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요 14:15-21)
뒤틀린 세상
우리는 지금 교회력으로 부활 절기의 후반부를 지나고 있습니다. 교회 전통은 부활절 마지막 몇 주간을, 역설적이게도 '주님의 부재(不在)'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과 당부를 남기신 채 하늘로 오르시어, 그 육신이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 절기가 끝나면, 인간의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주님이 계시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비신앙적이라 여길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입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며 영원토록 함께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이 하늘로 오르신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며,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는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미 오신 주님을 찬양하는 공동체인 동시에, 깊은 기다림의 시간 속에 머무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매주 모여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말씀을 나누는 이유 역시, 육체적 부재 속에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는 더욱 거룩함을 지키며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말과 행동을 가지런히 하고 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거룩함의 책무를 짊어지고 이 어두운 세상을 통과해 나갑니다.
지난주, 우리는 참으로 듣고 싶지 않은 끔찍한 소식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밤늦게까지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한 여고생이, 일면식도 없는 어느 남성에게 습격당해 소중한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소중했던 딸을 잃었던 그날 밤, 가족들이 겪었을 공포와 절망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세상살이가 재미없어 범행을 저질렀다는 범인의 변명 앞에서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마저 치밉니다.
저는 이 사건을 접하는 순간, 정확히 10년 전 이맘때 일어났던 또 다른 비극이 떠올랐습니다. 2016년 5월 17일, 언제나 인파로 북적이는 강남역 한복판에서 한 여성이 역시 일면식 없는 남성에게 무참히 살해당했습니다. 10년 전의 그도, 그리고 이번 사건의 범인도 모두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이를 표적으로 삼아 인간으로서 저질러서는 안 될 끔찍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고는 그 책임을 버젓이 사회로 돌렸습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해서 자신의 폭력이 정당하다고 항변합니다. 참으로 비겁한 변명입니다. 두 사건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바가 아닙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우리 사회의 혐오 범죄는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몸집을 불려가고 있음을 우리는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기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야말로 주님이 계시지 않는 듯,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영혼을 품어주시고, 남겨진 가족들의 찢어진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처럼 세상이 뒤틀릴수록, 그리스도인들은 '풀어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더욱 굳게 믿으며 우리의 삶으로 그 진리를 증언해야 합니다. 자기 욕망과 혐오에 함몰된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중심에 오직 자기 자신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혐오에 혐오를 덧대며 세상을 더욱 기괴하게 비틀어버립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 세상의 참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연민과 사랑, 그리고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각오를 마음 한가운데 둡니다. 하여 비틀어진 세상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풀어내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세상은 우리가 보여주는 삶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을 성찰하며, 주님을 보지 못하고 어둠에 잠식당해 가는 이 세계 속에서 '주님의 살아계심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보혜사와 함께 사랑의 계명을 지켜라
오늘 복음서 말씀은 지난주 본문에서 이어집니다. 십자가 고난을 하루 앞둔 저녁,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남기십니다. 15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주님의 계명을 지켜내는 치열한 순종입니다.
그렇다면 그 계명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요한복음 13장에서 이미 그 계명을 명확히 일러주셨습니다. 34절과 35절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요 13:34-35)
주님이 주신 최후의 계명은 다름 아닌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누구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그를 사랑해 내는 것입니다. 이 계명이 위대한 이유는,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일, 그 자체가 곧 가장 탁월한 전도이며 선교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의 본성을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생산과 소비에만 함몰된 현대 사회를 향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이라고 갈파했습니다. 그는 "현대인이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신앙을 갖는 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하는 합리적 신앙"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에 대한 이해이자 내 한계를 넘어서려는 '용기와 투쟁'으로 본 프롬의 통찰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기적인 현대 사회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고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사랑할 수 있는 힘과 가능성을 보내주셨습니다.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분, 우리의 위로자요 보호자이시며, 우리를 전적으로 변호하시는 분, 바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보혜사(保惠師)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나는 곧 너희를 떠나지만, 나를 대신할 보혜사 성령이 올 것이다. 그와 동행하며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여 이 어둠의 세상을 살아가라"고 당부하십니다. 심지어 이 보혜사는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할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여러분, 육신을 입으신 주님은 더 이상 우리 눈앞에 계시지 않습니다. 교회는 육체적 주님의 부재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곁에는 성령의 은총이 언제나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리는 순간에도, 여러분이 치열한 일상을 살아내는 매 순간에도 보혜사는 동행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재 속에서 임재를 경험하는 참된 신앙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보혜사 성령에 대한 제한된 인식을 넓혀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단지 우리를 돕고, 위로하고, 지켜주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성령을 나의 만족이나 세속적 성취를 위한 도구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진짜 이유는, 우리 홀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 즉 '사랑하는 일'을 함께 완수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의 가장 위대한 사역은 우리를 사랑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상처받은 우리를 위로하시어 다시 사랑을 품게 하시고, 마음속에 똬리를 튼 미움과 혐오를 몰아내어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떠나신 빈자리에 또 다른 보혜사가 오신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세상은 사랑을 보지 못한다
