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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 앞에서(신 30:15-20), 창조절 1주

청파비둘기 2025. 9. 7. 21:20


늙은 선지자와 젊은 백성들
늙은 모세가 모압 평지 위에 섰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가 백스무 살이니 걷기는 물론 서 있기조차 힘든 그였지만, 노인은 자기 앞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반드시 전해야 할 당부가 있었습니다. 늙은 모세가 천천히 입을 열자, 운집한 백성들이 귀를 열었습니다. 

모세는 모압 평지에서 전하는 그의 가르침이 자기 생애에서의 마지막 사역임을 직감했습니다. 그의 나이가 백스무 살의 고령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약속의 땅 목전에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 앞에 있다는 것이 어째서 모세 생의 마지막을 의미할까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약속 받은 땅으로 건너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미 그것도 여러차례 단호하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신명기 3장 26절 하반절과 27절 상반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신 3:26b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네게 족하니, 이 일 때문에 더 이상 나에게 말하지 말아라. 27a   너는 이 요단 강을 건너가지 못할 것이니,

말씀과 같이 모세는 약속 받은 땅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기 모압평지 그러니까 약속받은 땅의 입구는 모세에게 죽음의 자리 곧 자기 무덤이었습니다. 

반면, 젊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대한 기대에 한껏 부풀어 오른 상태입니다. 젊다고 표현한 이유는 여기 모인 백성들은 모두 출애굽 다음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함께 출애굽 한 첫 번째 세대는 모두 죽었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그의 형 아론도 다 죽었습니다. 허나 살아남은 젊은 백성들은 이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40여 년을 기다려온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 약속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른다고 알려진 그 땅, 더는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땅, 텐트가 아니라 집을 지을 수 있는 그 땅이 자기들 눈앞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벅찬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합니다. 어떤 이는 여기에서 이러고 있을 일이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저 약속의 땅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 아니냐며 조바심을 내기도 했을것입니다. 그야말로 열정과 에너지 그리고 생기가 가득한 모압 평지였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모세와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생명을 피워낼 젊은 세대 사이엔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서일과 신명기 30장 말씀은 광야와 약속의 땅 사이의 경계 그리고 죽음과 삶의 경계선 위에서 들려오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이 경계를 넘어설 수 없고, 백성들은 모세 없이 이 경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젊은 세대는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늙은 모세만큼은 이 사실을 엄중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하여 모세는 마음으로는 이미 경계를 넘어 약속의 땅으로 넘어가고 있는 젊은 세대를 멈춰 세웁니다. 그리고 그는 길고 긴 최후의 당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속은 보장이 아니다
본문 15절을 입니다. 

15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모세는 광야와 약속의 땅 사이 경계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택지가 놓여 있다고 말합니다. 그 선택지에는 두 가지 항이 있습니다. 첫째 항은 생명과 번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명령과 규례를 온전히 지킬 때 얻게 되는 복을 말합니다. 둘째 항은 죽음과 파멸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엎드릴 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말씀을 거역할 때 뒤따르는 죄의 대가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거룩한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의 복을 받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의 길을 떠날 때 벌과 저주를 받는 다는 신학적 관점을 조금 어려운 말로 '신명기 사관'이라고 합니다. 신명기 전체에는 이 사관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순종에는 복이 따르고 불순종에는 저주가 따른다는 이 말씀이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둔 이들에게 선포되었다는 점입니다. 

