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청 말씀 나눔

고요를 간직한 사람(마 24:36-44)

청파비둘기 2025. 11. 30. 17:40


편견과 확신
국내 논픽션 번역가 가운데 '김명남' 번역가가 계십니다. 주로 과학 분야 서적을 번역하시는데, 출판계에서는 이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번역가로 손꼽는 분입니다. 저도 몇 권 갖고 있는데요.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인데, 번역가가 김명남이면 일단 믿고 볼 수 있는 정도입니다. 지난주에 번역가 김명남의 인터뷰라는 제목의 영상이 있어서 클릭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김명남 번역가가 당연히 남성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화면에 나오신 번역가는 여성이었습니다. 제 착각의 변을 하자면, 그의 이름이 김명남, 누가 들어도 남성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솔직한 말씀을 드리자면, 과학이라는 분야, 논픽션이라는 특징, 탁월성을 인정받은 업계 제일이라는 평가가 저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를 남자로 '확신'하게 했던 것이지요. 따라서 저의 착각이라기보다는 편견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확신이 편견을 만든 셈이었지요. 나름대로 진보적인 가치를 옹호하고 가부장적 사고를 버리려 애쓰고 있는 저이지만, 이른바 '잔여 편견'이 여전히 제 안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깨달은 무척이나 부끄러운 순간이었습니다.

편견은 우리 생각보다 일상적입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편견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편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편견이 다 나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가령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다고 봅시다. 우리는 우리 앞에 앉아 있는 의사가 나의 질환에 대해 적절한 판단을 내리고 최적의 치료를 해주리란 믿음이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편견이지만, 사회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 믿음의 한 측면입니다. 이런 편견이 없다면 우리 삶은 매우 비효율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과학 관련 학술제에서 여성 교수가 발표할 때면 남성 교수 발표 때보다 훨씬 많은 질문이 쏟아진다고 합니다. 실제 연구 결과라는군요. 어째서일까요? 과학이라는 분야에서 여성의 의견은 어딘가 과학적이지 못할 것 같고, 감정에 치우친 의견일지 모른다는 미세한 편견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미란다 프리커라는 학자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거나 주장할 때 그 사람의 정체성, 예컨대 인종, 성별, 사회적 지위, 외모에 준한 편견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무시되거나 폄하되는 경우를 '인식적 부정의'라고 말했습니다. 편견은 단지 오해가 아니라 정의롭지 못한 행위라는 것이지요. (미란다 프리커, <인식적 부정의>)

사회적 신뢰를 망가뜨리는 편견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편견이 나의 확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탁월한 과학 번역가는 남성임에 분명하다는 확신 말입니다. 확신은 일정 부분 사실에 바탕을 두지만, 확신이 커질수록 편견은 강해집니다. 그렇게 비대해진 편견은 매우 공격적인 판단의 무기가 되곤 합니다. 편견이 정의롭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같은 의미에서 확신과 편견의 관계는 믿음과 신앙의 관계와 흡사합니다. 우리 믿음에 확신이 커질수록 믿음의 편견 또한 덩달아 커지는 경우를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강한 확신의 신앙은 편견의 신앙과 짝을 이루게 되고 불행하게도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정의가 아니라 부정의에 복무하게 되어 버리는 경우를 적지 않게 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 의롭기 위해서는 편견을 만들어내는 강한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모름 또는 알 수 없음을 넉넉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의심의 신앙
오늘은 교회력의 첫 번째 주일인 대림절입니다. 교회력의 시작을 알리는 복음서의 첫 구절은 놀랍게도 확신을 주는 말씀이 아니라 그 반대인 의심스러운 말씀으로 문을 엽니다. 본문 36절입니다. 

36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마태복음서의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마지막 때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서 24장부터 주님은 성전 붕괴, 예루살렘의 파괴, 세상에 닥칠 재난, 그리고 환난이 지나간 후 다시 오실 인자, 즉 재림하실 주님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두렵고 긴장한 상태로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이 모든 일이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다 일어날 것이며, 오늘 본문 직전 35절에서는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혼란과 격변이 임박했음을 제자들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기까지 듣고 나서 그다음에 따라 나올 제자들의 질문은 무엇이겠습니까? 말씀하신 대환난의 날이 언제부터인지, 말씀하신 그 난리가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에 대한 명확한 시간과 그 증거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준비하고 대비를 할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언가 김빠지는 말씀,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천사도 모르고 심지어 아들인 나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세게 하고 확신을 주는 분명한 말씀을 주셔도 모자라는데도, 주님은 확신이 아니라 모호함을, 어떤 의미에서 의심스럽기까지 한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 

하여 제자들은 든든하고 굳건한 확신의 터가 아니라 의심스럽고 모호한 불안의 터 위에 서게됩니다. 그리고 그 불안을 더욱 가중시키는 예시를 드시며 말씀을 이어나가십니다. 세상의 환난이 지나간 후 인자이신 예수께서 다시 오심이 마치 노아 시대의 그 날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닥칠 상황 곧 세상이 사라지는 홍수가 닥치는지도 모르고 일상을 지속했습니다. 사람들은 먹고 마셨으며 장가가고 시집갔습니다. 밭에서 일하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았습니다. 맷돌을 갈던 여인 가운데 어느 여인은 죽고 어느 여인은 살았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르시길,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너희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42).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갑자기 닥친 재난적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리기까지 합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바는 주님의 다시 오심이 난데없이 닥쳐서 당혹스럽게 만들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누구도, 그 어떤 권위나 경험적 판단도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가늠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확신하여 그 날과 그 시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확신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모호함을 불편해합니다. 정확한 때와 시를 알고 확신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기 경험과 해석을 바탕으로 주님의 뜻을 가려내고, 그 시와 때를 나만은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선포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확신의 사람들은 모호함과 머뭇거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길을 모색하려는 사람들을 편견에 입각해 판단하고 정죄하길 즐겨 한다는 점입니다. 