주님이 떠나신 후 오실 성령과 더불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고, 이를 통해 세상에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떠남을 앞두고 이 막중한 사명에 대해 다정하면서도 결연하게 말씀하십니다. 17절 전반부를 보십시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주님이 떠나시고 보혜사가 오셨을 때, 제자들은 그를 맞아들이고 함께 사랑을 실천합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은 너무나도 생생한 실재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보혜사를 보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성령이 실체가 없는 유령 같아서입니까? 아니면 제자들만 어떤 특별한 영적 시력을 가졌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이 성령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 세상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주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셨을 때도 세상은 그를 거부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은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요 1:9-10)
세상은 빛이신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한없이 내어주고 죽기까지 사랑한 그분을 거부하고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세상은 어째서 주님이 주님인 줄 알아보지 못했겠습니까?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503장의 가사가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 소리뿐일세.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얻기 위하여 저들 오래 참았네."
무려 한 세기 전에 지어진 찬양이지만, 오늘의 척박한 현실을 이토록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을까요. 사랑 없는 세상이 보혜사를 알아볼 리 만무합니다. 약자를 향한 잔혹한 범죄가 일상이 되고, '각자도생'을 유일한 삶의 진리로 여기는 세상이 어찌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 메말라 주님을 보지 못하고, 주님을 보지 못하기에 사랑은 더욱 자취를 감춰버리는 이 지독한 악순환이 세상을 옥죄고 있습니다. 이 암담한 현실 속에서, 믿음을 지키려는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다시금 주님의 마지막 당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보혜사를 알지도 맞아들이지도 않겠지만,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고 말입니다. 세상이 보지 못하는 보혜사를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거나 남다른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로 결단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미움과 혐오가 판치는 세상에서, 기꺼이 헌신과 사랑을 마음의 중심에 두기로 선택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결심을 품은 이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 부르셨습니다.
"안에"라는 말은 아주 짧은 단어지만, 그 앞의 자리에 '그리스도'가 놓여 "그리스도 안에"가 되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크고 깊은 말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이는 보혜사를 보며 그분과 동행합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는 곧 하나님 아버지 품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 없는 세상 속에서 치열하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품 안에 안겨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초월적인 존재와 맞닿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시몬 베유는 "우리는 오직 접촉을 통해서만 초월적인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베유가 말한 '접촉'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히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접촉이 바로 '사랑하기 위해 행하는 모든 구체적인 만남과 행위'라고 믿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언제나 맞닿음, 즉 '접촉'을 수반했습니다. 살갗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스러운 피부병 환자를 어루만지셨고,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주님의 옷자락에 손이 닿음으로써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사랑과 접촉함으로써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초월을 경험하고 그것과 연결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다정한 말씀이 울려 퍼지던 그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주님의 거룩한 손은 제자들의 발과 접촉했습니다. 비록 제자들이 그 순간에는 그 초월적인 사랑의 깊이를 다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주님이 떠나신 후 그들은 그날 밤 자기들의 발에 닿았던 주님의 손을 가슴에 영원히 새겼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사도가 되어 자신들을 미워하는 원수들마저 사랑했고, 주님을 따라 죽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들을 통해 주님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세상은 좀처럼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이며, 오직 사랑받기만을 갈구하는 이기적인 욕망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먼저 다가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기꺼이 내 것을 내어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주님을 보는 자들입니다.
마지막 21절 말씀을 가슴에 담으십시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두려움을 떨치고 다가가 손을 내미는 구체적인 사랑, 닿아주는 사랑을 실천합시다. 주님께서 차별 없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어루만지셨듯, 우리도 조건 없이 사랑합시다.
물론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사랑하기로 눈물로 결심한 자들에게, 성령은 자신의 모습을 활짝 드러내시어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그 사랑의 발걸음으로 주님과 영원히 맞닿고, 그 살아계신 주님을 어두운 세상 한가운데 찬란히 드러내 보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