 삼지 않습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이미 우리 앞에 선명하게 놓여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묵묵히 행하셨던 그 사랑의 일들을, 오늘 나의 일상에서 느리더라도 조금씩 따라가는 것. 바로 이것이 베드로와 도마가 놓쳤던, 그리고 우리가 잊고 살았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선언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저술가이자 인권 운동가인 레베카 솔닛은 길을 걷는다는 행위에 대해 이렇게 통찰합니다.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먼저 간 사람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는 것, 학자나 탐정이나 순례자처럼 먼저 간 사람의 뒤를 밟는다는 것이다. (...) 같은 공간을 같은 방식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같은 생각을 하는 방법, 같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따라 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행동을 흉내 내는 연기가 아니라, 그 누군가의 영혼을 닮기 위한 노력이다." (레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김정아 역, 반비, 2017, 117.)

그리스도인의 삶을 순례에 비유하곤 합니다. 순례란 미지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먼저 걸어간 길을 나도 조용히 뒤따라 걷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순례의 길에는 반복과 모방이 필요합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놀라운 기적을 창조해 내거나 단숨에 완벽한 목적지에 도달하는 조급한 경주가 아닙니다. 거룩한 반복과 모방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걸어가신 그 길을, 사도들이 뒤따르고,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걸어냈듯, 이제는 우리가 그들의 발자국에 나의 발을 포개어 걷는 일입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우리의 모난 삶과 영혼이 우리보다 앞서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조금씩 닮아가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길 자체가 목적지'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막막한 현실 앞에서 당장 내일의 길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짓눌려 첫걸음을 떼는 것조차 버거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오늘 본문 14절의 약속을 마음 깊이 새기십시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길을 잃었다고 느껴질 때면, 가만히 눈을 감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주님이 이 땅의 소외된 자들에게 어떤 사랑을 베푸셨는지, 십자가를 향해 어떻게 묵묵히 걸어가셨는지 떠올리며, 나도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분명, 그 좁은 길을 기꺼이 살아낼 넉넉한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보면, 우리도 때로는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고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쓰러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조차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실 때 발을 헛딛고 넘어지며 진땀을 흘리시며 세 번이나 쓰러지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결코 내던지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품고 걸어가셨습니다. 그 험난한 길이 '진리'를 향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길의 끝에서, 처참한 죽음을 뚫고 찬란한 부활의 생명이 피어났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걸어가야 합니다. 이 환대와 사랑의 길, 자기 비움의 길을 확신을 가지고 걸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이 길의 끝이 허무한 죽음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생명과 부활로 이어져 있음을 우리가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끝없는 경쟁과 탐욕 속에서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세상은 저마다 더 높고 편안한 길이 정답이라며 우리를 유혹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품고 십자가로 이어진 진리와 생명의 길을 향해 뚜벅뚜벅 담대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허망한 장담은 필요 없습니다. 가시적인 증거가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저 주님 먼저 가신 길을 우리도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내딛어 걸으면 됩니다. 우리 함께 걸어갑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