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죄인이라는 고백에 관하여(렘 14:7-10, 19-22), 종교개혁주일
가뭄의 책임
지난여름 강원도 강릉시는 사상 유례없는 가뭄을 겪었습니다. 보도로는 강원 일대의 강수량이 연평균 661mm인데 올해에는 무려 189mm, 평년 대비 28% 수준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비가 오지 않으니 강릉 지역 저수율은 100%를 기준으로 15%까지 떨어져 버렸습니다. 물 부족이 극단에 다다르자, 농업과 공업용수는 일찌감치 제한되거나 중단되었고, 급기야 생활용수까지 제한 급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수도꼭지를 돌리면 물이 나온다는 사실이 당연한 이치가 아님을 우리는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물을 온전히 쓸 수 없게 되자 시민들의 삶의 질은 급격하게 떨어지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상 관측 이래 108년 만의 기록적 가뭄의 이유와 원인을 찾기 위해 기상청을 비롯해 많은 연구 기관이 나서 분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원인을 모르지 않지요. 아니, 모를 수 없습니다. 기후 위기에 따른 이상 기후 곧 지구가 망가졌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기상청은 지난여름과 같은, 이른바 '돌발 가뭄'이 전국적으로 빈번하게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합니다. 기후 위기가 세계 바깥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임을, 이미 너무나 늦어버렸지만, 그나마도 각고의 노력을 다하지 않으면 재앙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목도했습니다.
이 와중에 우리는 당시 강릉시 행정을 책임 진 이들의 미숙하고 무책임한 대응에 분노하기도 했습니다. 시민들은 하루하루 힘에 겨워하는데, 시정의 책임 있는 자들은 가을이 되면 비가 오지 않겠느냐는 실언을 하지 않나, 급격히 빠지는 저수율에 대한 경고가 사전에 여러 차례 보고 되었음에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거나, 또 자기들의 실수로 발생한 행정 공백을 감추기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며 우리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가뭄이라는 천재지변을 특정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갈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가뭄을 내가 일으킨 것도 아닌데 그 책임을 왜 내가 져야 하는가?'라고 말하며 남 탓만 하기에 급급하다면 공동체가 직면한 고통의 문제는 어떤 경우에도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비단 가뭄만이 아니겠지요.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대부분의 어두운 문제들은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지만, 그 문제를 자기의 문제요, 나의 책임이라 말하는 이를 찾기란 좀처럼 힘이 듭니다. 모두 같은 말을 합니다. 저들의 책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 문제에 다르게 응답해야 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풍조와 다른 결의 말씀을 들려주고 있는 예레미야의 기도를 성찰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뭄 앞에 드리는 백성들의 이상한 기도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말씀은 예레미야서에 기록된 두 개의 기도문입니다. 예레미야 본문 14장 7절에서 9절은 백성들이 드리는 기도, 뒤이은 19절에서 22절의 기도는 예레미야가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먼저 두 개의 기도가 나온 맥락을 살펴야 합니다. 본문 14장 1절에서 6절이 그 배경인데, 4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4 온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아서 땅이 갈라지니, 마음 상한 농부도 애태우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두 기도는 이스라엘 땅에 닥친 극심한 가뭄 가운데 드려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읍의 백성들은 기력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지며 탄식하는 상황입니다(2). 들녘의 암사슴이 제 자식을 먹일 연한 풀이 없어 갓 낳은 새끼까지 버리고 있습니다(5). 농부들의 마음은 갈라진 땅과 같이 찢어지고 있습니다. 세계 선진국 지수에 편입된 나라라던가, IT 강국이라 자부하는 대한민국이라지만 한 도시에 들이 닥친 가뭄에도 우리는 속수무책이었으니 이 당시는 얼마나 더 심했겠습니까? 이스라엘 땅에 휘몰아친 가뭄은 그야말로 비상사태로 살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닥친 가뭄이 단순한 재해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이라 생각했지요. 하여 백성들은 뜻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백성들이 올린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본문 7절입니다.
