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눅 12:13-21)
한 가지 염려
두 주 전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식사를 챙기느라 마음이 분주했던 마르다를 타이르셨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근심하고 있다." 이 말씀에는 질책이나 훈계가 아니라 격려였습니다. 주님을 잘 대접하고픈 마음 다 알고 있으니, 괜찮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동생과 부러 비교하여 마음이 상할 필요가 없다. 그저 나의 세계 안에 머무르면 된다는 위로의 말씀이었음을 우리는 함께 살폈습니다.
마르다가 여러 가지 일로 염려했다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서의 남자는 한 가지 일로 염려가 가득합니다. 그것은 유산 곧 돈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 가운데 한 남자가 나서서 주님께 요청합니다. "선생님, 내 형제에게 명해서,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 우리가 보는 새번역 성경은 형제라고 번역했지만, 맥락을 본다면 동생이 형에 대해 하는 말입니다. 아마 유산 상속에 문제가 발생한 모양입니다.
유대 사회의 유산 상속은 많은 경우 형 혹은 장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통상 형이 상속 재산의 3분의 2, 동생은 그 나머지를 받았습니다. 장자의 상속이 많고 더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에서와 야곱 이야기를 떠올린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지요. 동생 야곱은 형이 받을 축복, 정확히는 유산을 빼앗기 위해 계책을 꾸미고 형이 받을 축복 곧 유산을 빼앗습니다. 이 일로 두 형제는 심각하게 다투고 서로의 목숨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총으로 두 형제는 화해하지만, 상속 다툼이 얼마나 큰 문제였고 또 비일비재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언제나 정의로우셨던 주님이시기에 이 남자는 적절한 대답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남자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14절을 보겠습니다.
14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
한 마디로 주님은 남자의 청을 거절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재산을 나누거나 유산을 분배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몸을 돌려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는 여기에서 잠시 멈추어 이 말씀을 조금 깊게 들여다보겠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유산을 공정히 배분해 달라 청한 이 남자를 욕심 가득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본문만으로 이 남자 안에 탐욕이 깔려 있음을 밝혀내기는 어렵습니다. 남자의 요청은 단순합니다. 주님은 권위가 있으니, 자기 형에게 말해 유산을 나눠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산을 법에 따라 정당하게 집행하게 힘을 써달라는 것이지 더 많이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맥락을 보자면 아마 그의 형이 유산을 독점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한 가지, 이 남자가 말한 유산은 무엇을 말할까요?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유산 곧 재산은 대부분 땅이었습니다. 현대와 같이 금융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숫자로 기록되는 자산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땅은 생계유지에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작은 땅이라도 하나 있어야 소출을 내어 자급하거나 장에 내다 팔아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형이 유산으로 받을 땅을 독점한다면 이 동생은 생계 수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매몰찬 말씀에 남자는 속으로 항변했는지 모릅니다. '주님, 돈 많이 달라는 것 아닙니다. 그 땅, 그것 없으면 저는 죽을지도 모릅니다.' 응당 받아야 할 땅을 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이 남자를 향해 주님은 어찌하여, 마음을 조심하고, 온갖 탐욕을 멀리하라.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다는 어찌 보면 판에 박힌 말씀을 하고 계실까요? 이 물음 앞에 우리는 천천히 성찰해야 합니다.
생명을 지켜준다 믿는 것들
우리가 세심하게 붙들어야 하는 말씀은 본문 15절의 마지막 단락,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입니다. 그 남자를 향해 주님은, 너의 생명은 네가 그토록 갖고 싶어 하는 그 땅에 달려 있지 않다. 그 땅이 없으면 네 생명이 끊어진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은 언제나 많은 일로 근심하는 것 같으나, 실상 그 염려들은 한 가지로 귀결됩니다. 이 불안한 사회에서 나를 지켜줄 수 있는 한 가지, 나는 그것을 갖고 있는가? 입니다. 그 한 가지가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많은 경우 풍족한 재산, 혹은 그 재산을 가장 빠르게 획득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어떤 특권이나 능력이지요. 그것 하나 갖고 있으면 남은 생이 평안하리라는 기대를 갖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 삶, 노후, 생명을 보장한 딱 한 가지를 쟁취하려 사력을 다합니다.
