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물 속에서(시 130)
발 끝이 땅에 닿지 않는 경험
대학 시절 어느 여름 방학으로 기억합니다. 신학교 동료들과 강원도 미자립 교회 여름성경학교 봉사를 마치고 근처 해수욕장을 찾았습니다. 저는 수영을 전혀 못 하지만, 여럿이 어울려 물놀이하는 분위기는 무척 좋아했습니다. 첨벙거리며 물에 뛰어들고 파도에 몸을 맡기며 즐거워하던 중, 불현듯 홀로 해변에서 멀리 떨어져 버린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제 엄지발가락 끝에 지면이 닿지 않던 그 찰나의 감각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물속에서 내 발밑에 아무것도 없음을 느낀 바로 그 지점부터 극심한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물에 삼켜진다'는 말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다행히 곁에 있던 튜브를 잡고 겨우 백사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벌써 25년도 더 된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시편 130편을 묵상하기 위해 첫 줄을 읽자마자 그해 여름날의 기억이 몰아치듯 찾아왔습니다. 시인은 "내가 깊은 물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깊은 물속"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아마크(מַעֲמַק)'는 단순함 수심이 깊은 물이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혼돈의 깊음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개역개정 성경은 1절을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로 번역합니다.) '마아마크'는 사람을 집어삼키는 심연이며, 사방을 둘러보아도 붙잡을 지지대가 전혀 없는 공허한 형태입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물에 빠졌으나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절망적인 상태와 같습니다.
시인은 지금 이 심연에 잠긴 채 주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사실 물속에서 소리를 낸다는 상황 자체가 모순입니다. 아무리 수영에 익숙한 전문가라 해도 물에 잠긴 채 소리를 내는 일은 무척 어렵습니다. 설사 소리를 낸다 해도 그저 웅웅거리는 의미 없는 거품이 되어 흩어질 뿐입니다. 물속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시인은 지금 완전한 고립무원의 상태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시대적 상황이 깊은 물속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짖는 일과 다름없어 보입니다. 미국, 이스라엘, 그리고 이란의 전황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주중에 국제부 중동 담당 기자를 하는 지인을 만나 점심을 같이했습니다. 그는 대중에게 알려진 것 이상으로 상황이 좋지 않다며 무척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언론사 기자의 말인지라, 저 역시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최근 고 박완서 선생님의 첫 번째 장편 소설인 <나목>을 읽는 중에 이런 구절을 만났습니다.
"아아, 전쟁은 분명 미친 것들이 창안해낸 미친 짓 중에서도 으뜸 가는 미친 짓이다." (박완서, <나목>, 세계사, 197)
참으로 적나라하지만, 그렇기에 너무도 적확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동 땅에서 벌어지는 이 전쟁이 세계 패권을 향한 불의한 욕망의 이전투구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쟁의 당사자들은 '이 미친 짓'을 멈출 생각이 없고, 이웃 나라들은 강대국의 눈치만 살피고 있습니다.
전쟁을 멈추라는 평화의 외침조차 마치 깊은 물속에서 지르는 비명처럼 무력하게 들립니다. 평화, 생명, 정의, 공의와 같은 단어들이 모두 물 밑으로 가라앉는 듯합니다. 이러한 거대 담론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박한 일상 역시 생존이라는 깊은 물속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 최근 여러 청년들과 성도님들로부터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 시험의 낙방, 응답 없는 이력서, 합의되지 않은 비정규직으로의 전환, 직장 내 괴롭힘, 그리고 두 가지 일을 병행해야만 하는 막막한 현실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실물 경제의 짙은 어둠이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까지 밀려 들어왔음을 절감합니다. 우리의 삶이 점점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2절에서 절절하게 울려 퍼지는 시인의 탄원, "주님, 내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나의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이 먹먹한 탄원은 우리의 암담한 현실을 그대로 대변합니다.그야말로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우리는 오늘을 살아갑니다. 시인의 고백과 같이, 우리는 지금 깊은 물속에 빠져 발끝이 땅에 닿지 않는 두려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하는 주님의 시선
그 심연의 물속에서 시인은 낯선 시선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자각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물속에서 발버둥 치던 시인이 느낀 첫 번째 감정은 ‘나의 죄를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붙잡을 것 하나 없이 끝모를 바닥으로 빠져드는 와중에 자신의 죄를 직시하시는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 이 얼마나 가혹한 상황입니까?
환난 중에 있는 시인은 어째서 하나님이 자기 죄악을 감찰하고 계시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왜 하나님이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벌하고 계신다고 생각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말하고 있는 '죄'의 의미를 면밀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3절에서 쓰인 죄를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아와(עָוָה)'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로, '구부러지다', '왜곡되다'라는 뜻을 갖습니다. 일반적으로 히브리어에서 죄를 뜻하는 명사는 ‘과녁을 빗나가다'는 뜻을 지닌 (하타)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오늘 시편의 시인이 말하고 있는 '죄'는 인간이 저지르는 일반적인 죄와 결을 달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시인이 지금 느끼는 절망감은 단순히 법을 어긴 죄책감이 아니라, 왜곡된 현실 속에서 뒤틀려버린 자아, 그리고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자책감에 가깝습니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이 나의 구부러진 자아를 지켜보시는구나, 그리고 나를 보시며 실망하고, 또 책망하고 계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시대 청년들을 짓누르는 가장 짙은 어둠이 바로 '자책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책감이란 "자신의 결함이나 잘못에 대하여 깊이 뉘우치고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입니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내가 그때 조금 더 노력했으면', '그때 조금 내가 더 잘했더라면' 하는 생각들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자책감이 가장 먼저 지목하는 대상은 언제나 '나'입니다. 이 감정은 우리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들고, 결국 우리의 자아는 구부러집니다. 그렇게 구부러진 자아는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왜곡하고 마음을 비틀어 버려 결국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시대의 죄와 어둠이 가진 권세입니다. 이 권세는 우리의 실수와 실패를 낱낱이 기록하고, 처참하게 평가합니다. 그리고 되돌릴 수 없다는 듯 판결을 내리지요. "너는 무가치하다!" 쓸모없고 무능력한 사람들을 폐기하는 우리 시대의 논리입니다.
