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청 말씀 나눔

미지(未知)와 미답(未踏) (행 16:9-15)

청파비둘기 2025. 5. 25. 15:28

베드로에서 바울로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 저는 모처럼 휴가를 내어 아내와 아이와 함께 강원도 인제의 한 자연휴양림을 찾아 쉬었습니다. 산중의 고요가 참 좋았습니다. 도시의 소음은 사라졌고, 산이 만들어내는 소리-나뭇가지를 지나가는 바람소리, 작은 새들의 지저귐, 냇가의 물소리만 가득했습니다. 그때 제가 든 생각이 '아, 이곳에 우리 청년들이랑 함께 와서 기도하면 좋겠다'였습니다. 이곳에서 묵상하며 산책한다면 우리의 신앙이 한 뼘 정도 자라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제가 청파교회 청년부의 담당 목회자이자 여러분의 신앙 동료로서 누군가 제게 청파교회 청년 목회의 철학 혹은 목표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저는 단연코 여러분의 믿음과 신앙의 '성숙'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신앙이 아름답게 자라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늘 고민합니다. 도움이 된다면 어떤 형태로든 시도하려 합니다. 책을 읽다가 이 책은 참으로 도움이 되겠다 싶으면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고, 함께 기도할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다 지난 사순절 서른 번의 아침 침묵기도도 함께 해 보았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신앙이 성숙하고 단단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기쁨이고 제가 여러분들을 맡겨주신 하나님의 의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숙이 목회자 한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믿음과 신앙이 언제나 상승의 길로만 나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롤플레잉 게임을 해보신 분 계시지요. 일정량의 경험치를 쌓으면 레벨이 올라가고 각종 스탯이 적절하게 상승합니다. 성장할수록 강력해지고 능력도 많아집니다. 제아무리 강력한 적이 앞을 가로막아도 여기저기서 경험치를 쌓고 레벨을 올리다 보면 언젠가는 그 적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일생은 다릅니다. 나아지는 것 같다가도 모든 것이 수포가 되기도 하고, 성장의 길이 오히려 역행하기도 합니다. 지독한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온 듯하다가도 이내 어둠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게임과 삶의 차이입니다. 인생은 게임과 같기가 어렵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요. 처음 교회라 일컫는 예루살렘 교회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성장한 것 아닙니다. 지하실 교회에서 시작했다가 상가교회로 레벨이 올라가고, 교회 건물 건축하고, 멋들어진 십자가 첨탑을 세우는 식으로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난 몇주간 살펴보고 있는 사도행전의 처음교회도 그렇지 않습니까? 복음의 승리만이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씀의 행간 사이사이에는 피로 얼룩진 패배가 서려있습니다. 교회는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고, 교우들은 흩어졌으며, 거짓 복음을 증거하는 이들이 교회를 안에서부터 뒤흔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 교회는 언제나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가 놀라운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절망스러운 벽에 가로막혔을 때, 교회가 한계에 봉착했을 때, 언제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이들을 사용하셨다는 점입니다. 지난 주 우리가 함께 성찰한 사도 베드로와 로마 백부장 고넬료, 그리고 환난 가운데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를 떠올려 보십시오. 베드로는 내가 나임을 언제까지나 입증해주리라 믿었던 유대 민족주의와 율법을 뛰어넘음으로, 로마의 고넬료는 자국이 식민 통치하고 있는 이를 섬기고 그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폭력적인 박해로 만신창이가 된 예루살렘 교회는 두 사람의 만남을 넉넉히 인정함으로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설립되었고, 이는 교회 선교의 출발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째 회심을 통해 참된 주님의 사도가 되었고, 고넬료는 이방인으로 최초의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제부터 설립되게 될 소아시아와 그리스 및 유럽에 교회들의 든든한 모교회가 자라났습니다. 베드로, 고넬료, 예루살렘 교회 모두 자기 한계를 넘어섰기에 복음은 세상으로 뻗어 나갈 수 있었고, 건강히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개인과 공동체 모두 더 나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자기 자아에 갇힌 채 아집과 고집을 좋은 신앙인 양 포장하는 오늘날 한국 교회에 왜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지, 어째서 교회가 신뢰를 잃어버렸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자기 안에 갇힌 사람들에게서 복된 소식이 밖으로 나갈 리 만무합니다. 베드로가 율법 준수라는 유대 민족의 정체성을 고수했다면, 고넬료가 자기가 통치하는 유대인의 말을 무시했다면,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을 죄인으로 여기는 유대 전통을 우선시했다면 복음은 1세기의 작은 종교 운동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은 사람은 자기 한계의 문을 열고 밖으로,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복음은 본질적으로 외부를 향함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불안한 출발
복음은 안에서 바깥이라는 지향이 설정되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예루살렘 바깥 선교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사역의 중심에는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동역자인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를 나와 지중해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를 가리켜 바울의 1차 선교 여행이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3장과 14장이 바울의 첫 번째 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는 그야말로 대단했습니다. 바울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들어가는 동네마다 소동이 일어났고, 그에 따라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폭력적인 반대에도 직면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환영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이를 치유하는 사건도 바울을 통해 일어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바깥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세우고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아직은 작고 연약한 모임이었지만 교회는 분명히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1차 선교여행에서 가장 귀한 열매는 그를 통해 사람이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가 한 명도 없는 불모의 땅에서 주님을 아는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벅차고 기뻤습니다. 박해에 직면하고 목숨을 잃을 위험에도 처했지만, 새롭게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을 보며 고된 시간을 넉넉히 이겨냈습니다. 성공적인 사역을 마친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로 다시 돌아와 선교 내용을 보고하고 재정비를 합니다. 