물론 이 세태와 풍조를 누가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일 하겠다고 나섰지만, 초라한 잔고와 집 한 칸 마련할 능력없는 저를 돌아보면 답답하지요. 주님께 내 삶 다 맡긴다고 장담하지만, 갈수록 치열해지는 우리 세상을 보며 나는 이미 저 멀리 뒤쳐진ㅇ것 아닌가 두려움이 엄습하고 있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몇 달 전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다큐의 시선은 대치동 학원가를 쫓아갑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수능을 앞둔 고등학생이 아니라 아직 부모 품에서 뛰어놀아야 할 7살 아이들, 만으로 계산하면 5살쯤 된 그야말로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이른바 '7세 고시'라는 시험을 치르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대치동 학원에 줄을 섰는데 그 모습이 그야말로 장사진이었습니다. 수 시간에 걸쳐 저것이 이 아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지 의심이 들 만큼 난도 높은 영어 시험과 수학 시험을 보고 그 결과에 따라 학원 입학의 당락이 결정되었는데, 부모와 아이들은 그야말로 필사적이었습니다. 시험장이 무섭다고 들어가지 못하는 아이를 보채는 부모를 보며 마음이 무척 복잡해졌습니다.
다큐 중간중간 학부모 인터뷰가 나왔습니다. 저는 유심히 보았습니다. 학부모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 아이를 이른바 '고시'의 전장으로 보낸다고 말했습니다. 아이에게 부담이 됨을 모르지 않으나 어쩔 수 없다는 고백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저는 영상 속 부모들로부터 어떠한 탐욕도, 욕심도, 무모함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제 아이를 부자로 만들겠다는 허무맹랑한 기대감도 저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제가 본 것은 두려움, 불안, 초조였습니다. 제 아이가 세상으로부터 뒤처질지 모른다는 공포는 생각보다 무척 강합니다. 하여 수학 하나만이라도, 영어 하나만이라도 갖춘다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힘이 되겠지, 꼭 돈 잘 버는 전문직이 아니더라도 남들보다는 나은 삶을 구가할 수는 있을 거라는 불안한 희망이 그 부모들의 얼굴에 서려 있었습니다. 여기에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헛된 것을 크게 짓는 세상
그러나 주님은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그리고 뒤이은 주님의 비유 말씀은 우리의 공고한 믿음에 균열을 냅니다. 비유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어 행복한 고민에 빠집니다. 이내 그는 본래 자기 곳간을 헐고 더 큰 곳간을 지어 자기의 모든 소출을 쌓아두자고 다짐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먹으니 흡족하고 기쁨이 가득합니다. 부자는 자기 영혼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18절입니다.
19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새로 지은 커다란 곳간은 영혼을 기쁘게 합니다. 곳간에 가득 쌓인 소출을 보며 여러 해 동안은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곳간 하나 짓기 위해 살아갑니다. 넓고 크고 높으며 무엇보다 영원히 서 있을 곳간 하나 만들기를 갈망합니다. 이 곳간 하나 짓기 위하여 7살 아이들이 학원을 전전하며 성적이라는 소출을 내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이 곳간 하나 세우기 위하여 우리의 청춘을 바칩니다. 더 크고 견고한 곳간을 짓기 위하여 스펙이라는 벽돌을 켜켜이 쌓아 올립니다. 곳간을 짓는 일도 힘에 부치는데, 내 옆에 누군가가 나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크게 곳간을 지어 올라가는 꼴을 보자면 우리는 이내 불안과 불쾌에 휩싸이고 그보다 더 빨리 더 크게 짓기 위해 갖은 수를 쓰곤 합니다. 그렇게 점점 높이 솟아오르는 곳간을 보면 위로와 평안을 얻습니다. 저것 하나 붙들고 있으면 내 영혼은 안전하고 생명도 보장되리라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세태가 어디 개인의 욕심이나 욕망 때문이기만 하겠습니까? 세상이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세상은 자기 곳간 하나 없는 이를 멸시합니다. 작은 곳간은 안전하지 못하니 더 큰 곳간을 지어야 한다고 부추기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얻어낸 소출을 쌓아둘 곳간을 짓고 그 규모를 늘려가는 데 매진하면 매진할수록 나의 영혼은 평안보다는 불안으로, 행복보다는 괴로움만 쌓여 가는 것 같습니다. 남들보다 빨리 움직이면 더 많은 열매를 얻을 줄 알았는데, 서두른 탓인지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발견합니다. 우울하고 괴롭습니다. 초등학생들의 정신 건강이 심각하게 붕괴하고 있다는 경고가 전문가들한테서 나온 지 이미 오래입니다. 한국 사회의 자살 문제가 어제오늘이 아니지만, 10대는 물론이고 여러분들과 같은 2030 청년들의 자살률이 심히 증가했습니다. 그 가운데 20대 여성들의 자살은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서울시 자살예방센터장인 김현수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교수는 말하길 여러 요인이 있으나, 우리 사회 안에서 "젊은 여성들의 개인적·사회적 좌절이 쌓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더 크고 넓은 곳간이 우리의 생명을 지키고 영혼의 평안을 주리라 믿었는데 되레 우리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으니, 생명이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는 주님의 말씀이 더욱 엄중하고 무겁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헛된 것을 크게 지어 올리며 거기에 우리의 생명을 의탁하려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합니다. 