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누구냐?(마 21:1-11)
신 vs 신
고대 지중해와 그리스 세계를 중심으로 살아갔던 사람들에게, 가장 위대한 영웅이자 탁월한 통치자의 대명사는 단연 로마의 첫 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지속되던 로마의 내전을 종식시켰고, 이민족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거대 제국을 일치단결시켰고, 그 결과 제국의 영토는 확장되었으며 사람들의 삶은 매우 윤택해졌습니다.
황제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를 신으로 떠받들며 경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또한 자신을 향한 신격화를 마다하지 않았지요. 제국의 시민들은 신에 의해 통치받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진정한 평화가 도래한 자신들의 시대를 '로마의 평화, 팍스 로마나'라고 불렀습니다.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대략 14년경에 사망합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티베리우스라 불리는 황제가 등극하는데, 이때부터 로마의 권력자들은 하나같이 아우구스투스를 흉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전투에서 승리하면 성대한 개선 행진을 벌였고, 거대 군단을 통솔하는 모습을 보이며 자기도 아우구스투스와 다름없는 통치력을 지녔음을 선전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국의 황제들은 자신 또한 신과 다름없는 존재임을 부각하며 세상의 경배를 요구 했습니다. 로마는 황제라는 신에 의해 통치되는 평화 세상임을 온 천하에 과시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황제를 신으로 여기는 이 흐름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왜일까요? 유대인들에게 신은 오직 야훼 하나님 한 분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유대가 로마의 속국이었지만, 그들은 황제 숭배를 격렬히 거부했습니다. 유대의 경건한 지도자들은 성전을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해 로마 황제의 얼굴이 그려진 동전 유통을 엄격히 금지했고, 황제의 신상이 성전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철저하게 막았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로마 황제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온 세상의 통치자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강경한 태도를 알았던 로마는, 때때로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유화정책을 펴기도 했습니다.
평화를 약속하지만 평화 없는 신들의 세상
로마 제국은 황제라는 절대 권력을 신으로 삼았고,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 제사와 율법 조문을 절대적 진리로 여겼습니다. 그야말로 신들의 전쟁이라 할 만큼,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감이 유대 사회를 휘감고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우리의 황제가 신이 되어 세계에 평화를 가져왔다'고 선언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우리의 창조주께서 세계를 심판하고, 로마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진정한 평화 세상을 시작할 것이다'라고 맞섰습니다.
'황제 숭배'와 '로마의 평화' 그리고 '성전과 율법'이라는 거대한 상징들을 무기삼아 두 진영 모두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약속합니다. 로마는 우리의 황제에게 충성하라, 그러면 평화의 세상이 온다. 유대의 종교 권력자들은 말하길, 성전에 복종하고 율법에 철저히 순종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된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평화가 도래했다고 자평하는 세계에 신음 소리가 가득합니다. 눈물이 그치질 않습니다. 평화를 약속한 로마의 군대는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무참하게 짓밟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위해 율법을 가르치고 성전 제사를 책임진 이들은 자기 이득을 챙기기 위해 가난한 이들의 고혈을 짜냅니다.
황제와 성전, 두 세계관의 거대한 충돌처럼 보이는 장면에는 한 가지 기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힘에 의한 통치'라는 사실입니다. 황제가 평화를 만들었으니 반기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입니다. 거역은 곧 죽음입니다. 성전의 종교 지도자들과 율법 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입을 모자 주장하길, 성전 제사에 흠이 있어서는 안 되며, 율법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고 압박합니다. 만약 이를 어기면 하나님을 모욕한 것으로 간주해 돌에 맞아 죽어도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었습니다.
신 대 신, 평화 대 평화, 이념 대 이념,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이 대립의 역사는 이미 1세기부터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긴장 속에서 이득을 보는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힘과 목소리를 가진 이들이고, 반대로 고통 당하는 이들은 언제나 힘없고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제넘은 기쁨
이 거대한 힘들이 서로 엉버티며 세를 겨루는 와중에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떠들썩한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누가 보아도 남루한 차림의 유대 민중들이 작고 어린 나귀 등에 탄 한 사람을 뒤따르며 소리치고 노래했기 때문입니다. 승리를 거둔 장군이 화려한 갑옷을 입고, 거대한 전차를 몰며 행진하는 위압적인 모습과는 비교도할 수 없는 초라한 행렬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행렬에는 성전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거룩함도, 화려한 제사도, 대제사장의 위엄있는 말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마치 승전보를 울리는 군사들처럼 의기양양합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벗어 길 위에 깔아 둡니다. 이는 왕을 맞이하는 이들이 보여주는 최고의 충성 표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지금 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는 분을 '왕'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표정이나 행동보다 더 놀라운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행렬이 온 목소리 높여 외치는 말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9b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단지 현생의 어려움이 아니라 죽음과 억압에서 우리를 건져 영원한 해방을 달라는 우주적 선포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의 외침은 참으로 주제넘어 보입니다. 장군도 아니고, 황제도 아니고, 대제사장도 아닌 그저 어린 나귀 한 마리를 타고 가는 볼품 없는 이를 향해 세계를 압제에서 해방시키시고, 자기들의 영혼을 구원해 달라니요? 군마도 타지 아니하고, 군대를 이끌지도 않은 채, 그저 유대의 가난한 사람들을 이끄는 저 사람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럼에도 이 행렬에 속한 사람들은 진심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여기 이 나귀를 탄 분이 세상 그 어떤 장군도 이뤄내지 못한 승리를 주시고, 어떤 왕도 주지 못한 나라를 다스리실 것이며, 어떠한 제사로도 이루지 못한 구원을 주시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로마의 권력자들이 이 행렬을 보고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성전의 지도자들은 또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처음에는 비웃었을 것입니다. 힘과 권력이 전부라고 믿는 그들에게 이 초라한 행렬이 참으로 어리석어 보였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의 소리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안전한 처소에서 비웃음 짓던 이들의 입가에 비로소 긴장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애써 무시하려했지만, 저 나귀에 탄채 홀로 침묵하며 앞을 향해 나아가는 이가 신경쓰여 미칠 지경이었지요. 마태는 이 장면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에, 온 도시가 들떠서 물었다. "이 사람이 누구냐?"
