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청 말씀 나눔

260517 주님의 기도 (요 17:1-11)

청파비둘기 2026. 5. 21. 11:40

주님의 마지막 기도
지난 두 주간, 우리는 주님과 제자들이 마주한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의 말씀들을 나누었습니다. 주님은 여기에서 자신이 곧 너희들을 떠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잠시간 나를 볼 수 없을테지만 두려워 말라, 길과 진리와 생명을 따르면 결국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며, 또한 나의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너희가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이 어두운 세상이 주님을 알아보게 되리라는 당부도 남기셨습니다.

유월절 하루 전, 그러니까 십자가의 고난을 직전에 둔 그 저녁 식탁에서 주님이 쏟아내신 많은 말씀은 결국 하나의 사실로 수렴됩니다. 이제 내가 너희와 더는 동행할 수 없다는 것, 곧 당신의 '부재'의 선포였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 당시 제자들은 이 말씀의 온전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두려웠고, 당황했으며, 어쩌면 화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주님 역시 당신의 마지막 당부가 제자들의 귀에 가닿지 않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모든 말씀을 마치신 후, 당신의 간절함을 있는 힘껏 끌어모아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 바로 그 기도문입니다.

주님의 이 기도는 우리에게 무척 소중한 영적 자산입니다. 성서일과를 따라 오늘은 11절까지만 읽었지만, 실은 요한복음 17장 전체가 주님의 기도인데, 이는 공적인 자리에서 주님이 남기신 유일하게 완결된 형태의 기도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행적과 말씀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정작 주님이 직접 소리 내어 말씀하신 기도문 자체는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주님이 남기신 기도문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주기도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도문이지만, 엄밀히 말해 이 기도는 '기도하는 법을 알려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응답하신 가르침이자 표본이었습니다. 이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장면을 제외하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짧은 절규 -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나의 아버지,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는 것이면,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자기들이 어떤 죄를 범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신 짧았던 몇마디 말씀들을 제외하곤, 온전한 형태의 기도문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요한복음 17장은 공적인 자리에서 주님이 직접 입술을 열어 완성하신 기도문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귀중한 말씀입니다.


아버지, 영생, 그리고 영광
이 귀한 기도의 시작은 이러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1절)

주님은 눈을 감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보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아버지"를 부르십니다. 이 첫 마디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주님의 시선과 발걸음, 그리고 모든 지향이 처음부터 마지막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오직 아버지를 향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성공회 신학자이자 영성가 이블린 언더힐은 주님의 시선이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향해" 있었으며, 죽음 앞이라는 고통스러운 자리에서조차 "만물을 고요하게 다스리시는 아버지의 현존을 감지"하고 계셨다고 통찰했습니다. (이블린 언더힐, <아바>, 황윤하 역, 비아, 2026, 30). 

아버지라는 부름 뒤에 이어지는 "때가 왔습니다"라는 고백 또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여러분, 이 기도가 시작되는 순간, 주님의 눈을 뜨고 계셨던 주님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십자가가 선명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그 누구도 볼 수 없고 알아차리지도 못한 십자가를 오직 주님만이 보셨습니다. 그 고통이 점점 임박해 옴을 온 몸으로 느끼며, 오직 아버지와 연결되어야만 그 고통을 감당하실 수 있음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3절이 증언하는 '영생'의 비밀입니다. 

영생을 그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으로만 받아들이면, 그 풍성한 의미는 납작해지고 맙니다. 영원한 삶이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관계의 '깊이'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 앎을 맺을 때, 우리는 영원한 삶의 의미를 깨닫고 비로소 영광으로 나아갑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영원한 삶은 끝없는 삶이 아니라, 무한한 깊이의 삶입니다. 

주님은 "아버지"를 부르시고, "영생"의 비밀을 말씀하신 뒤, "영광"을 구하십니다. 사실 이 기도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영광'입니다. 때가 되어 아들이 영광을 받고, 그로 인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달라는 것, 그리고 이 영광을 나의 사람들도 누리게 해달라는 것이 기도의 중심입니다.

'영광'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마음속으로 영광을 되뇌어 보십시오. 빛나고 화려한 상태, 지금보다 훨씬 나아진 삶의 형태가 떠오릅니다. 기도를 듣던 제자들도 필시 같은 마음이었겠지요.

'우리의 선생님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영광스럽게 변한다고? 이거 정말 멋진 일인걸?! 우리도 영광스럽게 변할테니 말이지!'