출애굽 후 약속받은 땅으로 들어가기까지 4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말씀드렸듯 출애굽 1세대는 약속의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그 땅으로 들어가려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현명한 지도자라면 광야 어딘가 적당한 곳을 찾아 정착한 후 민족을 보전하는 쪽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 길이 더 합리적으로 보이고 생명을 지키는 데도 더 유익한 결정이겠지요. 그럼에도 끝끝내 약속의 땅을 향한 행군을 멈추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땅에 젖과 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젖과 꿀은 풍요와 번영 그리고 안식과 평화의 상징입니다. 광야에서 온갖 고초를 겪을지라도 멈추지 말고, 그 땅을 가야 하는 이유는 그곳에 도달해야만 참된 안식과 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말을 다시 상기해 보십시오. 너희가 오늘 이 경계를 넘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토록 염원한 생명과 번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죽음과 파멸도 함께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으며 미리 준비해 두신 땅이라면 응당 생명과 번영만이 있어야지 어째서 죽음과 파멸도 나란히 있을 수 있는가? 죽음과 파멸이라면 약속의 땅이 아니라 여기 광야 사방 천지에도 가득한 것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고생을 하면서까지 그 땅에 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가 약속의 땅에 관하여, 나아가 주님의 약속에 관하여 얼마나 큰 오해를 하고 있는지 폭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야 할 그 땅에서 받게 될 약속은 생명과 번영이 아닙니다. 지극히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은총이요 약속입니다. 허나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선택할 수 있음이 어째서 약속이고 은총이 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선택보다는 명확하고 확실한 보상과 결과를 원합니다. 선택지가 여러가지로 주어진 문제보다 단 하나의 옵션만을 찾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이렇지 않습니까? 주님, 길을 보여주십시오. 다만, 딱 한 개의 길만 보여주십시오.


선택이 곧 믿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걸을 때 그들 앞에 놓인 선택은 오직 한 가지, 다음 장소로 가라, 이것 하나였습니다. 홍해 앞에 당도할 때까지는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백성들을 지키고 인도했습니다. 갈라진 홍해를 지나온 후에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임재가 멈춤과 출발을 지시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도 곁에 있었습니다. 비록 광야 여정이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들은 그저 가라 하는 곳으로 가면 되었고, 멈추라고 하는 곳에 멈추면 그만이었습니다. 선택지를 앞에 두고 고민하거나 끙끙 씨름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물론 여정 간에 이런저런 사고를 치며 모세를 난처하게 만들고 하나님께 엄한 꾸지람을 듣기도 했지만, 나아가야할 다음 장소는 언제나 분명했습니다. 길은 딱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경계선을 넘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고 모세는 말합니다. 경계선 너머에서는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더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만나와 메추라기 역시 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가야 할 방향을 구체적으로 지시해 주지도 않습니다. 대신 경계선을 넘는 순간 무수한 선택만이 있을 뿐입니다. 성을 함락하기 위해선 정탐꾼을 선별하여 보내야 하고, 법과 제도를 만들고, 규칙을 세워야 합니다. 지도자를 가려서 뽑아야 하고 지파 간에 이런저런 몫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선택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게다가 바른 선택은 그에 따른 보상이 있지만, 그릇된 선택에는 냉혹한 징계가 따르게 됩니다. 은총과 약속에 땅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안식과 번영과 보장된 미래가 아니라 무수한 선택지입니다. 선택의 딜레마에 빠지는 일이, 때때로 그 선택에 따라 불이익이 따라 올 수도 있음이 어찌 은총이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앞에 한 가지 길만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요. 선택지도 하나 길도 하나 그렇기에 결과도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면 지리산가리산 갈피 못 잡는 우리의 번잡스런 일상에 질서도 생기고 안정감도 생기게 되지 않겠습니까? 현대 마케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선택의 고민을 없애는 것이듯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선택지가 없는 삶은 살아있는 삶이 아니며, 성숙한 삶의 모습도 아님을 말입니다. 때로 그릇된 선택을 내려 실패와 후회를 감내하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선택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성숙합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그의 강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통해 사람은 자기 자신이 선택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로지 선택을 통해 인간의 실존을 창조한다고 말합니다. (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방곤 역, 문예출판사, 2013, 19-20.)

