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움과 큰 기쁨이 엇갈려서(마 28:1-10)
십자가 앞에 선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지난 사순절 기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순례의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땅과 하늘 사이에 애처롭게 매달려 계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지도 못하고, 땅에 닿지도 못한 채, 땅과 하늘 사이의 팽팽한 긴장 속에 묶여 계셨지요. 그곳에서 주님은 하늘의 부르심과 땅의 인력 사이에서 찢어지는 고통을 견디며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네 권의 복음서는 각각 십자가 위에서 힘겨워하시는 주님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묘사합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거의 비슷한 논조로 기록합니다. 총독의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주홍색 옷을 걸친 뒤, 가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웁니다. 강제로 무릎을 꿇리고는 ‘유대인의 왕’이라 부르며 조롱하고 때립니다. 그리고 주님은 골고다라 불리는 언덕, 모든 이가 쳐다볼 수 있는 그 높은 곳에 세워지셨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주님을 봅니다. 손가락질하고 고개를 흔들며 비아냥댑니다. 어떤 이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비웃습니다. 곁에 선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그 비극을 보며 비열한 웃음을 짓습니다.
그런데 이 모욕의 풍경 뒤에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에게 손가락질하고 침을 뱉으며 욕하는 행위는 단순히 그가 미워서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제국의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아무나 십자가에 매달지 않았습니다. 역사 속 모든 제국이 그렇듯 그들은 체제 유지를 최우선으로 여깁니다. 제국의 근간을 흔드는 반역자나 정치범, 특히 자신을 ‘왕’이라 칭하며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들을 가차 없이 십자가로 보냈습니다.
반대로 제국의 법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이는 어떤 경우에도 십자가에 매달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철저히 하층민과 노예, 그리고 흉악한 범죄자들을 위한 형벌이었으며, 제국의 권위를 상징하는 장치였습니다. 처벌조차 차별을 두는 세계가 바로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러한 십자가가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마을 어귀나 높은 언덕에 세워진 이유도 명확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이들을 향해 제국은 이렇게 소리칩니다.
"보아라, 이들이 감히 제국의 권위에 도전한 자들이다. 그러니 너희는 이 자들에게 욕하고 손가락질하며 침을 뱉어라! 만약 침묵한다면, 너희도 여기 십자가에 달린 이들과 같은 뜻을 품은 것으로 간주하겠다!"
길을 지나던 사람들은 자신이 제국에 반항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누군가를 모욕해야만 했습니다. 그것만이 황제의 결정이 곧 정의라고 인정하는 비루한 생존 방식이었습니다. 살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아야 하는 일상, 이것이 바로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참혹한 이면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십자가 위 죄수를 바라보며 연민을 느끼고, 그를 위해 울며, 그의 고통 당함을 위해 기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제국의 법과 논리를 정면에서 거부하는 도전입니다. 제국은 조롱하라고 십자가를 세웠지만, 누군가는 그 십자가를 끌어안고 웁니다. 이 눈물의 포옹은 제국의 법과 황제의 권위보다 높은 가치가 있음을 몸으로 증명하는 투쟁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보며 슬퍼하며, 주님의 무덤 앞에 머물며 우는 이유는 주님이 큰 고초를 당했기에 마음이 아파서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서고,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며, 십자가 앞에 무릎 꿇는 이유는 죄 없는 이를 십자가에 못 박은 저 제국의 법에 동의하지 않겠다는 거룩한 고집이며, 이 세상의 판결이 틀렸음을 온몸으로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무덤 앞에서 선다는 것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주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의 이야기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는 것도 제국을 향한 도전인데, 제국이 ‘패배자’로 낙인찍어 가둔 자의 무덤을 지키는 일은 얼마나 더 위험했겠습니까? 제국의 결정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겠다는 강렬한 몸부림입니다.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여인들이 그곳으로 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들의 가늠할 수 없는 용기를 봅니다.