영광이라는 말은 제자들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사랑한 원리였습니다. 이른바 '영광의 신학'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이 신학의 핵심은 주님의 승리, 그리고 그 승리의 열매를 우리도 누림에 있습니다. 가슴벅찬 신학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영광의 신학은 예수를 믿고 기도하여 세속적인 성공과 성취를 이루어내는 서사로 아주 쉽게 환원시키는 신학적 전거로 작동되기도 합니다. 주님이 당신의 마지막 기도에서 부르짖었던 영광이 과연 세상이 그토록 바라는 그런 류의 영광일까요? 4절의 말씀을 봅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4절)

여기서 영광의 참된 뜻이 드러납니다. 영광은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완성해 낸 결과입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영광은 곧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영광의 신학이 아니라, '십자가의 신학'입니다. 사실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은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영광은 없습니다고 논했습니다.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라는 고난을 전제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고난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을 때, 영광이라 부르는 모든 것은 욕망의 다른 이름일 뿐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영광은 상승이 아니라 하강이며, 성취가 아니라 포기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고난을 겪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셨습니다. 이 역설적인 일련의 사건이야말로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라는 말씀의 온전한 성취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 됨으로
그렇기에 요한복음이 들려주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시선을 완전히 바꿀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가 믿음과 신앙을 통해 추구해야 할 영광은 오직 주님의 수난에 동참할 때 비로소 주어집니다. 비록 당장 제자들은 이 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훗날 성령이 오시면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을 주님은 믿으셨습니다. 

잠시 오늘 우리가 읽은 2독서인 베드로의 서신으로 눈을 돌려봅시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과 13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교회를 향해 "시련의 불길이 일어나더라도 이상한 일처럼 놀라지 마십시오"라고 권면합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라고 독려합니다. 

여러분, 참으로 놀랍지 않으십니까? 오늘 복음서의 배경이 되는 유월럴 하루 전 그날 밤, 주님의 마지막 기도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베드로가, 훗날 십자가의 고난이 곧 영광임을 철저히 깨달은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베드로의 중심에 십자가가 올바르게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주님의 고난을 온전히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날 저녁 당신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베드로를 끝까지 믿으셨기에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믿고 계십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따라가며 영광에 이를 것을 말이지요. 

물론 이는 매우 힘든 결단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주님이 지금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9절에서 주님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의 범위가 좁아진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는 세상을 포기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기심과 폭력으로 뭉친 '세상의 방식'에 동화되지 않도록 우리를 지키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주님은 적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상을 맨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우리를 위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기도의 말미에 등장하는 11절의 간구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은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이듯, 오늘 이 말씀 앞에 선 우리도 하나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십니다. 여기서 하나 됨이란, 차이가 지워진 획일적인 집단을 말하지 않습니다. 상처 많고 모자란 구석투성이인 사람들이, 자기 모습 그대로 아버지 품 안에 모여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모욕당하신 그 연약한 주님과 하나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잘난 자와 못난 자, 병든 자, 무시당하는 자, 나와 신앙의 결이 완전히 다른 자들과 기꺼이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부둥켜안고 영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님의 가장 절박한 심정이자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이 마음을 우리의 삶 위에 포개어 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이기는 자들이 됩니다. 

사랑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나눈 기도는 주님이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향해 남기신 연서(戀書)입니다.

'나는 이제 참된 영광을 향해 떠난다. 내 영광은 십자가라는 철저한 낮아짐이며, 죽음을 통해 완성되는 영광이다. 너희 역시 이 영광에 이르기를 바란다. 그 길이 비록 고단할지라도, 아버지가 너희를 지키심을 잊지 말아라. 보혜사 성령을 보내줄터이니, 서로 다르다고 밀어내지 말고, 품고 끌어안으며 울어주어라. 부디, 사랑하며 살아라.'

이 절절한 사랑이 오늘 우리가 성찰한 요한복음의 주님의 기도에 스며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오늘 우리를 향한 기도임을 또한 잊지 마십시오. 이 험악한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삽시다. 서로를 긍휼히 여기며, 시련을 기쁘게 견뎌냅시다. 주님이 우리를 먼저 품으셨듯 말입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지난 목요일은 주님의 승천일이었습니다. 오늘 부활절 마지막 주일은, 잠시지만 주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침묵의 시간입니다. 교회력에선 주님이 이 땅에 계시지 않음을 기억하는 세 가지 절기가 있지요. 예수의 탄생일까지의 대림절,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직전 침묵의 토요일, 그리고 오늘 승천 후 성령이 강림하기까지의 짧은 기간입니다. 이 기간들은 모두 주님의 부재함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버려진 듯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재는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강림을 위한 위대한 기다림입니다. 

주님의 성령은 우리 가운데 다시 오시며, 또한 곁을 내어줄 아름다운 공동체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홀로 남겨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성령강림의 시간을 기다리며 서로에게 든든한 곁이 되어줍시다. 고난을 통한 영광의 완성은 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될 때에만 이룩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하늘로 오르기 전 마지막 당부를 여러분 평생에 새겨두십시오. 세상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갈 때에 생명과 영광이 있음을, 그 길을 함께 가라고 여러 신앙의 동료들을 주었음을, 그렇게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할 때, 이 참혹한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살아갈 수 있음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