썩지 않고 영원히 힘을 발휘할 것 같은 것들이 실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전도서의 말씀이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헛된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오늘 성서일과는 허무와 냉소의 대명사로 세간에 알려진,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전도서 말씀을 오늘의 누가복음 말씀과 함께 읽도록 배치합니다. 대단히 의도적인 배열입니다. 전도서의 이 말씀이 세상의 무용함과 허무함에 대한 자조적 고백이 아님을 최근 지혜문학 연구가 밝히고 있는 바입니다. 김기석 목사님의 신간인 <지혜의 언어들>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헛되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헤벨’(הֶבֶל)은 ‘숨’, ‘바람’, ‘안개’를 뜻하는 단어로 해가 뜨면 이내 사라지고 마는 안개나 연기 같은 것을 상징합니다. 재산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어느날 밤 호흡이 끊어지고 나면 그 모든 것들이 헛된 것이 되고 말지 않겠느냐는 주님의 말씀이 바로 전도자의 지혜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과 삶이 발 딛여야 할 헛되지 않고 굳건 하며 영원한 터전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이 성찰은 단번에 끝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 전체 기간동안 끊임없이 묻고 답해야합니다. 게다가 삶의 경험도 짧고 미숙한 저 같은 초보적인 목회자가 그리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저 역시 여러분들과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이 문제를 일주일 내내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지난 날 나를 생명 있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돈과 재물이 아니라면 나를 지금까지 살아있게 했던 것들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물론 이따금 선물처럼 찾아온 작은 성취들이 나를 살아나게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나를 살아나게 했던 것은 성취나 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 대단한 것 없는 작고 무용하고 사소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거기에 크고 우람한 곳간은 없었습니다. 숫자로 환산될 수 있는 자산목록들도 아니었습니다. 다정한 사람들과의 대화, 분명 나의 잘못임에도 선선하게 받아준 용서, 기쁜 일에 함께 얼싸안고 기뻐하는 친구들, 슬픈 일에 한 달음에 달려온 이웃들, 이런 것들이 오늘까지 나를 살려 놓고 있었습니다.
지난주에 모처럼 영화 한 편 봤습니다. 네오 소라 감독이 연출한 <해피엔드> 영화 시작 5분 만에 이 영화는 멋진 영화가 될 것 같았는데, 역시 영화는 멋지게 끝났습니다. 가까운 미래 일본으로 대지진의 전조가 드리운 사회와 학교가 배경입니다. 고교 졸업반 친구로 단짝이었던 코우와 유타 그리고 또 다른 세 명의 친구는 이미 망해버린 세상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를 달래며 살아갔지요. 어느 날 돈과 출세밖에 모르는 교장의 새 스포츠카에 황당한 장난을 칩니다. 그 결과 학교는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버리지요. 이때부터 친구들의 관계는 조금씩 금이 갑니다. 그리고 우려했던 지진이 발생하고 청춘들의 골은 깊어집니다. 영화가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많은 내용을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도 많겠지만, 꼭 보시길 추천합니다. 제가 참 좋았던 부분은 이 영화의 거의 마지막 시퀀스였습니다. 영화는 대단한 반전이나 극적 연출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습니다. 다만 영화의 주연들이 서로 얼싸안고 울고 웃는 장면을 비춰줍니다. 저는 그 장면이 지진이 끊어버린 연결을 스스로 이은 결단으로 보았습니다. 불안 가득했던 현실을 다시 살게 해준 것은 결국 어깨동무라는 작은 연대였던 것이지요.
주님은 생명이 돈과 재산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으로 민망한 세상 물정 모르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크고 높은 곳간을 짓는 중에 생명을 잃어가는 많은 영혼을 볼 때 그 말씀은 여전히 생생한 현실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그야말로 폭주하고 있습니다. 강대국들은 더 큰 곳간을 짓기 위해 파렴치를 자처합니다. 가진 자들은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양심 버리기를 거리껴 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곳간을 증축하고 문을 걸어 잠글 때, 우리는 오히려 곳간 문을 열어야 합니다. 괜찮으니 들어오라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나눠 갖자고 말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고받는 언어들은 사랑의 언어일 수밖에 없습니다. 연대의 어깨동무가 생명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생명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영원한 것에 우리의 영혼을 잇대는 삶입니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도 곳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아니 만들어야 합니다. 재능을 잘 살리고, 열심히 노력해서 견실한 곳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곳간의 문은 헐거워야 합니다. 아낌없이 내어줄 때 우리는 비로소 연결됩니다. 그렇게 연결된 사람들 사이에 생명이 꽃피어 납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이 됩시다. 아멘.