7 "주님, 비록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고발하더라도,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선처해 주십시오. 우리는 수없이 반역해서,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첫 문장은 아름답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뭄의 원인을 자기 바깥에서 찾지 아니하고, 자기들이 저지른 죄악의 결과가 가뭄의 원인임을 솔직하게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8절과 9절 기도에는 우리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습니다. 8절 기도에서 이스라엘은 주님만이 희망이며 환난 때에 구원자라고 고백하면서 동시에 왜 우리에게 나그네처럼 구시느냐, 또 어째서 그저 지나가는 사람처럼 대하느냐 볼멘소리를 합니다. 9절도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해 '놀라서 어쩔줄을 모르시는 분' 또 '구해줄 힘을 잃어버린 용사 같은 분'으로 묘사합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생각하게 되지요. 이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는 것이 맞는가?
이어지는 기도에서 이스라엘은 "그래도 주님은 우리들 한가운데에 계시고,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이니 버려두지 말고, 구해달라는 청원합니다. 무언가 어린아이의 응석 부림 같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운 분이심을 정녕 몰랐는가? 하나님이 자기들 한가운데에 계신 분임을 알고서도 지금껏 그렇게 많은 죄를 저질렀는가? 질책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백성들이 드린 기도의 마지막은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마십시오"라는 명령에 가깝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척 기도하면서 결국 모든 가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도 엄하기에 그지없습니다. 10절은 하나님의 응답인데, 마지막 문장만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 가뭄에서 자기들을 구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에 이렇게 답하십니다.
10b "그들은 이리저리 방황하기를 좋아하고, 어디 한 곳에 가만히 서 있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나 주가 그들을 좋아하지 않으니,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들의 죄악을 징벌하겠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당신의 뜻을 명확히 전달하셨습니다. 나는 그들의 기도 곧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말라는 간구에 응답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예레미야의 심정을 헤아리며
우리는 여기에서 멈추어 예레미야의 심정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파괴적 가뭄 앞에 백성들이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자기들의 죄악을 온전히 회개하는 기도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가뭄의 원인을 하나님이 자기들을 돌보지 않은 탓으로 돌립니다. 당연하게도 하나님은 그 기도를 거절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거절의 메시지를 가뭄 가운데 고통당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성서일과 구약 본문은 10절에서 그치고 있지만, 11절 말씀은 더 충격적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너는 이 백성에게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나에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은 예언자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로 돌아서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돌아서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우리였다면 가뭄 앞에 드린 백성들의 기도를 듣고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았겠습니까?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하라 했더니 기껏 하는 말이 고작 하나님 왜 우리를 모른 척합니까, 구해 줄 힘조차 없이 나약하게 굴고 계십니까, 어서 빨리 우리를 구해주십시오. 라니, 너희들의 기도에는 진정성이 없다. 너희들의 고백과 용서를 구하는 말에는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너희들에게 닥친 가뭄은 너희들 책임이니 알아서 해라.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위하여 은총을 달라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나는 너희들의 일에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 이렇게 반응하지 않았을까요?
가볍게 말씀드렸지만, 이와 같은 반응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우리 사회는 어떤 문제가 발발하면 즉시로 사건의 원인과 해결 방안이 쏟아집니다. 개인 미디어가 극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는 저마다의 창구를 이용해 앞다투어 자기 의견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의견이라는 것은 대부분 시시비비가 명백히 가려진 판결문입니다. 여기엔 좌와 우가 다름이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공공의 문제에 관해 판관의 위치에 서 있습니다. '판결'과 '선고'는 난무하지만, '위로'와 '회복'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당신이 이러이러해서 문제라는 주장과 그 근거를 일목요연하게 열거하는 데는 달인이지만, 나와 우리의 문제일 수 있다는 고백에는 미숙하기에 그지없습니다. 모두가 재판관인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 앞에서 드리는 예레미야의 탄식하는 기도
가뭄은 심해지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자기들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암담한 상황에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어찌하여 우리를 이토록 치시며 기도조차 하지 말라 하시느냐 탄식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이렇게 기도를 드립니다. 본문 20절입니다.