나귀를 타고 온 왕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구냐?"라는 물음이 종려주일을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아니, 그리스도교의 정수가 바로 이것, "이 사람이 누구냐?"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종려주일을 지키는 많은 교회에서 발견되는 한 가지 해석적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환호를 뚫고 지나가는 '예수님의 슬픔에' 지나치게 주목하는 것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고난으로 향하는 길이었고, 호산나를 외치며 따르는 행복한 군중들은 머지않아 주님을 욕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는 성난 군중으로 돌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려주일을 다루는 복음서, 특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 어디에도 주님께서 근심에 가득차 슬퍼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고난주간을 앞에 둔 사순절의 마지막 문턱에서 마태복음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바는 다름 아닙니다. 바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저 사람이 누구인지 똑바로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이 도전에 대한 답은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본문 11절입니다.
11 사람들은 그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 예수라고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입니다. 전차와 군마가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분, 힘으로 사람들을 억누르지 않으시고, 섬김과 사랑으로 세우는 분입니다. 제국은 이렇게 소리칩니다. 우리에게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있다! 그가 곧 신이며 구원자이다! 우리의 위대한 황제에게 경배하라! 제국의 논리를 따르고 제국의 통치에 복종하라! 그렇게 하면 너희에게 평화를 약속하겠다. 반대편 성전에선 이런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성전에 모든 것을 바쳐라! 율법을 일점일획도 어기지 말라! 대제사장의 방식을 절대적으로 따르며,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하지 말라! 오직 그렇게 할 때에만 하나님이 너희에게 새로운 나라를 약속하실 것이다!
하지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제국의 방식으로 세상을 통치하지 않으신다고, 하나님은 황제도 아니고 장군도 아니라고, 하나님은 성전 안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며, 실수하고 패배했다 하여 징계의 채찍부터 드시는 분이 더더욱 아니라고, 침묵으로 그러나 온세상이 뒤흔들릴정도로 쩌렁쩌렁 외치고 계십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이 온몸으로 선포하신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자들과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한 번도 자기 목소리를 내본 적 없는 이들의 기쁨이 되시는 분입니다. 황제보다 크심에도, 가장 비천한 자를 누구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피조물 된 온 세상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 방식입니다. 가장 약해 보이는 이 나귀의 행진이, 사실은 예루살렘과 로마라는 거대한 체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가장 강력한 도전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이유입니다.
우리의 응답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는지 온몸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더욱 깊이 성찰해야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바울의 서신이 주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줍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입니다.
6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이 마음입니다. 모두가 위를 향해 달려갈 때, 홀로 아래를 향하며 하나님의 뜻이 여기 낮은 곳에 있음을 죽음으로 증명하신 그 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부와 권력이 곧 정의인 세상에서 자기를 비워 죽기까지 순종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임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종려주일을 보내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는 스스로를 제국이라 부르는 나라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통치의 방식에 있어서만큼은 과거 어느 제국들보다도 잔인하고 무도한 원리로 세계를 움켜쥐려는 국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승리만을 찬양하고,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제국적 논리가 학교에서, 직장에서, 우리가 매시간 들여다보는 스마트폰이나 소셜미디어 속에서도 진리처럼 군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귀를 타신 예수님 가장 낮은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어리석고 비천한 자들도 하나님 나라의 어엿한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주님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권세의 정점인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주님은 그 죽음을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제국의 통치는 패배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논리와 공식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를 비우신 주님은 지금도 나귀를 타시고 묵묵히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십니다. 불행히도 주님을 둘러싼 군중이 흔들었던 종려나무 가지에는 때로 헛된 욕심이 섞여 있었습니다. 주님을 따랐던 그들을 탓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단순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데서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나귀를 타신 주님의 뒤를 따르며,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끝까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세상의 통치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우리의 일상 속에서 감각해 나갑시다. 나귀를 타신 주님의 그 고요하지만 세상을 뒤흔드는 주님의 행렬에 우리 모두 기쁘게 동행합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