여러분, 이때 우리를 깊고 어두운 물 속에 가둬두는 이 어둠의 힘을 깨는 더 큰 능력이 있습니다. 용서,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자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왜곡하고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모습에 슬퍼하십니다. 구부러진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은 책망이 아니라, 다시 펴주시고자 하는 사랑의 시선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
시인은 이내 자신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이 책망이 아니라 용서임을 깨닫습니다. 4절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4 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주님만을 경외합니다.
20세기 초 중국의 문인이자 법학자인 오경웅은 130편 4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4 주께서 자비하셔서 끊임없이 인생을 새롭게 해주시니 덧없는 이 땅에서 어느 인생이 야훼 주님 사랑하지 않겠는지요?(오경웅 역) 704.
오경웅은 용서를 '끊임없이 인생을 새롭게 하는 주님의 자비'로 아름답게 해석했습니다. 지독히도 괴로운 현실과 암담한 상황에 갇혀 있을 때 우리의 자아는 왜곡되고 우리 자신을 무가치하게 봅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잃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구부러진 자아 곧게 하십니다. 달리 말해 우리를 물속에서 건져내시어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밤이 우리 인생의 끝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는 말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세상 어떤 권세도 밤을 영원히 고정해 둘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침을 부르시며, 우리를 새롭게 시작하도록 이끄십니다. 우리에게 다시 아침을 맞이하게 하시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받아
이 새로운 아침은 하나님의 숨결, 곧 ‘생기’를 통해 찾아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에스겔 예언자의 그 유명한 '마른 뼈 환상'이 이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죽음과 다름없었던 뼈가 다시 살아납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자 뼈들 위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랐다고 증언합니다. 9절 말씀은 이 뼈들은 본래 사람이었으나, 살해당하여 흩어져있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숨결이 이 뼈들을 감싸자, 그들은 다시 일어났고,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군대와 같다고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살아난 생명들에게 "내 백성아, 내가 너희의 무덤을 열고 그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낼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고 선포하십니다(겔 37:13).
에스겔의 환상은 요한복음의 나사로 사건과 강렬하게 공명합니다. 나사로는 이미 죽었고, 장례까지 치른 상태입니다. 누이 마르다는 주님께서 서둘러 오셨으면, 동생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두운 무덤에 갇힌 나사로도, 슬픔 가득한 마르다와 마리아 모두 깊은 물속에 갇힌 자들입니다. 주님도 자매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도착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 말씀하셨으나, 마르다는 동생이 장사된 지 사흘이 지나 시신이 이미 부패하기 시작해 악취가 흘러나온다고 답합니다. 이 현장 안에는 생명의 신호가 전혀 잡히지 않습니다. 죽음의 증거만이 가득합니다. 나사로의 무덤가는 지금 깊은 물속과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이윽고 무덤의 문을 닫아 걸었던 돌이 치워집니다. 그 순간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자기 코를 틀어 막았을지 모릅니다. 무덤 안에서 죽음이 흘러나오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다음 상황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두운 돌무덤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악취와 부패한 시신의 끔찍한 장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살아나 제힘으로 서서 걸어 나오는 나사로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은 무덤 앞에서 죽음이 나오리라 믿었으나, 나온 것은 생명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돌문이 열리자, 생명의 바람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죽음을 몰아내신 것이지요.
이어 주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나사로를 감고 있던 마지막 죽음의 흔적들인, 몸을 두른 천과 얼굴을 가린 수건을 풀어 놓아 그를 자유롭게 다니게 하라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사로의 호흡은 완전히 트였습니다. 그의 몸에는 죽음이 완전히 물러갔습니다. 깊은 물속에 있듯 숨이 막혀있던 그 무덤가는 이제 생명으로 약동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그의 오라비 나사로, 그리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던 모든 사람은 생명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죽음을 이기고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온 나사로의 모습은, 훗날 우리 주님께서 겪으실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미리 보여줍니다. 주님은 죽음에 굴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죽음을 향해 물러가라 명령하십니다. 어떠한 죽음의 세력도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아침, 곧 새로운 탄생의 은총은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시는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하루하루 숨이 막히는 나날입니다. 중동의 끔찍한 전쟁도, 우리 일상을 조여오는 압박도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발끝이 땅에 닿지 않은 채 캄캄한 물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깊은 물속에 빠진 여러분을 향해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무덤 밖에서 우리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시며 당신의 호흡을 나누어 주고 계십니다. 그 숨을 깊이 들이마십시다. 우리 안에 들어온 주님의 숨결이 우리의 굽어지고 왜곡된 자아를 온전히 펴줄 것입니다.
겹겹이 묶인 죽음의 흔적을 풀어버리고 스스로 서서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갔던 나사로처럼, 우리도 주님의 숨결을 머금고 이 막막한 세상을 향해 생명의 향기를 전하며 나아갑시다. 깊어가는 사순절, 우리 모두가 주님의 호흡으로 다시 거듭나는 은총을 누리기를 간절히 빕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