그들이라고 왜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십자가를 보며 울 때도, 또 무덤을 지키기 위해 돌 문 앞에 섰을 때, 이 작은 사람들의 심장은 얼마나 세게 뛰었을까요?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그 위협 속에서 물러서지 않았던 작은 사람들의 용기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침묵을 미덕이라고 말합니다. 단지 말을 줄여 실수를 하지 말라는 격언이 아닙니다. 나서지 말고, 말하지 말고, 반대하지 말고, 그저 모르는 척하라고 강요합니다. 부조리한 일에 눈과 귀를 닫는 것이 현명한 삶의 지혜라고 속삭입니다. 대신 누군가 조롱당한다면 모르는 척 군중과 함께 그를 모욕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묘한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 순간만큼은 적어도 그 모욕의 대상이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쳐다보지도 말고. 무덤 곁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침묵할 때 입을 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을 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곁에 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단한 용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자기에게 이득이 떨어지기 때문도 아닙니다. 한 줌의 양심, 작은 용기, 인간적 미안함, 이런 것들이 마음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향했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들이 용맹한 투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마지막 순간만이라도 곁에 있겠다는 사랑이 그들을 움직였습니다.
이토록 작은 겨자씨 만한 믿음 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본문 2절입니다.
2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주님의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에 다가와서, 그 돌을 굴려 내고, 그 돌 위에 앉았다.
여러분, 마태가 보여주는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두 여인이 무덤 앞에 도착합니다. 그러자 커다란 지진이 일어나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무덤으로 내려와 손수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여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돌이 굴려져 있었다고 하지만, 마태는 천사가 내려와 거대한 돌을 밀어내고 승리자처럼 그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야말로 실시간으로 보여줍니다.
마태는 왜 이 장면을 기록했을까요? “도망치지 말고 무덤으로 오라. 저 십자가를 외면하지 마라. 네가 그 앞에 서 있다면, 내가 이 거대한 돌을 굴려 주겠다!”라는 하늘의 응답입니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하는 진실을 똑똑히 보라는 하늘의 선포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세상의 모든 권세를 무력화하셨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라는 도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명확합니다. 부활의 무덤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현실의 벽이 아무리 두껍고 돌문이 무거워 보여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절망의 자리, 닫힌 세계를 향해 달려가는 것, 그것이 바로 부활을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두려움과 기쁨의 교차점에서
돌문을 옮기는 천사를 보며 여인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이 엇갈렸다고 말씀은 증언합니다. 이것이 오늘 부활절을 맞이한 우리의 솔직한 현실입니다. 부활을 찬미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여전히 어둡고 깊기 때문입니다. 절기로는 부활절이지만 현실로는 여전히 십자가 고통이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십자가를 지우지 않습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심판대 위의 그리스도와 부활의 그리스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부활의 승리에 도취한 채 십자가를 망각하면 부활은 오히려 그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린다고 경고합니다.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 237-8) 그렇기에 부활의 기쁨과 현실의 참혹함이 중첩되어 있는 오늘의 현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십자가의 흔적을 지닌 채 부활의 찬송을 드높이 불러야 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마라.”
우리는 이 어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돌문이 굴러가는 것을 이미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제국은 죽음으로 우리를 협박하지만, 주님은 그 죽음조차 이기셨습니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하는 것을 본 이들에게 더 이상의 공포는 없습니다.
우리 사회를 뒤덮은 어둠의 힘들은 결국 무너질 것입니다. 세상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겠지만, 우리는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주님은 명령하실 것이고, 그 거대한 돌은 반드시 물러갈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제안합니다. 돌무덤으로 갑시다. 가장 어두운 곳으로 달려갑시다. 침묵하라는 세상에 맞서 입을 엽시다. 주님이 여인들에게 “갈릴리로 가서 형제들에게 소식을 전하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부활의 첫 번째 증인들이 할 일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희망을 전하는 것입니다.
무덤 앞에 서신 여러분,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대하여 이기셨습니다. 이제 두려움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승리하신 주님을 따라, 여전히 무덤 같은 이 세상에 부활의 빛을 전하는 증인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