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청 말씀 나눔

무력(無力)의 공동체(요 20:19-23)

청파비둘기 2026. 4. 12. 18:34

해체된 공동체
사랑하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던 순간, 그를 따르던 이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덮친 폭력은 너무나 컸고,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너무나 작았기 때문입니다. 그 압도적인 힘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아 골고다에 세웠습니다. 못 박힌 손과 발에는 피가 흘렀습니다. 몇 마디 말씀을 마치고 주님의 고개가 떨어지던 순간, 제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무력감은 단순한 감정이나 느낌이의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와 함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도 꺼졌습니다. 주님을 향한 견고했던 확신은 무너졌고, 삶의 방향마저 잃어버렸습니다. 스승이 죽었으니 더는 제자일 수조차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숨을 거두신 바로 그 순간, 주님의 공동체는 완전히 해체되었습니다. 누군가는 배반했고, 누군가는 부인했으며, 남은 이들은 도망하여 몸을 숨겨버렸습니다. 이는 단순한 조직의 와해가 아닙니다. 새로운 질서라는 목적, 구심점이었던 스승, 그리고 제자라는 정체성마저 산산이 조각난 처절한 '자기 해체'였습니다. 이제 제자들에게 남은 것이라곤 무력함, 허탈함, 그리고 죄책감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바로 이 절망의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19절의 첫 번째 문장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19a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여기서 "그 날"이 가리키는 시간은 문자적으로 안식일을 보내고 난 후 저녁입니다. 우리로 치면 주일 저녁 시간쯤 되겠지요. 낮에 예배드리고 교우들의 얼굴을 보며 서로 교제하고, 새 힘을 얻고, 내일 다시 시작되는 일과를 준비하며 쉼에 들어가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문을 모두 닫아걸고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평안한 안식일 저녁을 보내고 있었으나, 제자들은 절망의 저녁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순간까지도 제자들은 자기들이 이토록 무참한 저녁을 보내게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십자가 이전의 제자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제자들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바라보며, 그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을 수 있었고, 바로 그 분이 자기들을 구원할 메시아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확신은 지난날의 삶을 청산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어부들은 그물을 버렸고, 세리는 자기 직업을 버렸습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강력한 연대의식으로 무장한 제자들은 새로운 시대에 선봉장이 되리라는 목적을 선명하게 드러낸 확신의 공동체를 일구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가 낱낱이 기록하고 있는 그 확신의 실상은 어떠했습니까? 십자가 이전의 제자들은 누가 더 큰지 다투기 일쑤였고, 자기들만의 아집에 갇혀 있었으며, 반대자들에게 하늘의 불을 내리자고 묻던 이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머리로 둔 공동체라기보다는, 헛된 자기 확신을 중앙에 둔 모래성에 불과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의 확신이란 것이 얼마나 허약했는지 우리는 기억합니다. 제자들이 쌓아올린 모래성같은 확신과 목적은 십자가 앞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제자들이 자초한 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때 주님의 제자라 불리던 이들은 이제 완전한 무력감 속에서 두려움의 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상흔: 죽음의 살아있는 증거
바로 그때 주님이 제자들 가운데로 걸어 들어오셨습니다. 문을 열어준 이도, 환영한 이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영이 아니라 몸을 입으셨기에, 당신께서 직접 문을 여시고 들어오셨을 것입니다. 누구도 주님의 방문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사흘 전의 참혹한 죽음은 제자들이 경험한 틀림없는 실재였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제자들 앞에 온전한 '죽음'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말을 건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 얼마나 놀아우면서도 가슴 벅찬 역설인지요. 죽음과 부활, 두려움과 평화가 교차하는 순간입니다. 내 눈앞에서 죽은 이가 살아서 평화를 선포하다니, 제자들은 이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때 부활하신 주님은 두 손과 옆구리의 상흔을 보여주십니다. 이 상처는 죽음의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방금 이 말은 분명 형용모순처럼 들립니다. '죽음의 살아있는 증거'라니요? 그러나 모순이 아닙니다. 주님의 상흔은 부활하셔서 살아나심과 함께, 주님의 죽음이 참혹한 실재였음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손에 난 못 자국과 옆구리에 베인 창 자국을 보며 주님의 죽음과 주님의 부활을 동시에 깨닫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기쁨이 터져나옵니다. 

제자들의 기쁨은 단순히 상한 감정이 치유되거나 비겁했던 과거를 용서받았다는 얄팍한 안도감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상처를 내보이시며 당신의 고난이 제자들과 무관하지 않음을 밝히셨습니다. 말씀 한마디 없이 십자가의 상흔을 보여주신 행위 자체가 제자들의 무력함마저 품어낸 가장 강력한 용서의 체현(體現)이었습니다. 주님의 몸에 새겨진 죽음의 흔적이 그들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제자들은 영원히 길을 잃었을 것입니다. 하여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의 기쁨은 이처럼 죽음의 흔적과 함께 우리에게 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죽음의 흔적과 제자들의 무력함이 연결되자 새로운 의미가 탄생하기 시작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한 번 평화를 비신 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주님은 숨을 크게 한 번 들여 마신 후, 다시 그 숨을 내어 뱉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시지요.무력함과 두려움으로 사방이 가로 막혔던 밀실이 이제는 주님의 숨결로 가득 찹니다.