20 주님, 우리는 우리의 사악함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 짧은 기도문 속에서 예레미야는 죄악의 주체이며 하나님의 징계 대상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자기 자신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나를 포함한 우리는 사악합니다. 우리의 조상 곧 나를 포함한 우리 세대 모두의 죄악을 인정한다고 고백합니다. 예언자는 지금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 안에 포함되고 있습니다. 죄인들과 자신을 구별하여 저들을 심판하고 판결 내리는 재판관이 아니라, 나 역시 저들과 같은 심판대 위에 서 있음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레미야가 드리는 지금, 이 기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명령 위반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향해 다시는 이 백성을 구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언자는 이 명령을 어기고 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이 백성을 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지금 하나님과 맞서고 있습니다.
저들의 죄가 곧 나의 죄입니다. 이 가뭄의 책임은 곧 나의 책임입니다. 예레미야의 기도에는 바로 이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닥친 가뭄이 어째서 예레미야의 책임입니까? 예레미야가 죄를 지어 가뭄이 오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와 가뭄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가뭄은 죄악을 근절하지 못한 저 백성들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자신과 백성들 사이에 선을 지웁니다. 책임이 없음에도 책임이 있다고 말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사라진 하나님의 예언자 정신이 바로 이것 아니겠습니까?
Mea Culpa(메아 쿨파)의 정신으로
가톨릭의 고백 기도 가운데, Mea Culpa(메아 쿨파) 참회 기도가 있습니다. 메아 쿨파는 라틴어인데, 기도문은 이렇습니다.
"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
번역하면,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모든 것이 내 탓이오.' 입니다. 작게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문제, 나가서 사회적, 국가적, 또는 전 지구적 문제에 대해 기도할 때, 가장 먼저 이 모든 것이 나의 탓이라는 기도입니다. 오늘 시대에 메아 쿨파의 기도는 어리석어 보입니다. 어떤 당면한 문제 앞에 있을때 어떤 이가 이렇게 기도한다면 정말 너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는 의심과 힐난을 당할 수도 있겠습니다. 작은 피해와 손해도 용납하지 않는 지금 시대에 메아 쿨파 기도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린 듯 보이는 이 기도를 되살려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항상 기도하며 우리의 신앙 지향을 삼고 있는 생명과 평화의 문제에서도 메아 쿨파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기후 위기가 화력 발전소 때문이고, 이익에 혈안이 된 기업들 때문이고, 일회용품 쓰기를 거리낌 없어 하는 내가 아는 어떤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의 책임이고 나의 문제라는 고백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는 나이브한 도덕 감상주의가 절대로 아닙니다. 책임을 나눠지겠다는 고백이고 용기입니다. 나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나 역시 이 문제에 나서겠다는 연대의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세계의 모든 개신교회는 오늘을 기념하며 개혁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을 것입니다. 참된 개혁의 의미와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오늘 저는 참된 종교 개혁이란 메아 쿨파의 정신, 곧 그 문제는 내 탓이며 나의 책임이 있다고 고백할 때 가능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성들의 죄와 어리석음을 재판관의 자세로 판단하지 않고, 나 역시 당신들과 함께 죄를 지었다는 예레미야의 메아 쿨파가 개혁의 시작이라고 믿습니다. 개혁과 갱신을 향하여 타협하지 않고 나의 전존재를 던질 수 있는 힘은 이것이 나의 문제요 나의 책임이며 나의 죄라는 고백에서 비롯됩니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 앞에는 정말 많은 문제가 놓여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첨예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개혁과 갱신의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러나 판관의 자세가 아니라 위로자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메아 쿨파의 기도가 토대가 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내 잘못도 아닌데 내가 어째서 그 책임을 지고 나 역시 죄인이라고 나서야 하는지 여전히 고민이라면, 죄 없으신 분이 스스로 죄인들의 자리로 낮아지신 분, 지극히 낮은 길을 택하신 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십시오. 주님은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죄가 곧 나의 죄이니 십자가를 대신 지겠다고 하늘에서 내려온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성육신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류의 구원과 해방은 죄 없는 분이 죄 있는 자들의 자리로 내려왔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음을 기억합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