선택을 통해 나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주조하는 또 하나의 창조 과정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은 신앙 세계에서도 유의미한 통찰을 던집니다. 무엇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겠습니까? 무엇이 우리의 신앙을 깊고 품 넓게 만들겠습니까? 선택입니다. 미워하기를 멈추고 사랑하기를 선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조금 더 가까워집니다. 비난하기를 중단하고 용서하기로 마음먹을 때 우리의 신앙은 조금 더 넓어집니다. 모압 평지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모세의 마지막 당부가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 19절을 보겠습니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

모세의 간절한 외침을 우리 또한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경계선을 넘어 하나님의 세계로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갈 때 우리가 맞이하게 되는 것은 확신과 평안과 번영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생명을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생명을 선택하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라고 외치는 모세의 유언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을 선택하라
그러나 여러분 이것 또한 꼭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우리의 선택을 방해할 것입니다. 인간의 충성심을 사로잡기 위해 멋지고 근사한 것을 내어놓으며 이것들을 잡으라고 유혹합니다. 그럴듯해 보이는 선택지를 제시하며 이 길 끝에 번영이 있다고 손짓합니다. 아니, 어쩌면 세상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경계선을 넘어서는 일이 두렵고 선택을 마주하는 일이 버겁다면, 차라리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아무것도 선택하지 말기로 선택하라. 그저 지금 서 있는 자리에 만족하고 지금 모습 그대로 살아가라. 

세상이 제시하는 교묘한 속삭임에 단호히 아니라고 답하십시오. 우리는 광야에 머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다음 세계가 우리 눈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우리는 경계를 넘어가 그곳에서 생명의 선택을 하며 하나님 나라를 일궈나가야 합니다. 선택은 미지의 문을 여는 행위이기에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선택이라는 미지의 문을 열지 않으면 우리의 세상은 언제까지나 비좁은 상태로 머물고 말 것입니다. 하여 우리는 경계를 넘어 생명을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서신의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바울의 딱 한 장짜리 서신인 빌레몬서입니다. 내용도 간단합니다. 바울의 사랑하는 동역자이자 빌레몬에게 한 사람을 용서해달라고 청합니다. 그 사람은 오네시모라 불리는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재산에 큰 손해를 초래했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만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는지, 오네시모는 옥중에 있는 바울을 만났고, 아마 그때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이 서신을 보냅니다. 

바울의 편지와 함께 도착한 오네시모를 본 빌레몬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자기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하기까지 한 노예를 다시 본 빌레몬은 분명 화가 치솟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서신을 읽었겠지요. 빌레몬서 12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12   나는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는 바로 내 마음입니다.  

빌레몬이 바울의 서신을 손에 든 순간, 그는 경계선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이게 됩니다. 오네시모를 법에 따라 엄정히 처리할 것인가, 아니면 그를 용서하여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일 것인가? 여러분,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했을까요? 그를 징계했을까요? 성경은 빌레몬의 답을 우리에게 들려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초대 교회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오네시모는 훗날 디모데를 뒤이어 에베소 교회의 주교가 되었다고도 전해지며, 로마 황제에 의해 박해받아 처형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전설이기에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으나 초대 교회는 오네시모를 지극한 존재로 여겨왔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빌레몬의 선택이 간단했을까요? 어려웠습니다. 죄를 짓고 노망한 노예를 대가 없이 용서한다면 세상으로부터 무지렁이 취급을 받으며 수치를 당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로마의 법도를 어겼으니, 조사를 받아 되레 자신이 징계를 당할 수도 있었지요. 빌레몬에게 선택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오네시모를 징계하라. 그것이 이치에 바른 일이며, 빌레몬 너에게 있어 명예로운 선택이다. 이런 외침이 그의 마음을 두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레몬은 생명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자의 당연한 자세임을 그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경계선 앞에서 생명을 선택한 빌레몬의 삶이 주님 주시는 참된 복과 평안을 누리며 그와 그의 교회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가 생명을 선택함으로 그의 세계는 비로소 약속의 땅이 되었습니다.

경계선 앞에 선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는 장성할수록 또 우리의 신앙이 점점 더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선택 앞에 놓이게 됩니다. 가깝게는 진로나 진학일 수 있고, 사람에 대한 판단일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난감하고 괴로울 수 있습니다. 선택들 뒤에 무엇이 놓여있는지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럴 때 나의 선택이 생명인지 돌아보십시오. 죽음의 선택이 아니라 살리는 선택인지를 확인해 보십시오. 이윽고 희미하게나마 길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생명을 선택하며 경계선을 넘어서십시오. 하나님의 드넓은 세계가 우리 앞에 있음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