신앙에서 비롯된 확신과 편견 속에 쓸쓸히 퇴장하는 한 신앙인의 모습을 담은 기형도의 시 '우리 동네 목사님'이 떠오릅니다.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뒷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정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기형도, '우리 동네 목사님' <입 속에 검은 잎>

시 속 목사님은 양철 홈통을 두드려 펴고 있는 대장장이를 보며 들었던 생각이 궁금해집니다. 저 구겨진 양철통이 자신과 같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구겨진 세상 자체라고 여겼을까요. 시인이 묘사하고 있는 사람들, 곧 교회 화단에 핀 꽃을 무참하게 짓밟고,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말에 맹렬히 분노하는 교인들은 아마 대부분 믿음과 신앙이 크고 강고한 사람들 바꾸어 말해 확신의 믿음을 지녔을 것입니다. 반면 학생회 소년들과 푸성귀를 심느라 예배에 늦고, 둘째 아들을 잃었음에도 화단을 가꾸며 교회를 돌보았던 목사님은 겉보기엔 믿음도 확신도 결의도 없어 보입니다. 구겨진 양철 홈통을 두드려 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페달을 밟아 떠납니다. 목사님은 이제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는 시인의 마지막 표현에 우리 마음도 덩달아 쓸쓸해집니다. 

그러나 저는 이 목사님에게서 비관이나 실패를 감지하기보다 오히려 단단함과 고요함이 있음을 느낍니다. 쓸쓸한 표정이었을지언정 그는 자기 신앙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교회당 꽃밭, 학생회 소년들, 푸성귀, 그리고 생활입니다. 이런 것들은 확신이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교회에 오셨다면 아마 이런 것들로 향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기형도의 시에서 이 목사님은 자기 고요를 간직한 진정으로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깨어 있다는 것
주님도 제자들을 향해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말씀하십니다(42). 우리는 이 말씀을 곧잘 오해합니다. 깨어있음을 각성 상태와 동의어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깨어있음은 365일 24시간 각성한 상태로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43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은 도둑이 언제 집을 뚫고 들어오는지 알고 있다면 그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반어법입니다. 도둑이 언제 몇 시에 들어올지 인간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치에 맞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매시 매분 사주경계 태세로 일상을 지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확신과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어떠합니까? 자기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듯, 도둑이 언제 틈타는지도 명확하게 알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자기만 따르면 모든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확신의 사람은 빈틈을 찾을 수 없고 어떠한 말도 튕겨나갈 뿐입니다. 이런 이들과 대화하고 나면 피곤하고 씁쓸해집니다. 그러나 각성된 상태가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지나친 확신이 편견이 되어 세상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과 괴리되어 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성을 일으키는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고요입니다. 온 세상 가득한 혼란한 소문과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어둡게 만드는 소식들 한 가운데서 우리는 고요하게 깨어나야 합니다. 고요를 간직한 사람은 확신의 덫에 빠지지 않습니다. 확신과 편견으로 가득 찬 세상이 이것이 맞다, 저것은 틀렸다고 악에 받친 소리를 지를 때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고요 속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곧 하나님의 음성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요를 간직한 사람은 모름과 모호함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각을 모른다고 조바심을 내지도 않습니다. 고요를 간직한 사람에게 도둑이 언제 들어오는지는 문제 되지 않습니다. 깨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나 주님이 여시는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서신 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으니,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롬 13:11-12). 밤은 깊었고 낮은 가까이 왔습니다. 우리 사방을 둘러싼 현실은 여전히 깊은 밤이지만 분명 낮은 이미 도래해 있습니다.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야 합니다.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어둠을 밝히고 주변에 빛이 되는 사람으로 깨어나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교회력의 새날을 시작하는 오늘 교회력의 일 년 동안 우리 내면에 고요를 채웁시다. 지나친 확신이나 그것이 만들어내는 날카로운 편견이 아니라 조금은 모호하고 조금은 부족하고 그래서 확실히 안다고 말하기 주저하는 조심스러움을 채웁시다. 우리는 너무 많은 소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각각의 소리는 옳은 소리일지 모르나 그것이 너무 많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고요가 필요합니다. 잠잠히 깨어나 우리의 일상을 소중하게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을 본격적으로 기다립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어떻게 오십니까? 확실한 희망의 약속을 선포하시며 오십니까? 가시적인 목표를 제시하며 오십니까? 내가 바로 그다! 라고 우렁찬 소리를 내지르며 오십니까? 누가 봐도 메시아다운 풍모를 자랑하며 당차게 오셨습니까? 모두 아닙니다. 주님은 말 못 하는 아기로 오십니다. 연약하고 미약한 존재로 오십니다. 하늘의 별과 광야의 목동들을 제외하곤 세상 모두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나섰음 자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고요하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고요하게 오셔서 세상을 뒤흔드셨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주님은 세상이 오셔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갈등을 해결하시며,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실 것입니다(사 2:4). 

대림절을 시작합니다. 고요를 품고 고요하게 오시는 아기를 경배하러 갑시다. 시끄러운 소리를 지르며 가서는 안 됩니다. 고요한 주님을 마음에 품고 고요를 간직한 사람이 되어 세상이 쏟아내는 온갖 자기주장에 대해서는 적절히 거르며, 하나님의 음성에는 집중을 다 하며 살아갑시다. 바로 그것이 이사야 예언자가 목소리 높여 선포한 말씀, 주님의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삶이라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