이 숨결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은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던 창세기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의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제자들 내면의 두려움은 빠져나가고 새로운 생명이 채워졌습니다. 자신이 죽은 자가 아니라 주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나아가야 할 '살아있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생명은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생명을 얻은 제자들에게 한 가지 사명을 주십니다. 본문 23절입니다.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용서하는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이 다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말씀만 보면, 제자들에게 마음대로 죄를 사하거나 묻어둘 권한이 주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헬라어 동사의 복잡성이 우리말로 온전히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용서될 것이요"가 마치 미래를 나타내는 것 같지만, 본래 기록된 헬라어는 완료형이면서 수동태 동사입니다. 즉 용서는 누군가에 의해 이미 끝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사람들의 죄를 이미 용서하셨겠습니까?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23절을 엄밀하게 직역하면, '너희가 죄를 용서하면, 그들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용서받은 상태이고, 지금도 그러함을 알게 된다'입니다. 제자들의 역할은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해서 사람들을 사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세상을 용서하셨음"을 세상에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23절의 후반부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용서의 말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가 용서받은 사람임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죄책에 붙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가 갖는 의미를 확장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선포해야할 용서는 단지 개인의 도덕적 죄에 대한 사면이 아닙니다. '용서하다'의 헬라어 동사 아피애미는 해방하다, 석방하다, 풀어놓다는 의미를 함께 지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용서는 죽음과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의 질서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초대하는 선포입니다. 부활 이후를 살아가게 될 제자들은 이제 이 선포를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무력(無力)의 공동체의 탄생
주님의 죽음 앞에 철저히 무력했던 이들이, 주님의 상흔을 보고 생기의 숨을 들여 마심으로써 세상을 향해 용서, 곧 하나님의 해방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저는 바로 이 순간이 교회가 탄생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갔던 비겁함의 은신처가 곧 교회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자기 확신과 계획이 모두 무너진 그 절망의 자리에서 믿음의 공동체가 시작된 것입니다. 놀랍지 않으신지요? 세상이 무서워 문을 모두 닫아걸고 숨어버린 사람들의 자리에서 교회가 시작되었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시작이 절망과 무력함이었기에 사도들의 교회는 오히려 세상을 한껏 품어 안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무력함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았기에, 그들은 죽음 가운데 신음하는 사람들을 누구보다 깊이 품어 안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에 관하여 깊이 사유한 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상가 모리스 블랑쇼는 죽어가는 이웃을 구해낼 수 없다는 깊은 무력감이 공동체 탄생의 밑거름이 된다고 통찰했습니다. 죽어가는 이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 그 깊은 무력감의 심연에서 비로소 진정한 연대가 싹튼다는 것입니다. (모리스 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17). 

타인의 죽음에 무관심하거나 도리어 죽음을 부추기는 오늘날, 블랑쇼의 경고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사람들은 마치 자기들이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믿으며 살아가면서도, 타인의 죽음에는 무관심하고 오히려 죽음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동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보며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를 더욱 괴롭히는 것은 이 전쟁을 도구삼아 자기 권력을 공고히하고, 전쟁 비즈니스로 한 몫을 단단히 챙기려는 이들이 부끄러움도 없이 세상에 자신의 비대한 자아를 전시하고 있는 모습을 매일같이 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세상이 이러하기에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할 교회는 성공과 확신의 공동체가 아니라, 타인의 억울한 죽음을 마주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내가 그 죽음 앞에서 무력해 보일지라도, 시선을 거두지 않고 그 곁에 서 있어야 합니다. 설령 세상이 비웃을지라도, 타인의 억울한 죽음 앞에 연대하며 서 있는 것 자체는 죽음의 권세 아래 짓눌린 이들에게 하나님이 당신들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보여주는 가장 적극적인 용서의 선포입니다. 사도들의 전통 위에 세워진 교회는 주님의 상흔을 품었기에 세상의 모든 상처를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는 부활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교회력 가운데 가장 기쁨으로 가득한 기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노라면 마냥 기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있고, 또 그 죽음 앞에 무한한 무력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즈음이면 도저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도 있지요. 벌써 12년 전입니다. 우리는 진도 앞바다에서 젊고 어린 생명들이 가라앉는 죽음의 현장을 그야말로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를 사는 한국인들은 이 아픔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슬프게도 참사는 오늘도 반복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무력함을 느낍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냉소하며 외면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비록 무력할지라도 어둠과 죽음을 직시하고 그 곁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마주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특별한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절망과 닫힌 문을 부수고 들어오신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그러했듯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무력함을 뚫고 우리 가운데로 들어오신 주님이 상흔을 보이시고, 숨결을 넣으셨기에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을 마주합시다. 우리 사회의 어둠을 직시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셨듯 나도 당신을 잊지 않겠단는 용서와 해방의 말을 전해 줍시다. 주님이 지금 우리의 무력함을 뚫고 들어와 당신의 상흔을 보이시고 숨결을 불어 넣고 계십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승리에 기대어,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잊지 않겠다는 연대와 해방의 복음을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