사도행전 15장이 이 내용을 다룹니다.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 리더십은 이방인 선교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정리했고, 바울에게 힘을 보태주기로 결정합니다. 이제 교회는 온 세상으로 뻗어가는 복음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했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주신 말씀,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는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이 실현되는 모습을 목도했습니다. 이제 어느정도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떠날 준비를 마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15장 36절입니다. 

15:36   며칠 뒤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파한 여러 도시로 신도들을 다시 찾아가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살펴 봅시다."

바울이 떠나려 하는 두 번째 여행의 목적은 자신이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 것, 다시 말해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세웠던 공동체를 다시 방문해서 그들을 살펴보고 그들을 격려함이었습니다. 첫 사역을 통해 세워진 교회의 교우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바울에게 얼마나 설레고 기쁜 일이었을까요? 마찬가지로 교회 공동체 또한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도, 죽음에서 생명의 길을 가르쳐준 바울을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 갈 곳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3년간 체류하고 귀국할 때 내 가족, 나의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있으리란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귀국을 앞두고 이런저런 일정을 잡을 때, 한국의 제 친구들이 제가 온다는 소식을 기쁘게 여기고 저와 함께 갈 곳을 미리 다 준비해 놨다며 어서 오라는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저는 기뻤습니다. 바울에게나 그리고 바울이 세운 교회의 교우들 역시 이 두 번째 만남을, 손을 꼽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야할 목적지와 만나야할 사람이 분명했던 그래서 기쁨과 감동으로 예비된 바울의 두 번째 여행이 시작부터 삐걱했습니다. 동역자 바나바와 의견이 충돌해 갈라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바나바 대신 실라를 선택해 여정을 떠나기로 합니다.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바울과 실라는 계획한 여정을 떠났고 디모데라는 신실한 청년을 만나 동행합니다. 바울의 두 번째 여정은 그 시작이 다소 껄끄러웠지만 비교적 안정적으로 개시됐습니다. 계획한 장소에 도달했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해후하고 복음을 가르치고 교회를 견고히 했습니다. 모든 여정은 바울의 본래 계획 안에서 작동되었습니다. 


가로막힌 길
이렇게 잘 계획된 여행에 불협화음이 끼어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여행 전체 일정이 망가지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사람간 갈등이 아니라 무려 성령께서 직접 막으셨습니다. 성령이 바울의 여행을 중단 시키셨습니다. 16장 6절입니다. 

6a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성령이 막으시므로,

바울은 아시아, 그러니까 본인이 세운 교회와 사람들을 만나고 돌보는 일을 계속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애초의 계획이었고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성령은 이 여행 자체를 멈추고 싶어 하십니다. 바울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주님, 목자가 양을 돌보러 간다는 왜 막으십니까?' 이렇게 생각했겠지요. 그래서인지 바울은 일단 여정을 강행합니다. 성령이 아시아로의 진출을 막았음에도, 바울은 브루기아, 갈라디아 지방을 여행하고, 7절에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지만 주님의 영이 계속해서 길을 막으셨습니다. 바울은 주님 때문에 발이 묶여 버렸습니다. 이때 성령께서 환상 하나를 보여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들은 말씀입니다. 

9   여기서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나타났는데,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밤중의 바울에게 환상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밤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밤은 답답함과 암담함의 밤입니다. 바울의 심정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계획이 완전히 틀어진 여행의 어느 밤하늘 아래에 서성이는 바울을 말입니다. 그에게 이 밤은 어느 때보다 어둡고 답답합니다. 날이 밝아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그는 여정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막으시기 때문입니다. 계획에 빈틈이 없었고 목적도 선한 것에 닿아있었는데 어째서 여전히 밤중인가. 주님은 왜 나의 이 선한 의도를 막으실까? 사도 바울은 지금 사도 베드로와 또 다른 형태의 한계에 직면하고 말았습니다. 바울 자신은 자신의 선교 여정이 찾아오지 않으리라 믿었던 암담한 벽, 영혼의 어두운 밤에 맞닥뜨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밤을 맞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했고, 목적도 바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자부하는 삶 가운데 찾아온 영혼의 밤을 맞을 때 우리는 당혹스럽습니다. 그때 신앙인의 자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주님께서 막으시면서 보여주시는 것에게 초점을 맞추기입니다. 역설적 표현이 맞습니다. 막으시면서 동시에 보여주신다니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영혼을 어둔 밤으로 이끄시어 모든 길을 막으실때 보여주시는 것에 우리의 신앙감각을 집중해야 합니다. 일전에 사순절 아침순례 기도에서 소개한 바가 있는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혼들이 이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때가 있다. 즉 하느님께서 그들을 (영성의 길에서 묵상을 하는) 초심자들의 위치를 벗어나 (이미 하나님을 감각할 수 있는)데에까지 나아가도록 하는 때이니, 인간이 하느님과 영스러운 합일을 이루는, 즉 완전한 이의 위치에까지 이 길을 통하여 도달하게끔 하시기 때문이다." <어둔 밤> 십자가의 성 요한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하길 하나님을 감각/관상할 수 있는 이들을 더 깊은 차원에 들이시기 위하여 그들의 영혼을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게 만드실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에 갇힐 때 적막에 휩싸혀 두려움이 엄습할 때 오히려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기에 더욱 또렷해지는 음성과 분명해지는 형상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어둠 속에서 그 음성과 형상을 보아야 합니다. 


미지와 미답의 길로
사도 바울은 그의 어두운 밤에서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를 보았습니다. 난생 처음 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전혀 들어본 바 없는 소리였습니다. 사도의 길을 가로막으시고 보여주신 바가 바로 이 마케도니아 사람과 그의 음성입니다. 마케도니아 사람이 말합니다. '이곳으로 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바울은 자신에게 드리운 어둔 밤에 찾아온 이 사람과 그의 부탁이 하나님께서 막으시면서 동시에 보여주시는 길이라 믿었습니다. 10절의 고백은 그 증거입니다. 

10   그 환상을 바울이 본 뒤에,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려고 하였다. 우리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즉시로 바울은 자기가 세웠던 모든 계획을 포기합니다. 만나기로 한 사람,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들을 포기하고 가고 싶었던 믿음의 공동체, 자기가 혼신의 힘을 다해 세웠던 공동체로 가고 싶은 열망을 단념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바울의 여정은 완전한 미지(未知)요 미답(未踏)입니다. 가야 할 장소도 정해지지 않았고, 만나야 할 사람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통제와 계획을 내려놓았습니다. 그의 선교는 이제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가야 할 곳을 잃어버린 사도는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나야 한단 말입니까? 

가야 할 곳을 잃었다면, 가라는 곳으로 가면 됩니다. 바울 앞에 놓인 길이 미지와 미답이기에 오롯이 성령의 이끌림에 따라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교 여정의 통제권을 성령께 의탁한 순간부터 바울은 여정의 리더가 아니라 성령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바울도 베드로와 같이 성장과 성숙을 이뤘습니다. 자기 한계를 뛰어넘어 이방 교회 태동의 거름이 되었던 베드로처럼, 바울 역시 미답과 미지의 길로 자신의 발걸음을 전환함으로 교회는 자기들이 상상할 수 있었던 최대의 경계 그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미답과 미지가 두렵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여정을 이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계획하지 않은 첫 번째 목적지는 드로아, 사모드게, 네압볼리라는 도시를 지나 빌립보에 이르렀습니다. 빌립보는 바울의 계획에 없던 도시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바울을 빌립보로 이끄셨고, 그곳에서 마찬가지로 만남이 계획되어 있지 않았던 여인 루디아를 만납니다. 루디아 역시 바울이라는 사람을 만날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무엇보다 기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과 성령에 이끌려 미지와 미답으로 나온 이가 만났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과 마찬가지로 헬라 문화권에서의 선교 역사에 중대한 시작이 되었습니다. 훗날 루디아는 바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애초에 목적지가 아니었던 빌립보에 아름다운 공동체가 세워졌고 바울이 이 빌립보에 보낸 편지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지는 신약 성경 빌립보서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영혼의 어두운 밤을 보내고 계십니까? 미답과 미지의 길로 가십시오. 나의 신앙이 정체된 것만 같고, 인생의 여정이 그저 그렇거나 갈팡질팡하고 계십니까? 익숙한 길로 되돌아가지 마시고 미답과 미지의 길로 가보십시오. 여러분,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기도가 여러분에게 미답과 미지의 길입니다. 기도하십시오. 성경이 생경합니까? 그렇다면 말씀이 여러분의 미답과 미지의 길입니다. 성경을 펴고 말씀을 읽으십시오. 고난받는 이들과 연대의 활동을 해본 적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지갑을 열어 후원을 해보시고 연대의 현장에 나가보십시오. 그곳이 여러분의 미답과 미지입니다. 여러분이 미답과 미지의 길에 설 때에 성령께서 상상하지 못했던 곳에 이르게 하시고 예상치 못했던 이들을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통해 막힌 길이 열릴 것이고,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 빛의 세계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